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월) 낮, 화령전 앞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피리를 불고, 장구와 제금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화령전 솟을삼문 앞 길 건너편 2층집 ‘용궁아씨당’이라는 간판을 건 무속인의 집에서 울리는 소리다. 굿판이 벌어졌다. 한 때 굿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던 내가 아니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들었다. 진적굿이 막 시작되었다. 진적굿이란 ‘맞이굿’이라고도 하는데, 신을 모신 기자(祈子)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을 위하여 벌이는 잔치판이다. 봄에 하면 ‘꽃맞이 굿’이라고 하고, 가을에 하면 ‘단풍맞이 굿’이라고도 부른다.

 

 

 

유독 수원에 무속인이 많은 까닭은?

 

수원에는 유난히 신을 모신 무녀들이 많이 거주한다. 이렇게 수원에 무녀들이 많은 것은, 역사의 한 단면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조선조 때는 유생들로 인해, 도성 안에 있는 많은 무녀들이 성 밖으로 쫓겨나고는 했다. 성 밖으로 나온 그들은 무녀(巫女)들은 노량진을 건너야 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하던 악사 등 남자들은 뚝섬을 건너야만 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노들만신’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한강을 건너 노들로 모여 든 도성의 만신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야만 했을 터. 이들은 몰려든 곳은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드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하기에 이들은 화성 축성을 위해 수많은 노역자들이 몰리는 곳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또한 화성 축성을 마친 후에는 수원에는 장안문 밖인 영화역 인근과, 팔달문 앞에 커다란 장시가 형성이 된 것을 알고 수원 화성 인근에 보금자리를 틀었을 것. 매향동을 비롯하여, 지동, 매교동, 남수동 등 화성의 안과 밖에 이렇게 무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원에 큰만신들이 대거 포진한 것도, 이렇게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과 장시는 함께 역사의 길을 걸었던 것.

 

“정조대왕 수위에서 놀구나가오”

 

“해동은 대한 국 수원이라 대목 안에 팔달산 내린 줄기 이 터전에 들었으니, 오늘 애동제자 단풍맞이 이 마전에 정조대왕 수위에서 정성 덕 입사와....”

 

스승인 승경숙 선생(여, 58세)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를 하는 용궁아씨 정현옥(여, 43세)이 천궁맞이 굿 상 앞에서 소리를 한다. 이렇게 신령을 위한 진적굿은 일 년에 한 번 , 혹은 3년에 한 번씩 하게 되는 굿이다. 또한 이 진적굿은 무녀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정성을 드려 제물을 차리고, 어느 때보다도 신경을 써서 펼치는 굿판이다.

 

 

 

 

우리는 흔히 ‘굿은 굿(Good)이다’라고 한다. 그것은 ‘굿판은 열린 축제의 마당’이기 때문이다. 굿판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올 수가 있다. 그리고 함께 웃고 울며 시간을 보낸다. 굿판에는 언제나 먹을 것이 많다는 것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저 이런 굿판은 많은 것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도 나누고 복도 나눈다. 나누어 주는 문화, 그것이 바로 굿문화이다.

 

그런 굿판이 요즈음은 자꾸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고 있다. 사람들과 함께 밤새 즐기던 굿은, 이제는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고가 들어간다. 한 낮에도 조금만 시끄러우면 신고를 해댄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던 한 마당인 굿이, 자꾸만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게 만든 이유이다.

 

그 선생에 그 제자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용궁아씨 정현옥을 만났다. 내린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 물었더니, 이제 4년이란다. 4년 밖에 안 된 애동(내린지 얼마 되지 않는 무녀들을 흔히 이렇게 부른다)이 천궁맞이 한 석을 이렇게 걸판지게 해 낼 수 있다니, 그도 놀라운 일이다.

 

 

 

“어머니(스승 승경숙을 말한다. 승경숙은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의 이수자이다)에게서 제대로 학습을 받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언제나 정말 열심히 학습을 시키시기 때문에 이만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무속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굿은 배워야 한다.’라는 말이다. 내림을 받았다고 해서 굿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굿은 선대의 무녀에게서 배워야만 한다. 굿을 배울 때는 상 차리는 법, 옷 입는 법, 지화 만드는 법 등 많은 학습을 필요로 한다. 그런 것을 다 배우려면 적어도 10년 세월이 필요하다는데, 정현옥은 그 학습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밖에.

 

“내리고 난 뒤 올해 세 번째 맞이굿인가 보네요. 처음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작게나마 신령님들을 위하는 굿을 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처음에 신병이 왔을 때는 정말 어려웠죠. 재물은 재물대로 손해를 보고,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가 않고, 먹어도 먹은 것 같지도 않고요. 눈만 감으면 환청이 들리고, 눈을 뜨면 무엇이 보이고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내림을 받지 않고 있으니, 동생들과 내가 교대로 신병을 앓았고요. 할 수 없이 제가 내림을 받았습니다.”

 

무녀들이 신병을 앓을 때는 대개 세 가지의 형태가 나타난다. 그 첫 번째는 정신적인 것이다. 남들은 듣고 볼 수 없는 것을 본인은 보이고 들리기 때문이다. 병원을 찾아도 아무런 증세가 없다. 다음은 물질적인 신병이다. 재산이 이유도 없이, 주위 사람들이 사고가 나거나 해서 다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병은 육체적인 신병이다. 대개는 중병에 걸리는데도 이들은 죽지를 않는다. 이 세 가지는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래도 내림을 거부하면 가장 무섭다는 ‘인다리( =人橋)’ 현상이 나타난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한 사람씩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 무녀 중에서는 가족 5명을 보내고 난 뒤, 내림을 받은 사람도 있다.

 

“힘든 것은 말도 못하죠. 그러나 어차피 이렇게 제자의 길로 들어섰는데 어쩌겠어요. 지금은 오히려 담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단골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죠. 학습에도 더 열심을 내야 하고요”

 

긴 시간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 아직도 그 많은 제차를 다 하려면 시간이 바쁘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걸어야만 하는 무녀의 길. 이제 이들이 하는 굿 행위도 우리는 하나의 역사 속에서 창출된 문화로 인정을 해야만 한다. 굿은 총체적인 예술이다. 흔히 악가무희(樂歌舞戱)가 그 안에 다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굿은 우리 전통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제는 반론할 여지가 없다. 하기에 ‘신들린 사람’으로 그들을 대하기보다는, 우리의 한 문화를 이어가는 사람들로 설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 얼마 뒤 더 많은 재주를 배운 정현옥의 굿판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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