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번지에는 사적 제217호인 '당성(唐城)'이 자리하고 있다. 이 당성이 소재하고 있는 남양 지역은,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이라 불린 중국과의 교통 요지였다.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하여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삼은 중요한 곳이었다.

 

424(), 채인석 화성시장과의 인터뷰를 마친 후, 당성으로 올랐다. 당성은 옛 명칭으로 당항성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름 그대로 당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곳이다. 4월인데도 날이 덥다. 성벽 위로 걷는데, 숨이 가쁘다. 그도 그럴 것이 오후에 나선 답사 길을 재촉하느라,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삼국이 번갈아 차지했던 교통의 요지

 

당성은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당성은 동문과 남문, 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성은 현재 복원 중이다. 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니 세 곳 정도로 나누어서 복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당성은 화성 남양반도의 서신, 송산, 마도면의 3개면이 교차되는 중심부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이용하여 석루를 돌려 축성을 하였다. 전장이 1.148m 정도가 되는 이 당성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불렀다.

 

후일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했다.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당성은 그 쌓은 시기를 달리하는 3중의 성벽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이 당성의 성벽은 테뫼식으로 쌓은 토축 산성이었다, 그 길이는 336m이다.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복원을 마친 곳 외에 드문드문 옛 성의 흔적들이 잡풀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인다.

 

망해루터와 건물지, 우물터 등이 남아있어

 

얼마를 돌아보니 지대가 높은 곳에 돌이 쌓여있고, 뒤편으로는 넓은 터가 보인다. 아마도 건물이 들어있던 곳 같다. 앞에는 '망해루 터'라는 석비가 있다. 이곳에 망해루라는 누각이 서 있었다는 것이다. 망해루는 목은 이색이 지은 남양부 망해루기에 보면, 고려말 남양부사 정을경이 고을의 치소에 외관을 웅장하게 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직은 복원이 되지 않은 곳에 문지인 듯한 곳이 보인다. 성을 한 바퀴 돌아 밑으로 내려오니, 우물터가 보인다. 이 우물터는 당성 안에 식수를 공급한 곳으로 추정한다. 지름이 50cm 정도에 깊이는 1m 정도로 비교적 작은 우물이다. 우물은 원형으로 땅을 판 후, 주변에 돌을 쌓아 올렸다.

 

 

당항성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원효

 

원효(617-686)대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이었다.

 

원효대사의 행적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당으로의 유학을 시도했던 원효대사가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대사는 45세에 두 번째로 의상대사와 함께 이번에는 해로로 해서 당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항성 아래에 도착을 하였다. 당항성 아래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원효대사는 거기서 깨들음을 얻는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며 다시 서라벌로 발길을 돌렸다. 원효대사의 이 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진,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채인석 화성시장 대담

 

- 과거 당성의 무역항으로서의 역할과 역사적 가치는 무엇인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 당성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당항성으로 추정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 신라가 중국과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특산물을 수출하던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헌 자료의 부족 등으로 그 동안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간 2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석축 성벽, 토석혼축 성벽과 망해루지 및 다각형건물지 등의 내부 건물지가 확인됐습니다. 특히, 산성 내부의 시설들은 군사적행정적 건물들뿐만 아니라 원형(다각형)의 건물지를 통해 당시 당성이 의례적 기능을 하고 있었던 국가적으로 핵심적인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성이 원료 대사의 대오각성의 현장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661, 원효와 의상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중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고 그 날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진리를 깨닫고 발걸음을 돌렸다는 이야기, 즉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의 큰 깨달음을 얻은 현장이 당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입니다. 이렇듯, 당성은 문화재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우리 53만 화성시민은 물론이고 전 국민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중요한 정신 문화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 화성시의 당성 복원을 위해 그간의 노력과 향후 계획은?

우리 화성시는 그간 2차례(1998, 2000)의 발굴조사를 실시했으며, 639m의 성곽을 복원했으며, 또한, 당성을 종합적으로 정비하고자 지난해 10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127일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화성시 주최,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당성의 황해연안교류에서의 역할(당성의 역사지리적 가치)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이 세미나를 통해 당성의 황해 교통로,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의 당성의 역사적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을 통해 우리시는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당성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동안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당성과 남양지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졌으며, 앞으로 당성 정비에 있어 초석으로 작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시는 당성 종합정비계획을 통해 당성의 성벽과 내부시설물 정비는 물론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 당성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대해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당성복원과 관련한 세부사업으로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해 주차장, 진입도로 등 부대시설 조성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당성 주변 토지 매입 시작하고, 2014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시작해 2017년까지 연차적으로 착수하려 합니다. 또한, 2014년부터 성곽, 건물지 복원과 외곽지역 종합정비를 위해 성내 시설물 보수 공사와 당성의 성벽과 내부 시설물, 성벽(석축), 망해루지 등의 복원을 연차적으로 착수할 계획입니다.

 

또한, 안내시설, 편의시설, 안전 및 방제시설을 설치하고 탐방로 정비, 홍보관 건립, 전시공간 등을 확보하고, 스토리텔링을 이용한 교육 및 관광 활용 방안도 마련해 당성의 역사 문화적 인식을 확대하고 타 지역의 문화재와 차별화된 전략을 통해 당성의 고유한 특성을 발현시킬 계획입니다. 특히, 당성 정비가 일정한 성과를 나타내는 2024년 이후에는 역사길 조성, 교육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역사와 생태환경 교육 등 생동감 있는 현장을 전달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를 개발할 계획입니다.

 

- 역사적인 관점에서 과거 당성의 역할을 현재의 화성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중국을 비롯한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라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통로의 역할을 했던 곳이 당성입니다. 오늘날로 보면 부산항이나, 인천항의 역할과도 같은 곳으로 무역은 물론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리 화성시는 대한민국 최고의 역동적인 도시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시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세계로 거침없이 나가려는 도전과 개척정신의 상징이었던 당성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화성시와 화성시민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성이 상징하는 도전과 개척정신은 미래를 향해 큰 꿈을 갖고 달려 나가는 우리 시민들에게, 용기를 주는 어디에도 없는 정신문화재가 될 것입니다.

 

- 긴 시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를 만나다가 보면, 목이 잘린 석불들이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석불의 목이 잘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조 유생들에 의한 훼파와 더불어, 일제의 석불의 목 훼손이 극성을 떨었다. 근자에 들어서는 종교적인 이질감에 의한 훼손도 합해져, 여기저기 목이 잘린 석불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자리한 원주시립박물관 뒤편 길가에 보면 석불좌상 두 기가 나란히 있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일제 때 남산 추월대로 이전하였다가, 1962년 5월에 강원감영과 포정루 쪽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그 후 현재의 위치인 시립박물관 뒤편으로 옮겼다. 이 두 기의 불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져 새로 보수를 하였다. 새로 보수를 한 머리 부분이 조금은 걸맞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요즈음 말로하면 두 기의 목이 잘린 석불의 위에 새로 맞춰 올린 두상은 훈남에 속한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현재 남아 있는 몸체와 대좌만으로도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고려초기의 뛰어난 석불좌상

 

두 기의 석불좌상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단정한 체구의 세련된 형태, 법의는 통견에 평행 옷주름 등이 신라 말의 석불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서, 적어도 고려 초기의 수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얼굴 부분이 사라져서 그 뛰어난 모습의 전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위와 같은 모습으로 조각이 된 석불좌상. 이 석불도 머리가 잘려나간 것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

 

수인은 깨어진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상태로 보아, 지권인임이 분명하다. 두 기의 석불좌상은 같은 지권인을 하고 있는데, 두 기가 다 비로자나불 석불좌상으로 추정된다. 손이 깨어진 것조차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법의는 양 어깨로 흘러내려 주름이 잡혀있으며, 가슴에는 내의에 나비매듭을 엮었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여 오른발을 젖혀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이다. 법의가 무릎까지 덮고 있는데, 주름을 넣어 아름답게 표현을 하였다. 머리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두 기의 석불좌상이 앉아있는 대좌 역시 뛰어나다.

 

수인은 지권인을 한 모습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다

 

뛰어난 고려시대의 대좌를 보다.

 

이 두기의 석불좌상을 올려놓은 대좌는 두 기가 모두 사단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정면을 보고 우측에 있는 석불좌상의 대좌는 하단에는 팔각으로 조형을 해,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동물들을 부조로 조각하였다. 이단은 팔각으로 조성을 하고 조각을 했으며, 삼단 역시 팔각으로 해 천인상을 조각하였다.

 

대좌는 모두 4단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맨 위 사단은 원형으로 조성하고 꽃과 받침을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방의 장인이 아닌 중앙에서 활동하는 있는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좌측에 있는 석불좌상 역시 같은 형태로 대좌를 조성했는데, 이단에는 가지를 문양으로 넣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곳도 천인상을 새겼는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맨 위단에는 꽃을 새기고 넓은 잎을 새겨 넣은 것이 다르다.

 

 

우측 석불좌상의 대좌에 있는 천인상(위)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아래)

 

이런 형태로 닮은꼴로 조성이 된 두 기의 석불좌상이, 삼존불 좌상 가운데 양편에 있는 협시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고려 초기의 석불좌상. 비록 머리가 없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남은 부분만으로도 훌륭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이 두기의 석불좌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일괄 지정이 되어 있다.

성경 고린도 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라는 구절이 있다. 이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의 정의처럼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이 글은 세상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 째는 종교적인 사랑인 ‘아가페’이고, 둘째는 광의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필리아’이다. 필리아는 이성, 삶, 자연 등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세 번째 사랑은 ‘에로스’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으로. 에로스는 이성간의 사랑을 뜻한다. 네 번째는 ‘스토르게’로 혈육의 사랑이다.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고. 세상을 좀 보시지.

사람들은 곧잘 ‘사랑은 영원하다’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과연 사랑은 영원한 것인지 묻고 싶다. 물론 이 네 가지의 사랑 중에 스토르게는 영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속을 뒤집어 보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식을 추행하고, 부모를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하듯 내다 버리고 있는데, 그것이 영원한 것일 수는 없다.

이성간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원한 것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같아야 한다. 그러나 사랑이 어찌 그럴까? 사랑은 물이 흐르듯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랑을 종교에서는 영원하다고 표현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세상이 변해가면서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사랑은 보편적이라야 한다.

사랑은 보편적이라야 한다. 적어도 우리가 사랑의 대한 정의를 내리려면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리 해야 한다. 적어도 2500년 전 석가모니불의 시대나, 2000년 전 예수의 시대에는 이런 보편적인 사랑이 통했을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에 이런 보편적인 사랑이 과연 통하는 것일까?

사랑은 흐른다고 한다. 물이 흐르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길이 가는 데로 흐른다. 그 길이라는 것이 늘 같은 곳이 아니다. 시간이 가면 물길은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을 흐르는 물에 비유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즈음 사랑을 보면, 이건 물도 아니다. 마구잡이식으로 파헤친 무엇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억지로 만드는 것 말이다.

결국 보편적인 사랑이 사라졌다는 것은, 사랑의 정의가 사라졌다는 뜻일 게다. 위 네 가지 사랑 중 어떤 것이라도 좋다. 그 중 한 가지를 비유로 들어도 좋다. 과연 이 시대에 그런 사랑이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세상에는 두 가지 인간들이 공존한다.

이제는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한계에 다달았다. 예전처럼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부모, 부모를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내던 자식도 볼 수가 없다. 성인들이 베풀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조차 개 같은 짓을 하기가 일쑤인 세상이다. 과연 이 세상에 사랑의 정의는 존재하는지 의문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인간이 공존한다. 하나는 그래도 사랑을 지키기 위해 무단히 노력하는 ‘사람’이고, 하나는 사람의 탈을 쓴 ‘개만도 못한 인간’이다. 이렇게 두 가지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 수위가 달라졌고,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정말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오늘 곰곰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느 사람이 정말 인간답지 못한 짓을 하다가, 배우자에게 걸려 길거리로 내쫓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세상은 이제 사랑태령도 그만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이왕 쾌락을 추구하려면 표시 안나게 잘했어야지. 하긴 내놓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세상 참. 이런 사람들도 자신들은 '사랑'이라고 표현을 한단다. 그래도 영원하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종교행위 자체를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종교를 갖던지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종교행위로 인해 남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적 제414호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소재한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 및 태실을 말한다. 태실이란 아이가 태어난 뒤 나오는 탯줄을 보관하는 곳을 말한다. 이 일대는 사적지로 조성을 한 후 한참 주변 정비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가야사람 김유신은 왜 진천 땅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내막을 알면, 이해가 간다.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라는 계양리에 세워진 유허비

김유신의 탄생지 상계리 계양마을

김유신이 태어난 곳은 만노군(현 진천군) 태수로 부임한, 김유신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집무를 보던 상계리 계양마을이다. 김유신은 진평왕 17년인 595년에 이곳에서 태어나 나이 15세가 되던 진평왕 31년인 609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의 군주가 되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유신은 선덕여왕 때는 상장군이 되고, 무열왕 7년인 660년에는 상대등이 되어 당군과 연합, 백제를 멸망시켰다. 8년 뒤인 668년에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태대각간이 되었다. 나이가 먹은 김유신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되찾은 후, 673년 음력 7월에 병이 악화되어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신이 죽은 후 한참 후인 835년에 김유신은 ‘흥무대왕’으로 추존이 되었다.



사적 안에서 종교집단의 부흥회가 웬 말.

지금의 계양마을 입구인 장군터라 불리는 태수 관저가 있던 곳에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이 일대에는 장군의 역사가 많이 남아있다. 김유신과 관계가 있는 태실과 투구바위 등을 돌아보기 위해 찾아갔다. 그런데 무슨 약장수를 방불케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한창이다. 시끄럽게 스피커 볼륨을 높여 놓고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있다. 어림잡아 수백 명은 되는 듯하다.

유허비를 돌아본 후 전각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스피커에서는 연신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연사의 뒤편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 ○○ 기도회>인가하는 글을 쓰여 있다. 순간 참 어이가 없다. 모처럼 맞는 휴일에 자녀들과 함께 사적지를 찾은 사람들도,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하고 돌아선다.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인 옛 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

그렇게 기도회를 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일까?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을 보니 ○○교회, △△교회 라는 글이 보인다. 여러 곳의 교회에서 장소가 넓은 이곳을 택해 합동기도회를 하는가보다. 그런데 어떻게 사적지 안에서 이런 종교행위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음 날 진천군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혹 종교집회를 허락해 준 사실이 있는가를. 전혀 모르는 일이란다. 그렇게 사적지에서 시끄럽게 집회를 하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사적지. 그것도 공휴일에 이런 대책 없는 행동을 한 종교인들을, 과연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사적지 안에서 종교적인 집회를 하는 모습과 줄지어 선 차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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