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3호인 신리너와집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너와집이다. 이곳의 너와집은 강문봉, 김진호, 윤영원씨 등이 소유하던 집들이 있으나, 신리의 너와집은 '김진호 가옥'이란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너와집이란 굵은 소나무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지붕을 얹고, 용마름 부분에는 굴참나무 껍질을 넓게 벗겨 올린 집이다. 너와집의 지붕 위에는 나무를 고정시키는 통나무를 가로 지르며, 돌들을 함께 올려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았다.

 

지붕은 산간지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소나무와 전나무를 길이 40~70cm, 80~110cm 정도로 자르고 넓이는 30cm, 두께는 3~5cm 정도로 나무결에 따라 잘라, 기와처럼 지붕 아래쪽부터 놓아 올라간다.

 

 

몇 채 남지 않은 너와집

 

1970년 대 초까지만 해도 너와집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개조되어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집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김진호의 너와집은 150여 년 전에 지어진 집으로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집 역시 지붕에 까치구멍을 뚫었다. 전체적으로는 ㅁ 자 형태로 집을 구성하였는데, 정면과 측면 모두 세 칸으로 꾸며졌다.

 

방의 부분만 흙담으로 두르고 나머지는 판자벽으로 둘렀다. 밖으로는 대문 곁 좌측에 나무판자로 담을 두른 변소를 두었다. 변소는 양편에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밑으로는 공간을 내어 놓았다

 

 

 

 

 

대문을 보고 우측으로는 판자벽 상단에 까치구멍을 내어 놓았다. 판자 한 장을 잘라내어 낸 까치구멍과 두 곳의 구멍이 나 있다. 우측으로 돌면 작은 문이 있고, 방문이 나 있다. 그리고 벽의 뒤편으로는 작은 창문이 나 있어 환기를 시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집 뒤로 돌아가면 두 개의 방에 연결한 판자굴뚝이 서 있다.

 

대문 좌측으로 돌면 판자벽으로 막았는데, 안쪽은 외양간이다. 외양간 벽 아래쪽에는 작은 널판 문을 내어 놓았다. 방문은 작게 만들었는데, 앞으로는 길게 툇마루를 놓았다. 사면이 모두 막혀 있어 문을 통해서만 안으로 출입이 가능하다, 아마 이렇게 막혀진 네모난 공간 안에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너와집이라는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

 

 

 

 

 

 

 

네모난 공간 안에서 주거생활을 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앞면 왼쪽에 외양간, 오른쪽에 부엌을 놓았다. 대문을 들어서 안쪽 트인 공간 중심에 마루가 있는데 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흙바닥인 봉당을 두고 왼쪽이 사랑방, 오른쪽 부엌과 접해 있는 방을 안방으로 배치하였다. 그리고 샛방과 도장방 등을 두었다. 외양간과 부엌 사이의 공간은 집안 일을 할 수 있도록 꾸몄으며, 한쪽에 불씨를 보관하던 시설(화터)이 있다.

 

 

 

 

 

사랑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고, 그 앞에 판자벽에도 문을 내어 열 수 있도록 하였다. 대청에서 부엌으로 나오는 벽에 구멍을 내어 놓았는데, 이 구멍으로 음식을 가까이 나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는 이곳에 등잔 등을 놓아 부엌과 안의 주거 공간에 함께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사용을 했을 수도 있다.

 

 

 

 

 

몇 채 남아있지 않은 너와집. 산간생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단지 문화재로 지정을 해놓고 문을 잠가놓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안심을 하기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너와집의 생활모습을 볼 수 있도록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에 자리한 소석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3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부농의 상징으로 멋을 자랑하는 소석고택은, 기와에 새겨진 명문을 확인한 결과 조선조 고종 22년인 1885년에 지어졌다. 소석고택의 건물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안채에 수직축을 맞추어 사랑채를 놓았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곳간채를 배정해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었다. 행랑채와 광채는 1920년경에 없어졌다고 한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넓은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사이에는 너른 안마당이 있어, 전체적으로 집안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소석고택을 찾은 날은 쌀쌀한 날씨였다. 옷깃을 여미고 찾아간 소석고택은, 초강천을 옆에 두고 너른 평지에 자리한다. 주변에는 초강초등학교가 있어 찾기에도 수월하다.

 

 

안채 다락방을 아궁이 위에 둔 까닭은?

 

소석고택의 안채는 'ㅡ' 자형으로 되어있다. 안채는 경기도 이남의 남부가옥에서 보이는 평면구성으로 안방, 윗방, 2칸 대청, 건넌방의 차례로 배열되었다. 그런데 이 안채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2칸 대청을 지난 건넌방의 다락이다. 이 다락은 밑에 불을 때는 아궁이를 두고 있다. 아궁이 위에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은 큰 창을 내었다.

 

이렇게 아궁이 위에 다락을 내는 까닭은 바로 습기를 제거하는 목적이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 그 온기가 올라 다락을 건조시키는 것이다. 창이 큰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안채는 대개 부녀자들이 기거를 하는 곳으로, 이 아궁이 위의 다락에 옷가지 등을 보관하면 늘 뽀송뽀송하다는 것.

 

 

 

 

 

집 하나를 지으면서도 세심한 곳까지 배려를 한 것이 바로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이자 실효성이다. 이러한 것을 점차 생활이 불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버리고 있는 우리들의 주거문화가 참담하기까지 하다.

 

H자형의 사랑채의 멋스러움

 

우리 고택 중 와가의 멋은 바로 지붕이다. 버선코로 비유되는 처마 끝은, 그야말로 멋스러움이다.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위로 치켜 올려진 것은 무한한 발전을 이끌어 낸다. 모든 일에 대한 희망에 견주기도 하는 이 처마 끝의 멋이야말로 한옥의 특징이다. 소석고택의 사랑채는 H자 형으로 구성이 되었다.

 

 

 

 

 

남편에는 돌출된 누마루를 놓았다. 삼면을 기둥만 세워 시원하게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누마루에 앉아 시를 짓기도 하고, 벗들과 어울려 술 한 잔에 시름을 덜어내기도 했을 것이다. 간단한 난간으로만 치장을 한 누마루는, 그대로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누마루와 반대편에 있는 서편의 방 옆에는 커다란 문을 달았다. 이 문의 용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여름철에는 문을 열어 초강천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겨울이면 문을 닫아 찬바람을 막아내는 구실을 했다. 기단으로 쌓은 돌 하나하나에서 소석고택이 부농의 상징임을 알 수 있도록 꾸몄다. 어느 곳 하나 빠짐이 없는 소석고택의 사랑채는 한옥의 멋을 그대로 살린 아름다움이다.

 

 

 

 

 

곳간은 둘, 지붕은 하나의 색다른 건축

 

소석고택에서 돋보이는 또 하나의 건축물은 바로 곳간채다. 안채와 사랑채가 와가로 지어진데 비해, 곳간채는 초가로 꾸며졌다. 그것이 소석고택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이 곳간채는 지붕이 하나인데 곳간부분은 둘로 나뉘어져 있다. 무슨 이유에서 이렇게 했을까?

 

서향으로 지어진 소석고택의 곳간채는 뒤주처럼 가로로 널판을 끼워 맞추고 있다. 이 곳간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각 칸마다 세로로 중인방을 넣고, 널판을 가로로 끼워 벽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곳간채는 바닥은 널마루로 깔고 천정 또한 널판자로 마감을 하였다. 이렇게 분리를 해 놓은 것은 한 곳은 곡간으로, 한 곳은 뒤주로 사용한 것은 아닌가 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르는 돌담과 측간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건물만큼 돌담을 쌓았다. 그것은 부녀자들이 기거하는 안채와 남정네들이 드나드는 사랑채를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서편 'ㄱ' 자로 꺾인 부분에 측간을 지었다. 측간은 초가로 지어졌으며 널판자로 벽을 만들었다. 1칸으로 지어진 이 측간을 사랑채 뒤에 두고, 담장을 막은 것도 소석고택이 그저 건축물을 놓은 것이 아니라, 세세한 것까지도 신경을 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뒤쪽에 측간을 내어 냄새를 방비하기도 했지만, 담을 두어 자칫 불편한 모습과 소리를 안채에서 듣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우리 고택을 둘러보면 하나하나가 철학이다. 그리고 자연과 동화를 하면서 그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그러한 자연과 동화되는 심성이 아름다운 집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집을 짓는 마음이 그립다.

 

대개 절의 범종은 범종각이라는 전각 안에 불교의 사물인 북, 운판, 목어 등과 함께 배치를 한다.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말한다. 범종의 ()’이란 범어에서 브라만(brahman)’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청정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 하는 범종은, 은은하게 울려 우리의 마음속에 잇는 모든 번뇌를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범종의 소리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울려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을 부처님에게로 인도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을 울리는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종은 그 만든 연대나 제작을 한 장인들이 밝혀지고 있어서, 철조구조물 등을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중생의 번뇌를 가시게 하는 범종

 

절에서 종을 칠 때는 그저 치는 것이 아니다. 새벽예불 때는 28, 저녁예불 때는 33번을 친다.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욕계(慾界)’6천과 색계(色界)’18, ‘무색계(無色界)’4천을 합한 것이다. 즉 온 세상에 범종 소리가 울려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저녁에 33번을 울리는 것은 삼십삼천이라는 도솔천 내의 모든 곳에 종소리를 울린다는 뜻이다. 지옥까지도 그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절이나 범종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 종이 언제 조성이 되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종소리를 듣고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종소리로 인해 지옥에서 구제가 된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기에 안성 청룡사의 종에는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옥을 깨트릴 수 있는 범종의 소리.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왕의 만수무강을 위한 종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한 갑사. 천년고찰인 갑사에는 보물 제478호인 갑사동종(甲寺銅鐘)’이 있다. 갑사동종은 조선조인 선조 17년인 1584년에 만든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매달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높이 131, 입지름 91로 전체적으로 어깨부터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점부터 입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있다. 종 꼭대기에 조성한 용뉴는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발로 종을 붙들고 있는 형태이다.

 

107일 찾아간 갑사. 초가을의 날씨지만 한 낮에는 기온이 높다. 경내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땀이 흥건히 배어온다. 동종각 바로 옆에 물이 있어 찬물을 한바가지 떠 마신다. 내장 속까지 시원해지는 듯하다. 이렇게 물 한 모금이 고마울 수가 없다. 동종은 전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는데, 사진을 촬영하기가 만만치가 않다.

 

공출이 되었던 수난의 갑사동종

 

전각의 사방을 모두 나무판벽으로 막고, 위는 살창으로 꾸며놓았다. 쉽게 접근을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살창 틈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본다. 갑사동종은 종의 어깨에는 물결모양으로 꽃무늬를 둘렀고, 바로 밑에는 위 아래로 나누어 위에는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범자를 촘촘히 새겼다.

 

 

그 아래 네 곳에는 사각형모양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는 가운데가 볼록한 연꽃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딴 곳의 종들이 유두가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갑사 동종은 유두도 깨끗하게 잘 보존이 되어있다. 종의 몸통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따로 두었고, 그 사이에는 구름위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서 있다. 종의 아랫부분은 덩굴무늬 띠를 둘렀다.

 

이 종은 일제치하에서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갑사로 옮겨온 민족과 수난을 같이 한 종이다. 크지는 않지만 조성연대가 뚜렷하고, 동종의 조성의 목적이 전해지고 있는 갑사동종. 문화재마다 많은 사연이 있지만, 갑사동종은 민족의 수난과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문화재이다자칫 사라질 뻔한 문화재이기에, 더욱 그 가치가 더욱 소중한 것인지 모르겠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고찰 송광사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송광사동종 (松廣寺銅鐘)’이 자리한다.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말한다. 범종의 ‘범(梵)’이란 범어에서 ‘브라만(brahman)’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청정’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인경’이라고 하는 범종은 은은하게 울려 우리의 마음속에 잇는 모든 번뇌를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범종의 소리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울려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을 부처님에게로 이도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을 울리는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함이기도 하다

 

 

중생의 번뇌를 가시게 하는 범종

 

절에서 종을 칠 때는 그저 치는 것이 아니다. 새벽예불 때는 28번, 저녁예불 때는 33번을 친다. 새벽에 28번을 치는 것은 ‘욕계(慾界)’의 6천과 ‘색계(色界)’의 18천, ‘무색계(無色界)’의 4천을 합한 것이다. 즉 온 세상에 범종 소리가 울려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저녁에 33번을 울리는 것은 도솔천 내의 모든 곳에 종소리를 울린다는 뜻이다. 지옥까지도 그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절이나 범종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 종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그 종소리를 듣고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지옥에서 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안성 청룡사의 종에는 ‘파옥지진언(破獄地眞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옥을 깨트릴 수 있는 범종의 소리. 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달라진다.

 

 

크지 않은 송광사 동종

 

송광사에는 십자각으로 조성된 보물인 종루가 있다. 그 종루 한편에 자리를 하고 있는 송광사 동종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07㎝, 입 지름 73㎝의 크지 않은 범종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는 용이 여의주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옆으로 소리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있다.

 

동종의 윗부분에는 꽃무늬로 띠를 두르고, 아래 구슬 모양의 돌기가 한 줄 돌려 있다. 밑으로는 8개의 원을 양각하여 그 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몸통의 중심에는 머리 뒤에 둥근 광배를 두르고, 보관을 쓴 보살 입상과 전패(殿牌)가 있다. 보살 입상 사이에는 사각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꽃무늬로 된 유두가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덩굴무늬를 두르고 있다.

 

조선조 숙종 때 만들어진 동종

 

현재 송광사의 동종은 사용을 하지는 않는다. 종루에 그대로 보관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동종에 쓰여 있는 글을 통해서 이 범종은 숙종 42년인 1716년에,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영조 45년인 1769년에 이 범종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전국에 있는 범종을 보면 참으로 놀랄만하다. 어떻게 종의 겉부분에 이렇게 아름답게 조형을 한 것이라? 종의 거는 부분인 용뉴는 대개 용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많은 글자와 보살상, 비천인, 유두, 넝쿨무늬 등을 어떻게 조각을 한 것일까? 한꺼번에 조형을 해야 하는 범종이다. 그 범종에 이런 다양한 것들을 새겼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장비를 갖고 조형을 한 것이 아니다. 거푸집을 만들어 그 안에 쇳물을 부어넣어 만들어 낸 범종이다. 물론 나름 정리를 했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형태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어 낸 것일까? 중생들의 번뇌를 가시게 해준다는 범종, 그 종소리가 듣고 싶다. 오늘은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예불시간에 맞춰 찾아가 종소리라도 듣고 싶은 날이다.

전북 부안군 진서면 내소사로 243, 내소사의 대웅보전은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에 지어진 전각이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고 한다. 원래는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고 하였는데, 그 중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가 지금의 내소사이다.

 

대웅보전은 조선 인조 11년인 1633년에, 청민대사가 절을 중창할 때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대웅보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이다. 대웅보전의 규모는 정면 3측면 3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짠 장식구조가 다포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포개진 모습은 우리 옛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꽃 창살의 아름다움은 창호의 백미

 

내소사 대웅보전의 앞쪽 문에 달린 창호의 창살은 꽃무늬로 조각하여, 당시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연꽃, 국화꽃, 해바라기 등 꽃문살 무늬는 문마다 모양이 다르고 나무결을 그대로 살려 꽃잎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대웅보전 안쪽으로 들어가면 벽체 윗부분에 있는 부재 끝을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보머리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 건물의 화사함을 더해 준다.

 

천장은 우물천정으로 꾸몄으며, 불상 뒤쪽 벽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가장 큰 백의관음보살상이 그려져 있다. 공예로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과 독창적인 장식물 등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 양식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목침으로 꾸민 내소사 대웅보전

 

이 보불로 지정이 된 내소사 대웅보전에는 전설이 전한다. 대웅보전 오른쪽 천장의 목침이 왼쪽의 것보다 하나가 부족한데, 그에 관해 전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소사가 퇴락해 가고 있을 때 창민대사는 날마다 내소사 일주문 앞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웅전을 짓기 위해 목수가 찾아왔다. 그 목수는 나무를 목침만한 크기로 잘라 다듬기를, 3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는데 그 동안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일만 계속하였다. 주지인 청민대사는 기다리기만 했다.

 

그 절에 상좌스님이 목수를 곯려주려고 목침 하나를 감췄다. 3년 동안 목수는 목침 다듬기를 다 마친 후 수북이 쌓아둔 목침을 세더니 눈물을 흘리며 청민대사를 찾아갔다. 목수는 목침 하나가 없어졌으니 대웅전을 지을 인연이 없다고 말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청민대사는 목침이 하나 없는 채로 법당을 짓도록 부탁을 했고, 목수는 그 목침을 이용해 순식간에 법당을 완성했다.

 

 

법당을 완성하자 청만대사는 화공을 불러와 단청을 그리도록 했다. 단청이 완성될 때까지 누구도 그 안을 들여다보아서는 안된다고 신신 당부를 했다. 법당 앞에는 항상 목수가 지키고 있었다. 상좌스님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목수에게 대사가 찾는다고 거짓말을 하고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오색영롱한 작은 새가 부리에 붓을 물고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상좌스님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새가 날아가 버렸다. 법당 앞에는 큰 호랑이 한마리가 죽어 있었다. 커다란 호랑이가 죽어있는 모습을 본 청민대사는 대호선사여, 생사가 하나인데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이러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내소사의 대웅보전. 벌써 다녀온 지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하다. 올 봄 꽃이 필 때는 내소사를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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