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이 절차를 다 무시하고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도대체 효행사찰이라고 하는 용주사가 이렇게 절차고 무엇이고 모두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22일 오전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92-1에 소재한 수원포교당 수원사의 문이 굳게 닫혔다. 절 경내에는 400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 참회법회를 열고 있었다. 신도들이 이렇게 모인 것은 수원사 주지인 성관스님의 주지 해임 건 때문이다.

 

 

수원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성관스님은 30년 째 수원사 주지소임을 맡아왔다. 그런데 지난 18일 밤에 팩스 한 장으로 주지 직을 해임시켰다고 한다. 수원사 거시회 회원이라는 한 신도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수원사의 주지임명은 그동안 문중화합과 교구의 안정을 위해 용주사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절차도 없이 무조건 해임이라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 8월 용주사 주지 선거에서 패한 성관스님을 묵을 곳도 마련하지 않고 물러나라는 것은 보복성 인사로밖에는 이해할 수가 없다.”

 

 

30년 만에 지역의 중심에선 수원사

 

한 신도는 성관스님이 이곳에 주지로 부임했을 때는 다 쓰러져가는 법당과 요사채 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그런 수원사가 이제는 신도 1만 여명을 가진 지역의 중심사찰이 되었으며, 서호노인복지관과 영통종합사회복지관 등 세 곳의 복지관을 수탁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에까지 나가 표교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

 

그동안 성관스님은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등 해외에 나가 천명에게 백내장 수술을 지원했으며, 4만 명이나 되는 인원을 수술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봉사는 돈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신 스님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절을 비우라고 하니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경내에서 열린 참회법회에서 여신도 홍아무개씨가 해임이유가 타당치 않다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거사회의 한 신도는 성관스님과 연락을 취해보았으니 연락이 되지 않아 답답하다. 스님의 속이 오죽하겠느냐. 목요일 밤에 해임을 팩스로 접하고 나서 그 밤에 신도들과 상좌스님들이 짐을 빼내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합당한 조치 없으면 매일 참회법회 열 것

 

이날 오전 1050분 경 용주사 부주지인 성무스님과 신임 주지로 임명을 받은 세영스님 등 6명의 스님들이 수원사를 찾았으니 신도들의 거센 항의로 절 경내로 들어가지 못했다. 신도들은 성관스님의 해임에 관해 명확한 답변을 내 놓으라고 요구를 했다. 또한 24일에는 오전 830분에 수원 화성 행궁 앞에서 집결을 해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소재한 총무원을 방문해 참회법회를 열겠다고 한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시면서 신도 1만 명을 가진 수원시에서 가장 큰 중심사찰로 수원사를 이끌어 온 스님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렇게 팩스 한 장으로 나가라고하다니요. 저희는 성관스님이 그동안 포교와 복지, 전법실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애를 썼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수원사는 용주사 절이 아닙니다. 이 절은 순전히 성관스님과 신도들이 기도로 이룩한 절입니다. 막말로 용주사가 저희가 불사를 할 때 1원 한 장 도와준 것이 없습니다. 이제 와서 멋대로 신임주지 임명이라니요.”

 

수원사 진입을 하지 못한 성무스님과 세영스님 등은 10여 분만에 절을 떠났다. 신도들은 총무원과 용주사의 말사 주지 인선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용주사는 수원사 신임주지 임명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충남 당진시 면천면 성하리 510에 소재한 영탑사. 해발 210m의 차령산맥에서 뻗어나간 상왕산 동쪽 산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고찰이다. 영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로서 사적기가 없어서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말 풍수지리설로 유명한 도선국사가 창건했으며, 고려 충렬왕 때 보조국사 지눌이 중건했다고 한다.

 

영탑사라는 사명은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영탑사에는 부처의 진신을 이르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으며, 유리광전 뒤에는 바위 위에 7층 석탑이 서 있어 이름과 잘 맞아 떨어지는 절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당진군사에는 조선 정조 22년인 1798년 연암당 지윤스님이 유리광전을 보수하면서, 그 뒤 바위에 5층탑을 세운 후 절 이름을 영탑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운치있는 절 영탑사

 

영탑사를 찾은 것은 9월도 다 지나가고 가을 기운이 돌 때쯤이었다. 절 입구에 있는 늙은 고목 한 그루가 땀을 흘리며 찾아든 나그네에게 그늘을 내준다. 잠시 쉬고 있으려니 눈앞에 영천이라는 샘이 보인다. 하지만 물을 먹을 수 없다는 안내판이 걸려있다. 지금은 먹을 수 있으려는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경내로 향한다. 가람은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으며 이미 꽃을 떨군 연꽃들이 커다란 물그릇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연꽃이 피었을 때 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 보물 제409호로 지정된 금동삼존불을 보관하고 있는 영탑사를 한 바퀴 돌아본다. 어느 곳 하나 눈에 거슬림이 없다.

 

 

전설 가득한 절 영탑사

 

대웅전으로 찾아들어가 예를 올린다. 언제나 절을 찾아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땀을 식힐 겸 천천히 108배를 한다. 아직은 날이 더워 잠시 주춤했던 땀이 다시 흐른다. 아랑곳하지 않고 108배를 마친 후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불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부처님들의 상호가 한 없이 자비롭다.

 

영탑사에 있는 범종과 금동삼존불, 7층석탑은 모두 가야사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대원군이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쓰고자 가야사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니,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그리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부친의 묘를 쓰고자 절을 태웠다고 했으니, 그 성정이 올바른 것일까?

 

 

무학스님의 마애불 조성솜씨는?

 

절 뒤편으로는 계단을 오르는 길이 있다. 그 초입에 서 있는 유리광전. 유리광전 안에는 무학스님이 조상했다고 하는 마애불이 좌정을 하고 계시다.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한 것인데 약사여래불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학스님이 조각에는 별로였는가 보다. 지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고려말기의 형태를 지닌 마애불이다.

 

그리고 그 유리광전의 뒤편에는 칠층석탑이 자리한다. 이 석탑 역시 가야사에서 무너져 있던 것을 수습해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탑에는 설이 많이 전한다. 절집 한 곳을 들려 많은 문화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러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에 답사를 계속하는 것이나 아닌지.

 

당진을 답사하면서 들린 영탑사. 새롭게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피가 온 세상에 떨쳤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갑오년 정월 초하루. 힘들기 때문에 고해(苦海)라고 세상을 표현하였다지만, 올해는 고해가 아니기를 바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먹은 서원을 이루는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 문화재의 품격이 달라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대개는 격강이 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떤 때는 격하가 된 것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괜히 마음이 짠하다. 아마도 문화재에 문제가 있었던지 아니면 문화재 보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가평군 하면 운악산에 있는 현등사의 동종은 예전에는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였다가 지난해 1227일 보물로 격상이 된 예이다. 이럴 때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보물을 만났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문화재가 그만큼 소중하거나, 아니면 제작 연대 등이 밝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봉선사에 봉안되었던 동종

 

가평 현등사에 소재한 동종은 원래 현등사의 본사인 남양주 봉선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이다. 봉선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또 하나의 동종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현등사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등사 동종은 73.5cm의 아담한 크기로 종신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무늬, 파도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넣어 장식을 강조한 범종이다.

 

 

머리부분인 용뉴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을 맞대어 몸을 꼬고 있어 안정감을 주고, 두발을 힘차게 내딛어 천판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역동적인 표현력이 뛰어나다감. 비록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둥근 곡면을 이루는 천판에서부터 종의 입으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그 폭을 넓힌 종의 형태도 아름답다.

 

주종기를 종에 기록한 소중한 자료

 

현등사 동종의 배 부분에 보면 해서체로 주종기를 돋을새김 하였다. 주종기는 광해군 11년인 1619년에 천보가 짓고 글을 새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동종을 만들게 된 연유와 종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등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라 이종의 시용 용도와 참여한 사람 등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주종기에 보면 주종장은 주종기를 작성한 천보로 보고 있는데, 그는 조선후기 승려 주종장 가운데 유일하게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승장의 계보나 범종의 양식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

 

현재 현등사에 보관되어 있는 이 종은 1619년에 조선 전기 궁중양식 범종의 전통을 계승하여 제작된 범종이며, 주조상태도 양호하고 역동적이다. 종에 새긴 문양은 생동감이 있는 무늬들을 조화롭게 배열한 점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선후기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종의 양식을 따른 종

 

현등사 동종은 고려 후기 연복사종에서 비롯된 중국 종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종의 중심부를 세 개의 융기선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의 입 사이에 다양한 무늬를 시문하여 절로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작은 마름모꼴의 연곽에 구슬 모양의 연꽃봉우리라든가, 천판의 내림연꽃이 중앙을 향해 보상화문처럼 말려든 형태와 그 위로 표현된 구슬무늬 등이 아름답다.

 

 

또한 종의 블록한 배 부분에 크게 자리 잡은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와, 하대에 표현된 물거품이 일렁이는 파도무늬 등은 장엄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요소는 1469년 작 남양주 봉선사 동종(보물 제397)이나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 그리고 1491년 작 합천 해인사 동종(보물 제1253) 등 조선전기의 왕실발원 범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종을 소장했던 봉선사도 왕실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만들어진 궁중양식 범종의 여러 가지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벌써 몇 년은 됨직하다. 이곳을 다녀온 지가. 서울 강북구 우이동 산 68에 소재한 대한불교 조계종 용덕사는 창건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절은 명당 중에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심상치 않지만, 도선사를 들어가는 입구로 걸어 올라가면 우이동 먹거리촌이 나온다.

 

이 먹거리촌 오크밸리 앞에 용덕사 이정표가 하나 서 있다. 용덕사는 걸어 올라가는 길이 아름답다. 먹거리촌까지 차를 이용해서 간다고 하면, 걷는 길은 차에서 내려 10~15분 거리이다. 그저 마음 편하게 뒷짐을 지고 걸어도 15분이면 넉넉하다. 가다가보면 우측으로 펜스를 쳐 놓은 곳이 있고, 그곳을 지나면 낮은 산길을 걷게 된다.

 

 

암벽에 조성한 마애불이 일품

 

용덕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찰의 형태는 아니다. 하지만 산사의 분위기는 한껏 느낄 수가 있다. 한편으로 흐르는 맑은 개울이 있어, 물소리까지 정겨운 곳이다. 용덕사의 샘물인 감로수는 도봉산의 약수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전한다. 한 모금 마시면 폐부 깊숙이 시원함이 전해온다.

 

주변에 온통 바위투성이이다. 그런 곳에 어떻게 절을 중창한 것인지. 절 경내라고 해보아야 돌아볼 것도 없다. 한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분위가 하나는 가히 절경이라는 생각이다. 바위 한 면에 조각된 마애불은 압권이다. 100여 년 전에 이 곳에서 시봉을 들던 동자가 바위에 밝은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조각을 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 곳곳의 비경에 조각한 마애불들은 모두 전설 한 자리씩 갖고 있다. 그만큼 지금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만난다. 어떤 마애불은 자연 굴 안에 들어가 있기도 하다. 용덕사 마애불도 동자가 조각을 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 큰 바위면을 어떻게 갈아내고 조성을 한 것일까?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용의 입에 마련한 산신각

 

절이라는 곳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 안에 무슨 사연인들 없을 것인가? 용덕사의 경내를 돌다가 보면 커다란 바위굴 입구 문 위에 산신각이라고 음각한 글을 볼 수 있다. 산신각을 자연적인 바위에 조성을 한 것이다. 이 바위는 바로 용이 입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둥근 바위가 바로 여의주라는 것이다.

 

용이 입을 벌리고 여의주를 무는 형상이라고 하니 명당임에 틀림이 없다. 이곳은 많은 분들이 와서 기도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건강발원이나 진급, 혹은 자녀의 입시 등을 위해서도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사실 사찰이라는 곳이 차를 타고 경내까지 들어간다면, 아무리 열심히 공을 들인들 무슨 덕을 볼 것인지 의아하기도 하다.

 

 

물론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마음부터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발원심이 날 것인가? 차도가 없어 잠시 동안이라도 걸어야 하는 용덕사는 그런 점에서는 정말 좋은 절이란 생각이다. 벌써 다녀온 지가 깨 되었지만, 이제야 숨어있던 자료를 발견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참으로 좋은 절 한 곳을 잊을 뻔했다

 

팔달사’, 이름 그대로 팔달산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가 있다. 팔달산 기슭에 자리한 팔달사는, 전통사찰 제75호로 198810월에 지정이 되었다. 팔달산의 비탈을 그대로 이용해 전각을 조성한 팔달사는, 도심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힐링장소이기도 하다. 1031일 오후 찾아간 팔달사는, 가을이 한창 깊게 물들고 있었다.

 

팔달사를 찾는 것은 가끔 용화전 벽에 그려진 벽화 때문이기도 하다. 거만하게 생긴 호랑이 한 마리가 장죽을 물고 있고, 두 마리의 토끼가 시중을 들고 있는 벽화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화 중 한 소재인 이 그림을 왜 용화전 벽에 그렸는지, 그 내력이 궁금해서이다. 하지만 언제나 들려보아도 속 시원한 대답은 듣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1922년 흥법 비구니가 설립

 

팔달사는 흥법(윤흥자) 비구니가 1922년 토지와 건물을 합쳐 114평 정도를 구입하여 팔달암을 건립한 것이 현 팔달사의 불사내력이다. 정확한 사록(寺錄)이 없어 자세한 팔달사의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이채순(평등월) 보살이 일본 조동종 사찰에 입산하여 비구니계(불명 묘심)를 받은 후, 승려생활을 해 오던 중 피부병이 생겨 승려생활을 할 수 없자 환속을 했다고 전한다.

 

그 후 흥법 비구니의 셋째아들인 김용기와 결혼을 해, 1934년에 사찰운영 관리권을 넘겨받았다. 19406월에 현 재단법인 선학원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에 팔달사 재산 전부를 증여한 후 제1대 창건주가 되었다. 이채순 보살의 남동생 범행스님이 1952~2003년까지 주지로 소임을 맡았다.

 

 

당시 주지 범행스님은 1987~20036월까지 제2대 창건주로 승계를 받았으며, 이채순 보살과 범행스님의 노력으로 주변의 토지와 가옥을 사들여 1,200평의 도량에 지금과 같은 팔달사를 이룩하였다. 20066월에는 범행스님의 상좌인 혜광스님이 제3대 창건주로 팔달사를 승계 받은 후, 주지로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절 팔달사

 

팔달산의 비탈을 이용하여 대웅전, 범종각, 용화전, 요사, 산신각 등을 배치한 팔달사. 그저 누구나 편히 들어가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이다. 1,500평의 대지에 각종 나무들과 꽃들이 가꿔져 있어, 가을이 되면 팔달산의 단풍과 함께 눈이 즐거운 곳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 안에 자리하고 있어, 외국의 관람객들도 심심찮게 찾아드는 곳이기도 하다.

 

 

10월의 끝에 찾아간 팔달사.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용화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벽화를 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용화전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른다. 범종각이 머리 위에 있다. 팔달사의 범종각은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마련하였다. 늘 이 범종각을 볼 때마다 구름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도심 속의 힐링공간 팔달사

 

그리 오래된 절은 아니라고 해도, 팔달사는 언제나 옛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특히 가을에 찾아가면 팔달산의 단풍과 함께, 대웅전 뒤편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면 더욱 고풍스럽다. 팔달사를 즐겨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는 아직도 뒤편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색으로 치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옆으로 난 소로 길을 걸어 석탑 앞으로 다가선다. 계단 옆에 서 있는 노송 한 그루,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층석탑은 불사리를 모셔 놓았다고 한다. 잠시 머리를 숙인다. 고개를 드니 용화전 옆 향나무와 석탑 앞에 심은 꽃들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가을이 깊어간다는 것을 팔달사 경내에서 쉽게 느낄 수가 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본다고 해도 잠시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가을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고, 더욱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도심 속에 산사(山寺)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절이 있을까? 내가 마음의 여유가 필요할 때 팔달사를 찾아가는 것은, 바로 이런 산사의 가을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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