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8호인 부안 서문안 당산이 자리하고 있다. 당산이란 민간신앙에서 신이라고 섬기는 신앙의 대상물이다. 서문 안 당산은 높은 돌기둥과 돌장승이 각각 1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는 도로변에 자리한다. 당산이라고 부르는 돌기둥은 마을 밖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부정한 것에 대한 침입을 막고, 마을의 안과태평을 위해 세운 솟대의 일종이다.

이 서문 안 당산은 부안군청 서쪽 약 40m 지점에 큰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었던 것을, 할머니 당의 자리에 모아 놓았다. 이 두 쌍의 솟대와 장승은 부안읍성의 서문 안을 보호하는 것으로 조선조 숙종 15년인 1689년에 세워졌다. 원래는 사문으로 통하는 길 양편에 서 있던 것을 1980년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은 돌기둥

이 두 개의 돌기둥은 각각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이라고 한다. 할아버지 당산은 서문 안 당산의 주신으로, 꼭대기에는 돌로 조각된 새가 얹혀 있다. 할아버지 당의 받침돌에는 '알받이 구멍'이라는 작은 구멍이 여러 개 파여져 있다. 이 알받이 구멍은 당산제를 지낼 때 쌀을 담는 곳이다.

할머니 당산은 새를 따로 얹지 않고 돌기둥 윗부분에 새겨서 표현한 특징을 보인다고 했다. 또한 할머니 당산의 윗부분에 새는 머리를 바다 쪽으로 향하게 해, 부안 읍내의 화재를 예방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할머니 당산을 보면 당산의 허리 부분이 떨어져 나가, 위에 있는 오리를 확인할 수가 없다.



길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할아버지 당이 서 있고, 그 옆에 위가 유실된 할머니 당이 서 있다. 그리고 돌장승 한 쌍이 나란히 서 있다. 할아버지라고 하는 남장승은 복판에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라 음각했으며, 머리에는 탕건을 쓰고 수염이 있다. 눈썹은 굵게 표현을 했으며 눈은 앞으로 튀어나온 왕방울 눈이다. 코는 주먹코에 볼은 불거져 있어, 흡사 입 안에 사탕이라도 물고 있는 형상이다. 상원주장군은 '당산하나씨' 또는 '문지기장군'이라고도 부른다.

우측에 있는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조금 작은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복판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새겨져 있다. 할머니 석장승은 할아버지 석장승보다 많이 마모가 된 상태이며 복판에 글씨도 알아보기가 힘들다.


알받이 구멍, 그런 것이었구먼

이 마을에서는 돌장승 2기와 돌기둥인 솟대 2기를 묶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며, 매년 음력 정월초하루 자정을 당산제를 시작해 다음날까지 지낸다. 예전에는 공동체의식이 강해서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부안 동문 안과 남문의 당산을 함께 모시는데, 이는 서문 안 당산이 주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마을마다 지내던 마을제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해 지내던 마을제는 단순히 의식으로서의 기능만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공동체를 창출하고, 그 공동체가 서로를 위하는 상부상조의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사라져버리고 약식화 되어가는 마을제가 소중한 것은, 바로 그 안에 공동체의 무한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5호 윤민걸 가옥은, 윤민걸의 고조부인 윤양계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양반가 한옥으로 지어진 이 집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담이 있고, 중문을 들어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아래채가 있다. 안마당에 있었을 행랑채는 유실이 되었다고 하며,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초가로 지은 광채와 뒷담을 벽으로 삼아 꾸민 사당이 있다.

충주시청 홈페이지에 보면 윤양계는 <병마절제도 위 연길현감 도청부도사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고종 2년인 1865년에 이 집에 살았다고 안내문에 적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집을 지은 지는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윤양계가 이 집에 살았다는 고종 2년에 연길현의 현감이었다고 적었는데, 이는 연일현의 오자로 보인다. 승정원 일기의 한 대목을 보자.



'고종 3(1866)년 5월 16일. 경상 감사 이삼현(李參鉉)의 장계에서 진휼하여 구호한 각읍 가운데 베풀어 도와준 것이 뛰어난 수령들의 별단을 등문(登聞)한 것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하양 현감(河陽縣監) 류치윤(柳致潤)은 오고(五考)를 기다리지 말고 군수에 승천(陞遷)시키되 별천(別薦)의 예로 시행하고, (중략) 연일 현감(延日縣監) 윤양계(尹養桂)와 고성 현령(固城縣令) 윤석오(尹錫五)는 모두 가자하고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고, 우병사(右兵使) 이주응(李周應)은 가자하고, 대구 영장(大邱營將) 서형순(徐珩淳)은 방어사의 이력을 허용하라.‘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이 윤민걸 가옥의 조성연대가 언제인지는 좀 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고종 2년에는 윤양계는 연일현감으로 재임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연일에 있었다고 해서 충주에 집을 짓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사랑채의 뛰어난 미적 감각

안담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별채라고 부르는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ㅡ자형 평면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중앙의 전면1칸은 튼 마루로, 그리고 좌측의 한 칸을 툇마루로 조성을 하였다. 뒤편으로는 온돌방을 놓았으며, 우측의 1칸은 마루를 높여 우물마루를 깔았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사랑채 같은 형태인 듯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재미난 곳이 많다. 우선 우측의 마루방을 높였다는 것도 그렇지만 창호가 색다르다. 이 방은 일반적인 사분함 여닫이문이 아닌 중방 위에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다. 중앙에 툇마루는 앞을 터놓았는데, 좌측의 툇마루는 방처럼 꾸몄다는 것도 이 사랑채의 특징이다.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벽에 새인 듯한 그림을 그려놓았다. 지난해에 보수를 하면서 그린 것인지, 아니며 오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재미있다.



안채와 아래채의 단아함

안채는 ㄱ자형으로 꺾여있다. 좌측으로부터 부엌과 두 칸의 방, 대청이 있고 안방의 꺾어진 부분에는 큰 방을 드렸다. 큰 방의 끝에는 판자로 벽을 막은 한데아궁이를 두고 그 위에 다락을 조성했다. 그런데 이 안방의 뒤편에 마루로 놓은 돌출된 부분이 있다. 안채의 우측 벽면에 돌출을 시킨 이 부분은 소중한 것들을 보관하던 '안 창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뒤편의 툇마루 끝에 출입문을 달아 놓은 마루방과 안방에서 들어갈 수 있는 마루방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안채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부엌에서 볼 수 있다. 이 정도의 큰 집이라면 까치구멍이 양편으로 나 있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윤민걸 가옥은 환기를 시키는 까치구멍이 뒤편의 문 옆으로만 있다. 연기 등이 안마당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다.



왜 바깥담을 아름답게 했을까?

사랑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3칸의 마루방을 드린 사당이 있고, 그 옆에 초가로 지은 광채가 있다. 그런데 뒷담에 나 있는 사주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바로 바깥 담장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광채와 사당채의 뒷벽이 그대로 바깥담이 되어있는 윤민걸 가옥의 특징이다. 사당과 광채가 떨어진 ㄱ자형으로 되어있는데, 이 바깥담인 벽을 모두 심벽으로 처리를 했다. 왜 이렇게 바깥담을 아름답게 치장을 한 것일까? 이런 바깥담에 대한 꾸밈은 집의 전체가 그렇다. 솟을대문부터 바깥담을 모두 심벽처리를 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었을까? 두고두고 고민을 해야 할 문제인 듯하다.



고택은 아름답다.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숨은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집 주인의 심성을 닮는다. 집을 지을 때는 자신들이 가장 사용하기 적합하게 꾸민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개성을 강조한 것이 우리 고택의 멋이다. 천편일률적으로 변해가는 서구식의 가옥들. 그런데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꿋꿋하게 버티어 낸 나름대로의 고집 때문이다.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이 있는 특별한 집이 있다. 충북 제천시 금성면 구룡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7호인 박도수 가옥은,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을 두고 있다. 날이 추워서이지 겨울철 난방을 하느라 비닐로 안채의 전면을 모두 막아 놓았으나, 전면에 보이는 살창이나 대청과 붙은 쪽의 판장문 등이 광임을 알 수 있다.

왜 이곳에 광을 들여놓았을까? 박도수 가옥은 현재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실례를 범할 수가 없었다. 비닐로 막은 안쪽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집이다.


판자벽으로 막은 문간채의 조형미

대문채의 앞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좌측으로부터 대문, 두 칸의 방과 광으로 구성된 대문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20세기 초에 지어졌다는 대문채는, 한편을 판자벽으로 막아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단순한 판자벽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각종 농기구 등을 쌓아두는 헛간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부정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다. 두 칸의 방 앞에는 툇마루가 없이 바로 툇돌로 내려가게 돌을 놓았다. 대문채의 바깥쪽 문틀을 꾸민 목재의 문양으로 보아, 이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듯 하면서도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는 박도수 가옥의 대문채다.



특히 대문채의 안으로 들어가면 판자로 만든 굴뚝이 더욱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마치 푸근한 고향집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그러한 정겨운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살기에는 불편할 줄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집이다.

모채의 쓰임새는?


박도수 가옥은 - 자형의 대문채와 ㄱ 자형의 안채가 있고, 건넌채인 모채가 트여진 쪽을 막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형으로 꾸며졌다. 20세기 초에 대문채와 함께 지어진 모채는 대문채 옆에 난 일각문을 통해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하였다. 양편에 부엌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의 방을 드린 모채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아마도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했을 경우 이 모채는 행랑채의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것 같다. 기존의 문간채나 안채보다 단순하게 지어진 것도 그렇지만, 가운데 방을 두고 양편에 부엌을 둔 것이 이 모채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모채를 드나드는 별도의 문인 일각문을 두었다는 점도 그러하다.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의 구성에서 보면, 이 모채 외에는 행랑채로 사용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안채에 낸 광은 종자를 보관하는 곳?

비닐 밖에서 확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남는 박도수 가옥. 전체적으로는 서쪽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차례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서 두 칸 대청과 광, 건넌방을 두고 있다. 특이한 것은 바로 이 광이다, 광을 이곳에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에서 마땅히 광을 둘만한 공간 확보가 어렵다고 해서 안채에 광을 둘 이유는 없다. 아마도 이 광의 용도는 농작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곳이었던 곳 같다.



대청에 다락을 만들어 사당을 드린 것도 이 가옥의 남다른 면이다. 광을 지나면 건넌방의 마루를 높이고 투박한 난간을 둘러놓았다. 아마 이 건넌방을 안사랑방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 가옥보다는 특이하게 꾸며진 박도수 가옥. 집안의 구성이라든가, 꾸밈이 전례가 없다는 집이다. 동치(同治) 3년인 1864년에 지어졌다는 상량문이 있는 박도수 가옥. 그 특이함이 눈길을 끈다.




안채의 서쪽 끝에 있는 부엌은 대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판자 바람벽을 설치했다. 그리고 위편에 까치구멍을 내고, 아래편에도 까치구멍을 내었다. 대농의 집이라기엔 조금은 좁다는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좁은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을 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안채 뒤편의 툇마루가 그러하다, 일반 가옥의 툇마루보다는 넓게 꾸며졌다. 집안에서 사용하는 기물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점도 이 가옥의 특징이다.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26호 김영구 가옥은, 조선 영조 29년인 1753년에 지어졌다. 이 김영구 가옥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김영구 옹이 40여년 전에 구입을 하여 살고 있다. 원래는 풍양 조씨들이 살고 있던 집으로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조석우가 지은 집이라고 한다.

김영구 가옥은 세 번째나 방문을 했다. 김영구 가옥은 볼수록 폐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집이다. 마치 철옹성 같다고나 할까? 전체적으로는 ㅁ자형으로 구성된 본채는 앞에 누마루로 달아 만든 누정이 달린 시랑채가 있고, 사랑채의 서쪽에 붙여 대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길게 ㅡ 자로 늘어선 안채와, 양편에 날개채를 달았다. 안채의 지붕이 높여 날개채와 구분을 한 것도 이집의 재미있는 모습이다.


철저하게 안채 출입이 통제된 가옥

날개채에는 양편 모두 광을 달았고, 서쪽 날개채는 부엌과 연이어져 있다. 동쪽의 날개채의 끝은 일각문과 연결이 되어 사랑채와 연결되고, 서쪽의 대문은 사랑채와 날개채를 연결하고 있다. 결국 두 곳의 문을 통하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50년 전만 해도 마을사람 반도 이 집을 드나들 수가 없었다'는 김영구옹의 설명대로 이 집은 어느 누구도 안채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집이었다. 그만큼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이 되어 있다. 경기지방의 보기 드문 가옥의 구조로 되어있다.

"우리 집은 정승 판서가 22명이나 나온 집이여"

집을 여기저기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집 주인인 김영구옹이 말씀을 하신다.



"여기 이 집은 신문 방송에서 많이 촬영해갔어. 이집에서 정승 판서가 22명이나 나왔거든."
"어르신은 어떻게 이 집에 살게 되셨어요?"
"우리 선대부터 이 마을에 살았는데, 이 집이 판다고 나왔어. 나도 자식들을 키우고 있으니 이집을 사면 아이들이 잘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자녀분들은 다들 잘되셨나요?"
"탈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들 살고 있으니 그 정도면 됐지."

김영구 가옥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과연 이 집에서 정승 판서가 22명이나 나왔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마을중앙에 조금 높게 앉아있는 이 집은, 얼핏 보기에도 명당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김영구옹의 말씀대로 이 집에서 그렇게 많은 정승 판서가 나왔을까? 좀 더 세세하게 이 집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집을 지은 석재나 기둥, 처마 등을 보면 이 집은 지방의 공인이 지은 집이 아니다. 석재는 모두 잘 다듬어져 있다, 계단을 쌓은 석재나 주추로 사용한 석재들이 모두 일반적인 자연석을 주추로 사용을 한 것이 아니다. 잘 다듬어진 석재와 누마루를 놓은 형태. 그리고 처마 등을 살펴보면 한양에서 집을 짓던 경장(京匠) 등을 데려다가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해시계가 왜 여기 있을까?

김영구 가옥의 안채로 들어가면 사랑채 뒤에 붙은 높은 굴뚝이 있다. 그 굴뚝 앞에는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고, 경기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된 해시계가 있다. 별 장식이 없이 화강암으로 만든 이 해시계는 높이 0.76m에, 위 평면의 넓이는 25cm 정도가 된다. 가운데는 깊이 1cm 정도의 구멍 흔적이 있다. 아마 이곳에 나무 같은 것을 꽂아, 태양의 일주운동에 따라 그 그림자로 시간을 쟀을 것이다.

이 해시계에는 명문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읽을 수가 없다. 이 해시계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조선 세종 16년인 1434년 세종의 명에 의해 장영실이 해시계를 만들어, 흠경각에 처음으로 설치를 하였다. 그리고 서울 혜정교와 종묘 앞에도 설치를 했다고 하는데, 이 집에 있는 해시계는 언제 제작된 것일까? 명문이 없어 제작 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아쉽다. 다만 이 집을 지었다는 조석우는 고종 때 판서를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해시계도 당시에 이집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랑채에 달아낸 누정이 압권

김영구 가옥의 사랑채 서쪽에는 누정이 붙어있다. 마루로 놓인 이 누정은 김영구 가옥의 모습을 뛰어나게 만든다. 누정은 밑을 잘 다듬은 돌로 주추를 하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다. 정자는 삼면이 모두 들창으로 되어있으며, ㅡ 자로 되어있는 사랑채에서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다.


그 누구도 집안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도록 구조가 되어있다. 대문을 열어놓아도 안을 들여다보기가 힘든 것도 이집의 특징이다. 대문 안은 바로 서쪽날개채의 벽이기 때문이다. 대문을 열어도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날개채의 벽이 바람을 막는 방풍의 역할도 하고 있다. 둘러볼수록 빠져드는 집이다.

김영구 가옥의 또 하나 특징은 바로 작은 사랑채다. 사랑채와 동편 날개채가 붙은 일각문 옆으로 사랑채와 같이 ㅡ 자로 붙어있는 작은 사랑채. 이곳도 방과 마루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작은 사랑채도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사람들을 접대하기도 하고, 이곳에서 손들이 묵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이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은 사랑채도 일각문을 열어야 안으로 출입을 할 수가 있어, 결국 이집은 밖에서 외부인들이 안으로 들어가기는 쉽지가 않다.



행랑채 앞에 솟을대문이 있었다고 하는 여주 김영구 가옥. 그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또 안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밖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 열린 대문 안을 들여다보면 그 집 하나하나에 참으로 대단한 정성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고개 너머를 ‘잿말’이라고 한다. ‘잿말’이란 <고개마을>이라는 뜻이다. 잿말은 충주군 감미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음성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이수일, 병조참판을 지낸 정우명 등이 이 잿말 출신이다. 특히 효자를 배출한 마을이란 점에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이 상당한 곳이기도 하다. 효자 김대환은 부친이 심부전증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자, 20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장기를 이식해 부친을 회생시키기도 했다.


이완대장의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곳

이러한 잿말에 중요민속문화재 제141호인 김주태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김주태 가옥이 유명한 것은 이곳에서 이완대장이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꿈을 키웠다는 것이다. 이완(1602∼1674)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인조 2년인 1624년 무과에 급제한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경기도 수군절도사 등의 자리를 역임하였다.

이완대장은 48세인 1649년 효종이 북벌 정책을 계획할 때,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시작으로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완대장은 당시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신무기를 만들기도 했다.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자, 북벌 계획이 전면 중단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현종 때에는 수어사로 임명되었으며, 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사대부가의 위엄이 서린 사랑채

이완대장이 어린 시절 살았다는 김주태 가옥은 사대부가의 위엄을 그대로 지닌 고택이다. 김주태 가옥은 300여 년 전에 건립하였다고 하지만, 이완대장이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400년 가까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의 집이 현재의 김주태 가옥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안채는 19세기 중엽에, 사랑채는 상량문에 고종 광무 5년인 1901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김주태 가옥의 사랑채는 솟을대문을 지나 석축으로 2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 자로 사랑채를 앉혔다. 남향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지체 높은 사대부가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준다.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를 오르려면 계단을 올라 앞마당이 있고, 그 위에 축대를 올려 사랑채를 지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채는 솟을대문의 지붕과 같은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 사랑채를 마주하면 좌측으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는 앞에서는 벽으로 막혀 볼 수가 없다. 우측 끝에는 누마루를 한단 높여 누정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전면 모두 창호로 문을 냈으며, 뒤편에는 양편으로 작은 문을 만들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하인들이 묵을 수 있는 행랑방들이 줄을 지어있다. 굳이 사랑의 어르신을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지어진 집이라는 느낌이다.



 

대문채엔 난 쪽문의 비밀

김주태 가옥의 대문채에는 방이 없다. 대문의 양 편으로는 곳간을 드렸다. 그런데 이 대문을 자세히 보면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대문을 마주하고 우측을 보면 작은 문이 하나 있다. 쪽문이라고 하는 이 문을 열면, 천정이 낮은 곳으로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즉 대문을 열지 않고도, 이 문으로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만들었다.

이 문은 언제 사용하였을까? 혹 사랑채에서 바라보면 대문으로 드나들기가 버거운 하인들이 이문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굳이 번거롭게 대문을 열지 않고, 이문을 통해 출입을 하였을까? 그렇다고 하면 위에 처정을 두어 굳이 머리를 숙이지 않도록 했을 터인데. 고택을 답사하면서 나름대로 생긴 질문과 답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재미를 느껴보기도 한다.



철저히 통제가 된 안채

사랑채의 뒤편에 자리한 안채는 안 담장을 둘렀다. 그러나 사랑채를 지나 안채를 들어가려면 좌측으로 난 문과, 우측에 사랑채와 안채와 연결이 된 담장의 일각문을 통하지 않고는 안채를 들어갈 수가 없다. 안채의 담장에는 또 다시 중문이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곳을 통하지 않고 안채를 출입하기는 어렵다. 결국 철저하게 통제가 되어있는 형태이다.

김주태 가옥의 안채는 T 자 형태로 지어졌다. 이런 형태는 경기지방의 사대부 가옥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안 담장에 낸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ㄱ 자형으로 자리하고 좌측에는 광채가 있다. 안채는 앞마루를 높인 건넌방과 두 칸 대청, 그리고 사랑방이 있다. 꺾인 부분에도 방과 부엌이 달려있다. 장대석으로 놓은 기단 위에 안채를 지었는데,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안채 모습을 그대로 지켜냈다.



담장과 굴뚝의 멋스러움

김주태 가옥의 또 하나의 멋은 담장이다. 황토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담장의 문양, 수키와를 엎어놓고, 그 사이에 황토를 넣어 문양을 만들었다. 밑에는 돌을 다듬지도 않고, 그냥 황토와 섞어 쌓았다. 김주태 가옥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담장이다. 예전부터 이런 담장을 했는지, 아니면 최근 보수룰 하면서 이런 담장을 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담장 하나가 주는 재미는 상당하다.

또 하나의 멋을 찾으라 한다면 굴뚝이다. 기와와 백회를 이용해 조성한 굴뚝은 낮고 작다. 전체적인 집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거의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굴뚝은 중간에 네모난 작은 창을 내고, 위는 사각형의 낮은 피라미드처럼 만들었다. 이런 작은 것 하나까지도 주의 깊게 꾸민 집이다. 이러한 담장과 굴뚝이 있어,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멋스럽게 만들었다. 김주태 가옥만이 갖고 있는 공간 구성은 그래서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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