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에 있는 사선대는, 예전에 신선이 놀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을 ‘사선대(四仙臺)’라고 하는 이유는, 옛날 진안의 마이산과 임실 오원산의 네 산신들이, 오원강 기슭에서 까마귀 떼와 함께 목욕을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신선들을 모시고 올라갔다고 전한다. 그 후 해마다 선녀와 신선들이 이곳에 내려와 놀았다고 전한다.

 

사선대 위에 아름다운 정자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신선이 놀던 자리에 지었다는 운서정. 운서정은 아래쪽으로 흐르는 내를 내려다보면서, 절벽 위에 솟구치듯 서 있다. 1928년부터 김승희가 부친 김양덕의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에 쌀 3백석이라는 비용을 들여 6년여에 걸쳐 지은 정자다.

 

 

절로 바뀐 운서정

 

운서정은 전주 - 남원 간 17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관촌 입구 대원주유소 삼거리를 지나쳐서 오원교를 건너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진안 방면으로 진입하면 된다. 남원 방면으로 가다가 보면 사선문이 서 있는데, 사선문 곁으로 난 진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사선사라는 이정표가 있다.

 

아니면 사선문에서 차를 내려 좌측 등산로를 따라 들어가면 백제 무왕 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미산성(城嵋山城)에 이르는 등산로를 따라서도 운서정에 도착할 수 있다. 현재 운서정은 대한불교 조계종 사선사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운서정의 출입문인 가정문과 운서정, 그리고 현판


원래 운서정은 정각과 동, 서재, 그리고 가정문 등으로 이루어진 전각이었다고 한다. 일제 치하에서는 우국지사들이 모여 망국의 한을 달래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운서정은, 조선조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운서정은 좋은 목재와 돌기둥 등을 이용하여 지은 건물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절로 감탄을 하게 만드는 운서정

 

운서정 앞으로 걸어가다가 보면, 가정문을 보면서부터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날렵하게 서 있는 솟을대문에 ‘가정문(嘉貞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좌측 벽에는 <사선대 사선사>라 쓴 현판이 부착이 되어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운치 있는 돌계단 위에 운서정이 자태를 뽐낸다.

 

 

 

 정자에 사용한 치목이나 조각들을 보면 이 정자가 뛰어난 조형미를 갖춘 정자임을 알 수 있다


하늘 닿게 높다라니 솟아 뒤로 구름을 배경삼은 운서정.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좌우로는 사선사의 인법당과 요사가 보인다. 운서정에는 동, 서재가 있다고 했는데 이 건물들이 동, 서재인 듯하다. 그러나 동서재의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듯 그 자태를 찾아볼 수가 없다. 운서정은 돌계단을 올라 자리하고 있다. 돌계단을 오르면서 보면 거대한 돌로 주추를 놓았는데, 주추에도 조각을 해 놓았다.

 

오원천과 함께 어우러진 이 정자, 신선이 놀만하네

 

운서정은 정말 운치가 있는 정자이다. 아래로는 오원천이 흐르고 있어 절경에 자리 잡고 있다. 운서정을 보니 지금은 문이 없으나, 문을 올려 걸어놓을 수 있도록 전각을 빙 둘러 고리가 달려있다. 전각의 단청이나 조각 등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듯하다. 중앙에는 두 마리 용이 양편에서 전각의 천정을 휘감고 있다.

 

 

 

 

다양한 조각으로 장식한 운서정. 정자 외부에도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처마를 받치고 있는 활주의 주추가 특이하다(아래)


밖으로도 입을 딱 벌린 용머리를 조각해 그 멋을 더하고 있다. 어디서 바라보아도 흐트러짐이 없는 정자의 모습에 그저 감탄이 절로 나올 뿐이다. 운서정을 나와 오원천을 밑으로 난 길을 걸으면 가칭박달나무 등 천연기념물을 만날 수도 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걸어볼 수 있는 길. 아마 신선들이 이곳을 찾은 이유도 이러한 경치 때문이란 생각이다.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 정자 운서정은, 그렇게 절집으로 변해버렸지만 그 멋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충북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38번지에 소재한 각연사.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 각연사에는 보물 제433호로 지정 된 석조비로나좌불상이 있다. 우선 이 불상에 대한 표현부터 먼저 하고 가자. 각연사를 찾아 비로전에 있는 비로자나불 좌상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숨이 막히는 조각. 사람의 솜씨는 아닌 듯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조각을 할 수 있었다는 신라 장인들의 솜씨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를 촬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의 담당자를 찾아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한다. 종무실에 가서 비로자나불을 좀 촬영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스님 한 분이 나오신다.

시방세계를 통솔한다는 비로자나불

스님이 따듯하게 끓여 타 주신 차 한 잔을 마시고, 비로전 안으로 들어가 촬영을 시작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연신 감탄이 그치지를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조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마치 살아있는 듯한 표정이며,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수많은 문화재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섬세한 조각은 처음인 듯하다.

비로자나불은 시방제불을 포괄하는 법신불로 알려져 있으며, 노사나불이라고도 부른다. 각연사의 바로나자불 좌상은 대좌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가 모두 갖춰진 완전한 형태의 불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좌대의 조각도 훌륭하지만, 광배의 조각은 그야말로 최고의 예술품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이리도 정교하게 조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오랜 세월동안 어떻게 완벽하게 보전됐을까?

까맣게 칠을 한 작은 소라 모양으로 머리칼을 표현한 소발.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눈과 코, 입의 표현은 완벽할 정도이다.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은 앞에 마주 한 사람의 마음을 한 없이 편안하게 해준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었는데, 옷 주름은 간략하게 표현을 하여 전체적인 모습을 무겁지 않게 하였다.



뛰어난 광배의 조각,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석불좌상의 뒤편에 놓인 광배는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 있다. 흡사 오뚝이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일석으로 조성한 광배를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물방울처럼 생긴 광배에는 몸에서 뿜어 나오는 불을 형상화 한 듯, 불꽃을 조각하여 놓았다. 그리고 머리와 불상의 양편으로 각각 3구씩의 작은 부처인 화불이 조각돼 있다.




머리 위에도 3구의 화불이 좌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광배에 아홉 분의 화불을 새겨 넣었다. 광배의 안쪽에서부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광배를 찬찬히 살펴본다.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모습, 그리고 뛰어난 조화로움. 도대체 인간의 조각품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단지 망치와 정 하나만으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가능하다니. 광배와 잘 어울리는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을 살펴보면서 느낀 것은, 선조들의 예술세계가 그저 놀랍다는 것뿐이다.


연화대좌에서도 뛰어난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었다. 연꽃으로 둘러싼 대좌는 세부분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아름다운 조각품인 각연사 석조비로나자불 좌상. 사진을 찍고 난 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삼배를 한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서원하는 것은, 이 석불좌상에 기원을 하면 무엇이나 다 이루어질 것만 같아서이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본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다시는 훼손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충남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 345번지에 소재한 충남 전통사찰 제85호 미륵사. 미륵사 상량문에 의하면 미륵사는 통일신라 성덕대왕 2년인 703년 봄에 창건되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재단법인 선학원의 분원이다.

미륵사는 1948년 불에 타 없어지기 전까지는, 대웅전과 칠성각, 산신각, 요사 등을 갖추고 있었다. 화재 후에는 인법당을 모셨으며, 현재는 대웅전을 새로 짓고, 산성각, 요사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미륵사에는 ‘미륵암(彌勒岩)’이 있다, 두상만 남은 석조불을 바위 위에 얹어 놓은 것이다.



미륵암 위에는 고려시대의 석불의 두상이 올려져 있다. 이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이라고 한다. 바위에 선각은 조성한지가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는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가 조각이 나 있다. 안면이나 두광 등이 잘 나타나 있고, 옆에는 몸만 나온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삼존불 중 협시불인 듯하다.


바위 위에 얹은 석불 두상

지난 8월 28일, 장수, 진안을 거쳐 금산으로 들어갔다. 보석사의 은행나무와 미륵암을 보기 위해서이다. 미륵암은 현 미륵사로 올라가기 전, 축대 밑에서 좌측으로 70m 정도 들어가면 만날 수가 있다.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하나 보이고, 그 위에 석불의 두상을 올려놓은 것을 볼 수가 있다.

두상으로만 보아도 이 석불은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밑으로는 평평한 바위 면이 있는데, 누군가 그곳에 두상을 염두에 두고 선각으로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것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쪼개진 바위조각에 조각을 한 흔적이다.


조각난 바위 뒤에는 전각의 주추를 놓았던 흔적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이 마애불을 보존하는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쪼개진 바위조각들은 마애삼존불인 듯?

미륵사로 찾아들었다. 주지스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자료를 들고 나와 보여주신다. 이곳으로 부임을 해와 보니, 바위를 절단 한 듯 톱날 등이 바위에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바위가 널린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다. 어림잡아 크기는 3m가 넘을만한 마애불이다. 전체적으로 이것저것을 맞추어보니, 삼존불을 새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렇게 조각이 나 버린 것일까? 그리고 저 바위에 선각을 한 것은 무엇일까?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는 여기저기 널려있다. 어림잡아도 10여 조각은 되는 듯하다. 미륵사 주지스님의 이야기로는 숲 속에도 조각들이 있다는 것이다.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면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선각을 한 바위 옆으로는 커다란 조각이 하나 서 있는데, 그것을 추론하여 볼 때 마애불을 새긴 바위의 높이는 3m를 넘었을 것만 같다.



주변에 널려진 바위조각에는 마애불을 새긴 흔적이 보인다. 마애불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각을 한 것의 기법 등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작이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낸 것일까?


무지가 빚은 참화, 눈물이 난다

그리고 바위는 넓적한 돌에 마애불을 새겼을 것만 같다. 그 마애불을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이다. 현재 조각난 마애불 주변에는 옛 기와조각이 발견이 되고, 바위 한편에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을 새기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각까지 지었다는 것이다. 기와의 와편은 보기 힘든 꽃이 새개져 있다. 와편만 보아도 이 마애불을 보존하기 위한 전각이 상당히 공을 들여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 역시 상당히 소중하게 여겼을 터, 그런 문화재급 마애불이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애불을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일까? 조각난 마애불을 돌아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세상에 소중한 문화재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다니. 무지가 불러온 문화재 훼손. 그것도 알만한 인물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참담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들이 제 모습 그대로, 제 자리에 편안한 모습으로 있을 것인지. 이 나라에서는 기대를 할 수 없는 것일까? 돌아 나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보면, 옛 절터를 찾아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사지(寺址)’에는 절터만 있는 곳도 있지만, 많은 문화재가 함께 있는 곳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지를 들어가면 많게는 5 ~ 6점의 문화재를 함께 답사를 할 수가 있으니,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정말로 횡재를 한 셈이 된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에 소재한 사적 제131호인 영암사지. 황매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신라 때의 절터이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지어진 절로 보인다. 고려 현종 5년인 1014년에는 ‘적연선사’가 이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치 견고한 성을 연상케 하는 사적 제131호 합천 영암사지의 석축


신라시대에 세워진 고찰 터

합천 영암사지. 비가 아침부터 줄기차게 쏟아진다. 요즈음은 이상하게 멀쩡하던 날씨가 나만 움직이면 비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요즘 별명이 ‘비를 몰고 다니는 사나이’로 바뀌어 버렸다. 이런 별명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는 정말로 죄송한 별명이다. 영암사지에 도착해서도 비는 멈추지를 않는다.

처음 영암사지를 보고 내가 한 행동은 탄성이었다. 이런 곳에 어떻게 이렇게 대규모 사찰을 이룩할 수가 있었을까? 그 당시는 교통도 좋지 않아, 많은 석재를 날아오기도 힘들었을 텐데. 정말로 대단한 절터였다. 지금은 복원을 많이 해 놓아 정비가 되어있긴 하지만, 아직도 한편에는 미쳐 정비를 하지 못한 듯하다.


삼층석탑이 서 있는 축대 아래편의 절터와(위) 금당지로 오르는 중앙계단 


저 곳까지 마저 복원을 마친다면, 얼마나 웅장한 절이었을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암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 중에도, ‘영암사’라는 절의 이름이 보인다. 홍각선사비가 886년에 세워졌다는 점을 보면, 영암사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886년은 신라 정강왕 원년이다. 그런 점으로 보면 아마도 신라 헌강왕 이전에 지은 절이란 생각이다.

밀교의 절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영암사지

황매산의 절경인 암벽을 뒤로하고 있는 영암사지는 모두 세 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높은 돌로 쌓은 축대는 성벽을 방불케 한다. 발굴을 통해 조사해본 결과로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과 더 위쪽에 자리한 서금당. 회랑터와 기타 건물터 등이 확인이 되어,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다. 조사된 바로는 금당은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축대 밑으로도 넓은 절터가 조성이 되어있으며, 삼층석탑 부분, 그리고 석등이 있는 곳의 금당터와, 양편에 귀부가 남아있는 곳으로 구분이 된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보물 제353호인 쌍사자석등과, 보물인 삼층석탑, 귀부 등 당시의 건물 받침돌과 각종 기와조각 들이 남아있다.

이곳 영암사지의 건물터는 일반 사찰 건물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금당이 있는 상단 축대의 중앙 돌출부 좌우에 계단이 있는 점과, 금당지 연석에 얼굴모양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 후면을 제외한 삼면에 동물상을 돋을새김한 점이다. 이런 조형의 특이함과 입지 조건, 서남쪽 건물의 구획 안에서 많은 재가 나오는 점으로 보아, 신라 말에 성행한 밀교의 수법으로 세워진 절로 보인다.


금당지 위를 돌아보다가 비에 젖은 잔디에 주저 앉고 말았다. 15cm정도의 석재 같에 돋을새김한 정교한 조각(위)과 금당지 축대 외벽에 조각한 동물상 때문이다.


금당지를 돌아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다.

금당터, 석등을 본 후 금당터로 오른다. 중앙에 분리를 시켜 양편으로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을 놓았다. 계단의 남은 석물로 보아, 화려한 조각이 되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은 삼면으로도 층계를 놓았다. 위로 오르니 주춧돌과 함께, 본존불을 모셨을 자리가 있다. 그 한쪽 편을 보고 놀라움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낮은 석축 표면에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그 남은 부분에도 이런 비천인인 듯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비가 오는데도 다리에 힘이 풀린다. 영암사지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눈을 감고 옛 모습을 그려내 본다. 장엄한 영암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황매산을 뒤로하고,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는 가람이.


아마도 이런 사지는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던 것만 같다. 영암사지, 그 장엄한 절이 언제 소실이 되어버린 것일까? 아마도 두고두고 생각이 날 것만 같은 곳이다.


소나무 가지에 새들이 앉아있다. 부엉이도 있고, 비둘기도 보인다. 이렇게 소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새들은 살아있는 새가 아니다. 나무를 깎아 소나무 가지 끝에 올려놓은 나무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새가 있는 곳마다, 나무 가지가 부러진 듯하다. 처음에는 부러진 나뭇가지가 보기 흉해, 새를 조각해 놀려놓은 줄로만 알았다.

3월 20일, 1박 2일의 황사가 자욱한 속에서 답사를 마치고, 용인에 있는 한 커피숍에 들렸다. 피곤한 다리도 쉴 겸 지인들과 차를 한 잔하기 위해서이다. 용인시 기흥구 고매동에 있는 이 커피숍의 주차장에는 참 좋은 차들만 들어서 있다. 주변이 요즘 말로 ‘잘 나가는 동네’인 듯하다.


생나무를 잘라 조각을(?)

차를 마시고 길을 나서기 위해 밖으로 나오다가 보니, 들어갈 때는 보지 못했던 조각들이 나무 가지 위에 보인다. 새를 조각을 해 놓았다. 커피숍 앞마당에 있는 두 세 그루의 소나무 가지에 새들이 올라 앉아있다.

처음에는 그저 나무가 부러진 것이 보기가 안 좋아서, 그 위에 나무로 새를 조각해 올려놓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새가 있는 가지마다 다 부러진 듯하다. 왜 이렇게 이 집의 소나무 가지만 부러져 있는 것일까? 나무로 가까이 가서 새들을 조각한 곳을 살펴보았다. 따로 조각을 해 올려놓은 것이라면, 당연히 나무줄기의 두께보다 일부분이라도 위로 치며 올라와야 한다.



그런데 새들이 앉은 가지는 위에 조각을 한 새들과 굵기가 동일하다. 그리고 보이 이음새가 보이지를 않는다. 한 마디로 새를 조각하기 위해 멀쩡한 가지를 자르고 그 잘려나간 부분에 새를 조각했다는 것이다.

예술품으로 보아야하나? 그럼 잘려나간 가지는

밋밋한 소나무 가지가 보기 싫어서 이렇게 조각을 한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소나무 가지를 잘라 새를 조각해 놓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을 한 것일까? 만일 이것이 바람이나 어떤 자연적인 작용에 의해 잘려나간 가지가 보기 싫어 조각을 해 놓은 것이라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흉한 잘린 가지를 보기 좋게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각을 하기 위해 일부러 나뭇가지를 잘랐다고 하면,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해 생나무 가지를 잘랐다는 것이니 어떤 이유로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잘려진 나뭇가지 위에 올려 진 새들이 아름답기보다는, 왠지 흉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렇게까지 조각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름다운 반지 하나를 끼우자고 손가락 살을 잘라내는 것이나 한 가지가 아닐까? 소나무도 많이 아팠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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