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574에 소재한 용흥사. 용구산에 자리한 용흥사는 서기 384년인 백제 침류왕 1년에 인도승 마라타 존자가 초암을 지어, 5차에 걸쳐 중창과 복원은 한 사찰이다. 용흥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가 된 것을, 일옥 진묵대사의 발원으로 응중, 쌍인, 혜증대사가 20여 년 간의 대 역사로 48동을 중창하였다.

 

용흥사는 영조의 생모인 최숙빈이 이곳에서 기도를 하여 영조가 탄생하였다고도 한다. 영조가 즉위를 한 후에는 일체의 세금을 감해주고, 원래의 이름인 몽성사를 임금과 나라를 위한다는 뜻인 용흥사로 사명을 바꾸었다고 한다.

 

 

용흥사는 한일합방 직전 48동이 거의 전소되다시피 한 것을, 모정선사가 1930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11동을 복원하였으나, 19501229일 불행하게도 아군에 의해 완전히 전소가 되었다.

 

외로움을 느끼는 절 용흥사

 

순창, 담양군의 문화재 답사를 하던 날 용흥사에 들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니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아마도 한때는 이 일대에도 많은 전각들이 서 있었을 것이다. 계단으로 오르니 전각들이 보인다. 대웅전을 향하다가 좌측을 보니 작은 전각 하나가 서 있다.

 

 

한 평 남짓하게 지어진 산신각이다. 옆에는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산신각에 드는 햇볕을 가리고 있다. 저리도 혼자 서 있는 산신각을 동무하느라, 그렇게 비바람을 막아주고 있는가보다. 왜 이 절은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일까? 과거 그 화려했던 호남제일의 가람이었다는 곳이다. 그런데 몇 동 안 되는 전각들이 듬성듬성 자리했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인지.

 

용뉴에는 힘찬 네 마리의 용이

 

대웅전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동종. 보물 제1555호로 지정이 된 이 종은, ‘순치원년명 동종으로 불린다. 그것은 이 종을 만든 연대가 순치 원년인 1644년이기 때문이다. 높이가 102인 이 종은 조선시대 주종장 김용암이 주가 되어, 인조 22년인 1644년에 주성한 종이라고 명문이 새겨져 있다.

 

 

종은 규모도 비교적 클 뿐만 아니라, 비례감과 조형성이 뛰어나다. 종을 붙들고 있는 용뉴는 일반적인 범종들이 쌍룡으로 조형을 하는데 비해, 활력이 넘치는 네 마리의 용을 채용하였으며 음관을 생략한 특이함을 보이고 있다. 종신에 시문된 각종 문양의 표현도 범상치가 않다. 종신에는 인동당초문, 보살상 등이 새겨져 있다.

 

범종은 중앙 윗부분에 4개의 유곽이 있으며, 유곽 내에는 각각 9개의 유두를 표출하였다. 유곽사이로는 전후좌우로 두광을 선각한 보살상을 정교하게 새겼으며, 상대에는 두 줄의 가로줄에 범자를 양각하였다. 그 중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라 명문 한 글씨가 보인다.

 

 

종의 밑면에는 굵은 두 줄의 가로줄을 두고, 그 안에 두 마리의 용을 양각하였다. 뛰어난 용의 모습은 3개의 발톱과 입에서 불을 내뿜는 불꽃무늬를 조성하였다. 몸체 중앙부에는 형의 4각 선곽을 조식하고 그 안에 순치원년 사월일 창평현 용구산 용구사 신주종기(順治元年 四月日 昌平縣 龍龜山 龍龜寺 新鑄鐘記)……라는 명문이 표기되어 있다.

 

하나의 종을 만들면서도 이렇게 정성을 다한 선인들. 그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우리 것에 대해 지독히도 무관심한 사람들. 아마도 이곳 용흥사가 이렇게 외롭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러한 선인들의 예술혼을 미처 깨닫지 못한 후손에 대한 서운함인가 보다. 뒤돌아 나오는 발길이 무거운 것도, 나 역시 그런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죄스런 마음이 들어서이다.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11에 자리하고 있는 청계사. 2012년 첫 답사를 청계사로 정하고, 오후에 길을 나섰다. 청계사에는 조선조 때의 유명한 종장인 사인비구가 주조한 사인비구 동종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인비구의 종은 보물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청계사 동종은 보물 제11-7호로 지정이 되었다.

 

경기도 문화재재료 제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청계사는,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창건이 되어 고려 충렬왕 10년인 1284년에 크게 중창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조 연산군이 도성 안에 절을 폐쇄하였을 때는 봉은사를 대신하여 선종의 본산으로도 정해졌던 절이다. 청계사에 소재하고 있는 동종에 보면, 현재의 청계산은 숙종조 당시에는 ‘청룡산’으로 불렀다고 적고있다.

 

 

주종장 사인비구의 독특한 동종

 

사인비구는 18세기의 뛰어난 승려이자 종을 만드는 장인이다. 사인비구는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자신만의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보물 제11호로 지정된 8구의 사인비구의 범종은, 각기 독특한 형태로 제작이 되어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청계사 동종도 그 중의 하나이다.

 

사인비구의 동동 중에서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은, 보물 제11-1호인 포항 보경사 서운암의 동종이다. 서운암 동종은 종신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불경의 내용을 새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보물 제11-2호 문경 김룡사 동종과 제11-3호 홍천 수타사 동종은,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딴 종과는 다르게 독특하게 표현했다.

 

 

전통적인 신라 범종 형태로는, 보물 제11-4호인 안성 청룡사동종과, 제11-8호로 지정된 강화 동종이 있다. 보물 제11-6호로 지정이 된 양산 통도사 동종은 팔괘를 문양으로 새겨 넣어 딴 사인비구의 종과는 다른 모습이다. 용뉴 부분에 두 마리 용을 조각한 보물 제11-5호인 서울 화계사 동종과, 보물 제11-7호인 의왕 청계사 동종이 있다.

 

사당패의 내력을 적은 시인비구 동종

 

사인비구 동종의 면문에는 사당패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조선조 후기에 사찰의 경제적인 면에 유랑집단인 사당패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랑집단은 조선조 말에는 ‘절걸립’이라고 하여, 절에서 발행한 신표를 갖고 걸립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청계사의 동종을 주조할 당시에도 이러한 사당패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청계사 동종은 청계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 때 서울 봉은사로 이전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 청계사 동종은 사인비구가 명간, 계일, 여석, 수강, 귀선, 임선 등과 함께 60세 이후에 제작한 종이라고 명문에 기록하고 있다. 전통적인 특징을 벗어난 이 종은 사인비구의 또 다른 주종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쌍룡으로 조성한 용뉴

 

청계사 동종의 특징은 종을 매단 용뉴를 쌍룡으로 조성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쌍룡으로 용뉴를 조성하는 것은 중국 종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개는 용뉴에 음통을 만들어 함께 붙이지만, 청계사 동종은 음통을 두지 않고 공기구멍을 뚫어 소리를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종신에는 상대와 하대에 굵게 두 줄로 띠 장식을 둘렀는데, 상대에는 당초문으로 하였으며 하대에는 보상화문을 둘렀다. 상대 밑으로는 유곽을 내었으며 9개의 꽃에는 중앙에 유두가 돌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유곽의 사이에는 보살상을 새겨 넣었다. 유곽의 아래에는 시주자들의 이름 등을 명문으로 적어 넣었다.

 

사인비구의 다양한 주종형태를 볼 수 있는 동종. 그 중에서도 청계사 동종은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동종이다. 그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들을 수 없음이 아쉽기도 하지만, 종의 아랫부분에 깨진 듯한 흔적이 보인다. 오랜 세월 인간의 억압된 영혼을 번뇌에서 구하기 위해 울렸을 청계사 동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99칸 고래등 같은 집들이 있다. 전북 정읍에 있는 김동수 가옥이 99칸이었으며, 경주 최부자집도 99칸이라고 했다. 그런데 충남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갈산중학교 인근에 자리한 충남 민속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전용일 가옥은, 그보다 반 칸을 더 합한 99칸 반이라는 것이다.

현재 전용일 가옥에서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은, 예전에는 사랑채를 지나 안채를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었다고 한다. 99칸 반의 대저택. 전용일 가옥의 주인은 왜 이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지은 것일까?


99칸 반의 저택, 지방 토호의 상징인가?

99칸 반의 집이라니, 그 규모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아마 이 지역의 부농의 집이었을 목조기와집은 지금은 안채 28칸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800년대 중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용일 가옥의 안채는 바람벽을 둔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청과 온돌방을 두고, 좌우의 날개채를 달아 남향을 향한 집이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보면 ㄷ 자형을 띤 집의 구조지만, 사랑채가 떨어져 있어 튼 ㅁ 자형이다, 중문을 달린 중문채와 안채의 날개채 사이에는 쪽문을 낸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가옥구조로 축조가 되어있다.




예전에는 100칸이라는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 칸을 뺀 99칸의 집을 짓는 것이 지방의 토호들이나 세도가들이 집을 짓는 방법이었다. 일설에는 100칸의 집은 궁에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대부가나 토호들이 100칸을 지으면 바로 모반이 된다고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99칸에서 전용일 가옥은 그보다 반 칸을 더 달아낸 99칸 반의 집이었다고 한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 후원을 보아도 이 집의 세를 알만하다. 현재는 안채를 중심으로 네모난 대지위에 높은 담장을 쌓고, 그 안에 안채만이 남아있지만 모든 것 하나하나가 전용일 가옥의 가세를 알기에 충분하다.



부재 등이 돋보이는 전용일 가옥

전용일 가옥의 사랑채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주변 건물에는 팔각 돌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석조 부재 등이 아직도 인근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당시에 돌을 깎아 기둥을 세운 건축물을 지었다고 하니, 아마도 지방의 사대부가들도 이런 집을 짓기가 어려웠을 것만 같다.

집안 곳곳을 살펴보면 이 집이 부재 사용법 하나서부터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쪽문의 문턱 하나에도 세심한 배려를 한 전용일 가옥. 조선 후기 건축 기술과 세련된 솜씨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전용일 가옥은 19세기 중반에 세워진 대표적인 양반집이다.



홍성의 대부호 양반집으로 알려진 전용일 가옥. 영원한 세도는 없다는 옛 말이 실감이 난다. 한 때는 99칸 반의 대부호답게, 그리고 지방의 세력가답게 인근 근동에서 이 집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고 했다는 한다. 현재 남아있는 안채의 규모나 그 사용한 부재들을 보면, 이 집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99칸 반의 영화로움은 사라졌어도, 그 자취는 집안 곳곳에 남아있다.


장고춤(杖鼓舞)은 타악기의 하나인 장고를 비스듬히 어깨에다 둘러메고 여러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키며 추는 춤이다. 원래는 풍물놀이 등 개인놀이로서, 혼자 또는 두 사람(때에 따라 많을 수도 있음)이 추는 것인데, 요즈음에는 새로운 형태로 안무하여, 농악이 아닌 완전한 무용으로 발전, 독특하고 장쾌한 멋을 풍기고 있다.(위키백과사전)

위의 장고춤에 대한 설명은 인터넷에서 ‘장고춤’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설명이다. 지금 우리는 장고춤을 ‘풍물에서 파생한 춤’, 혹은 ‘신무용’ 등으로 정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장고춤의 역사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무용화한 장고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미술과 고분 벽화 등에서 나타나는 장고춤에 대한 모습으로 장고춤에 대한 변화를 추론해 본다.

전북 완주군 송광사 대웅전 벽에 그려진 비천장고무. 조선조에 그려진 것이다.

불교미술에 나타난 장고춤의 변화

불교미술에서 장고를 이용한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지가 않다. 석탑이나 부도탑 등의 비천인이 연주를 하는 모습에서,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을 쉽게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비천인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이다. 연기조사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는 화엄사.

그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비천인상 중에,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이 있다. 아마 이 때는 장고가 춤이 아닌 단순한 악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뒤에 나타난 보물 제85호인 강릉 굴산사지 승탑에도, 연화대 위에 앉아 장고를 치는 비천인의 모습이 보인다.


국보인 구례 화엄사에 소재한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장고비천인

이 굴산사지 승탑은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중간받침돌에는 8개의 기둥을 세워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비천인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새기고 있다. 조각되어 있는 상은 8구 모두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악기는 장고를 비롯해 훈, 동발, 비파, 소, 생황, 공후, 적 등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소재한 보물 제294호 승안사지 삼층석탑에도 장고를 치고 있는 비천인상이 있다. 이 승안사지 삼층석탑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한 탑이다. 위층 기단에 새겨진 이 비천인상을 보면 앞서 열거한 비천인상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장고를 치는 비천인이 앉은 형태였는데 비해, 승안사지 삼층석탑의 장고를 치는 비천인은 무릎을 꿇고 있다. 이때는 단순히 연주가 아닌, 일종의 변형된형태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굴산사지 승탑의 장고비천상과 승안사지 석탑의 장고비천인상


고려 고분 벽화에서 장고춤의 형태가 보여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 있는 사적 제239호 둔마리 고분은 고려시대의 고분이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고분에는, 동서로 석실 두 개가 구분되어 있다. 이 고분 안에 동실의 벽면에는 천녀들이 구름위에서 연주하며 춤을 추는 ‘주악무도천녀도’가 그려져 있다. 당시의 현실적인 종교적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 천녀도 중에는 장고춤을 추는 그림이 있다.


이 둔마리 고분의 주악인물상의 악기 등은 고려시대에 사용하던 악기들이며, 주악도상은 고대주악비천상과 맥락을 같이한다. 후대에 후불 및 무속화의 인물표현 등과 악기의 소재 등이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동벽 남단에 그려진 주악무도천녀도의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장고춤을 추고 있다.

이 장고춤을 추는 인물을 설명하고 있는 형태를 보면, 지금의 장고춤을 추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인물은 빗어 올린 얹은머리에 둥근 테 모양의 관을 쓰고, 그 옆에 깃 같은 장식꼬리가 뻗어 날리고 있다. 상의는 둥근 깃에 소매 끝을 팔목에서 잘록하게 묶었다. 바지는 전반적으로는 헐렁하지만 발목도 묶었다.」


둔마리 고분의 벽화에는 장고춤을 추는 비천주악도가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인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종성된 고분이다.

아마도 격한 장고춤을 추기에 편하도
록 하였을 것이다. 「허리에는 띠가 감겨있는데 그 한쪽 끝이 왼쪽 다리위로 드리워져 있다. 상반신은 가느다란 끈으로 장고를 목에 감아 앞으로 늘어뜨리고, 왼팔은 높이 올리고 오른팔은 장고를 치면서 구름 위에서 춤을 추는 형태를 하고 있다. 신발은 형태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끝이 뾰죽하다」

벽화에 나타난 장고춤

이렇게 석탑이나 부도탑, 혹은 고분의 벽화 등에서 보이는 장고춤을 추는 비천인상을 보면, 이미 장고춤은 고려시대에 완전한 춤의 형태로 전승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장고춤을 실질적으로 묘사한 사찰의 벽화가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에 그려져 있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송광사의 대웅전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인 1857년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대웅전 상단 벽에 보면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비천인상에는 무당춤을 비롯해, 장고춤, 북춤, 승무, 바라춤 등의 그림이 보인다. 이 모든 춤들은 당시에 추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들은 단순히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세속화된 풍물을 그린다는 점으로 볼 때, 고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난 장고춤은 조선조에 들어서 상당히 격화되고 빠른 동작을 필요로 하는 경쾌한 춤으로 변화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을 보면 작은 소장고를 이용해 춤을 추면서 군관모자와 같은 관을 썼다. 화려한 장식에 힘이 있는 모습의 장고춤을 역동적으로 추고 있다.

이런 불교미술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장고비천인상에서 볼 때 장고춤은 농악놀이에서 파생한 춤이 아닌, 정형화된 장고를 이용해 추는 독자적으로 발생한 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신무용이 아닌 고려 때부터 전해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전통춤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인비구는 종을 만드는 장인인 승려이다.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는, 현재 전해지는 8개의 종이 모두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장이다. 사인비구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인물로,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사인비구의 종은 모두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크기는 작지만 그의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포항 보경사의 서운암 동종’은 종 몸통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부처님 말씀을 새겨 둔 것이 특징이며, ‘양산 통도사 동종’은 8괘를 문양으로 새기고 유곽 안에 보통 9개씩의 유두를 새기나 단 한 개만을 중앙에 새겨 넣었다.


모든 종이 각각 특성을 지니고 있는 사인비구 동종

가장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안성 청룡사 동종’과, 조선의 종 모습을 보여주는 ‘강화 동종’.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에 두 마리 용을 조각한 ‘서울 화계사동종’과 ‘의왕 청계산동종’,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그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선보이고 있는 ‘문경 김룡사 동종’과 ‘홍천 수타산 동종’.

사인비구의 동종은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8구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아마도 경기도와 경상도에 거주하는 기간이 길었다는 것은, 그 곳에서 종을 만드는 시간만큼이 아니었을까? 사인비구의 종은 모든 종들은 각기 독창성이 엿보이는 작품들로 종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중앙의 유두만 돌출이 된 동종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경내 종각에 걸린 양산 통도사 동종은, 현재 보물 제11-6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1686년에 사인비구가 조성한 종이다. 이렇게 연대가 확실한 것은 동종의 명문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동종은 나름대로 독특한 멋을 풍기고 있다. 통도사 동종은 맨 위에 종을 붙들고 있는 용뉴가 있고, 몸통의 상대와 하대, 그리고 유곽 등을 두루 갖춘 전통적인 범종이다.

50년간 경기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활동을 한 사인비구, 아마도 종을 만드는 장인으로 더 유명한 사인비구는 경기도와 경상도의 절에 묵으면서 종을 만들고는 다른 곳으로 떠난 것은 아니었을까? 하기에 그의 주종은 모두 경기도와 경상도에 집약되어 있다.




사인비구가 만든 통동사의 동종은 상대에는 위아래 두 줄로 범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유곽을 새겨놓고, 그 안에 가로 세로 각각 세 줄씩 별 모양의 화문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중앙에 하나만 돌출이 되게 하였다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중앙의 그림 하나만 유두를 돌출 시킨 것일까?

팔괘를 그려 낸 통도사 동종

몸통에 유곽이 크게 조성되어 그 가운데 있는 보살상은 작게 표현된 통도사 동종. 사인비구는 이 동종을 만들면서 왜 밑면에 팔괘를 돌려 그려 넣은 것일까? 아마도 각 사찰에 남아있는 동종들의 모습이 특별한 것도, 그 사찰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인비구의 동종을 돌아보면서 내심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종의 몸통 중앙에는 당시 종을 만든 내력과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인비구의 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듯, 그렇게 멀리까지 부처의 세계가 퍼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보물 제11호로 지정이 된 사인비구의 동종을 모두 다 돌아보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남는 것은, 왜 각각 특이한 종을 제작했을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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