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정조시대에 한양에 살던 이희평이라는 사람이 쓴  ‘화성일기‘에 보면 을묘년 정조대왕이 수원으로 내려와 공식적인 활동을 하는 첫날, 화성에서 치러지는 특별 과거시험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축하하기 위해 화성, 광주, 과천, 시흥 등 4개 읍의 선비들만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는데 그런 시험을 화성과 그 주변 부에 사는 선비들에게만 특혜를 준 것이다.

 

28일, 제50회 수원화성문화제 첫날 오전 10시 30분에 화성 행궁 봉수당 앞에서는 정조대왕 친림 과거시험이 재현되었다. 왕이 친림해 과거시험을 치루는 것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인데, 217년 전인 1995년 을묘년 화성 원행시 진행이 되었던 낙남헌 문과와 별시를 근거로 재현한 것이다. 유일하게 화성 행궁에서만 치룬 것이다.

 

 

과거를 치루는 유생들

 

염태영 수원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과거 정조대왕께서 친히 이곳 화성 행궁에 행차하시어 주변에서 모인 유생들에게 과거를 볼 수 있도록 하셨다. 217년 전에 이곳에서 열린 과거시험을 오늘 재현하는 행사이다. 유생들이 글을 잘 쓸 수 있도록 큰 박수를 쳐주자.”며 과거시험 재현에 대한 의미를 되새겼다.

 

정조대왕 분의 수원시 한의사 협회 윤성찬 회장과 장용영의 군사들, 문무대신들이 입장을 하자 옛날과 같이 과거시험의 시제가 나붙었다. 시제는 <積善堂前無限樂 長春花下有餘香(적선당전무한락 장춘화하유여향)>으로 ‘부모님 살아 계실 때는 부모인 줄을 모르더니, 부모님을 여윈 후에야 부모인 줄을 아노라. 이제야 이 마음 가지고 어디에다 베푸리요.’라는 뜻이었다.

 

 

시제는 이날 과거시험을 위해 미리 내주었다고 한다. 참가한 유생들은 공부를 하고 온 것이다. 시제가 나붙고 난 뒤 참가한 유생들에게 시제를 풀어 쓸 시험지인 한지를 나누어주자, 유생들은 연습을 해온 글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진행에 어려움 겪어

 

화성문화재는 항상 많은 인파들로 붐빈다. 하지만 이날 과거시험 장에 여느 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화성문화제 촬영대회에 참가한 사진동아리 사람들로 인해 온통 북새통이었다. 진행을 하는 사람들이 진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도 보이고.

 

“정말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좋은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은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려고 앉아있는데 꼭 저렇게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면서까지 난리를 쳐야 하나요.”

 

 

과거시험 구경을 하던 한 관람객은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볼 수가 없다면서 자리를 뜬다. 정조대왕 분의 윤성찬 회장은 과거를 치루는 유생들을 돌아보면서 격려를 하기도. 정조대왕이 시험장을 떠나자 사진을 찍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난리들을 쳤다.

 

“내년부터는 이런 행사를 할 때 포토라인을 설정해 그 안에는 일체 출입을 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과거시험을 치루는 모습을 재현하는 것인지, 저 사람들 난리 통을 보러 온 것인지 구별이 안 되네요.”

 

관람을 하기 위해 화성 행궁을 찾아 온 시민들의 불만이 커져간다. 축제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왁자해야 제 맛이지만, 이런 문제는 앞으로 진행을 하는데 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생태교통 수원2013’의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정조의 영정을 봉안한 화령전의 정문인 솟을삼문 앞에는 간이무대가 설치되고, 각 구청별로 무대를 꾸민 공연이 이어졌다. 23일에는 권선구 봉사의 날로, 오후 3시부터 무대에 오른 세류1동 주민센터에서 기타를 배운 사람들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등 4곡을 관람객들에게 들려주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이 날 권선구의 공연은 입북동이 고전무용인 ‘사랑가‘ 등을 선보였으며, 권선2동의 재즈댄스가 무대에 올라 흥을 더해주었다. 권선2동의 재즈댄스 동아리는 무대에 올라 The nest episode 등에 맞추어 춤을 추었으며, 이어서 입북동의 기타반이 ’내일은 해가 뜬다.‘ 등을 연주했다.

 

 

문화강좌로 익힌 실력 등 대단해

 

뒤이어 세류3동에서 나온 민요교실 팀은 사랑가와 오봉산타령, 한강수타령 등을 구성지게 불러 박수를 받았으며, 제일 끝으로 무대에 오른 곡선동의 난타 팀은 아리랑, 용천의 소리, 다이내믹 등에 맞추어 멋진 타악 연주를 해주었다. 평일이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리가 울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관람인원이 점차 늘어났다.

 

“참 좋습니다. 이렇게 각 구청과 주민센터마다 문화강좌 등을 통해 배운 강습생들이 점차 실력이 좋아지면서 동아리까지 만들어 연주봉사도 하고, 경로당이며 불우한 이웃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참 바람직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권선구에서 마련한 다양한 공연 무대를 보고 있던 한 시민은 이렇게 주민센터 등을 통해 배워서 재능기부를 하는 모습들이 아름답다고 칭찬을 한다. 한 낮의 더위가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많은 땀을 흘리면서 공연을 마친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준 조아무개(남, 45세)씨는

“이 더운 날에 저렇게 열심히 땀을 흘리며 관객을 즐겁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데, 생태교통에 와서 참 많은 것을 보고 갑니다. 수원이라는 곳이 딴 지자체보다 월등히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라고 한다.

 

왜 꼭 이곳이라야만 했을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박수를 치고 좋아한 것만은 아니다. 구경을 하던 한 어르신은 혀를 차면서

“참 화령전은 본전인 운한각에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셔놓은 곳이다. 즉 이곳은 성전(聖殿)이라고 보아야 한다. 솟을삼문은 정조대왕의 혼백이 드나드는 곳이다. 그런데 그 앞에 무대를 설치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도 죄스러운데, 저렇게 살을 대 내 놓은 여자들이 저 앞에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춤을 춘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후손으로서 낯이 뜨거워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동안 화령전 앞 무대공연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어르신들의 이런 우려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화령전이라는 곳이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신 곳이라면, 이곳 무대에 공연을 올릴 때는 좀 더 생각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다. 생태교통을 찾아 온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이제 일주일 남짓 남은 생태교통. 앞으로도 화령전 앞 무대에 몇 번의 공연이 남아있다. 그 앞 솟을삼문 앞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도, 이런 점은 감안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지켜야 할 것은 있기 때문이다.

 

전국의 글께나 쓴다는 실력자들이 모였다. 97()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2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원고지를 받아들고 여기저기 흩어진다. 수원시인협회(회장 김우영)가 주관하는 4회 정조대왕 숭모 전국백일장의 모습이다. 이 행사는 수원시가 주최하고, 수원문화재단, 경기시인협회, 경기일보가 후원을 했다.

 

화성행궁은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혜경궁홍씨(사도세자가 의황제가 된 후 혜경궁홍씨도 의황후가 되었다)의 묘인 융릉에 전배하기 위하여 행행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이다. 정조 13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대왕은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화령전은 정조대왕이 승하한 뒤 순조 1년인 1801년에, 행궁 곁에 건립하여 정조대왕의 진영을 봉안한 곳이다. 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령전 안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의 앞쪽에는 악공들이 제사를 지낼 때 연주를 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에는 세 곳의 계단이 놓여있다.

 

정조대왕을 기리며

 

오후 2시가 조금 넘어 시제가 발표되었다. 시제는 <자전거>, <100년 후>, <화령전>이었다. 아마도 생태교통 수원2013’ 기간이기 때문에 그 상징인 <자전거>를 시제에 포함시킨 듯하다. 열심히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아마 화령전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시제에 백일장이란 제목이 있어 검색을 하는 듯하다.

 

 

백일장에는 오후 1시가 조금 넘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행궁 앞 안내소에는 연신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바쁘게 움직인다. ‘100명 정도가 모일 듯해요라고 오전에 시인협회 김우영회장이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시간이 되자 그 배가 되는 사람들이 백일장에 참가를 한 것이다.

 

초등학생부터 일반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화령전 여기저기 흩어져 글을 쓴다. 풍화당 안에도 찾아들었다.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의 뜰에도, 사람들은 열심히 시어(詩語)를 떠올리기 위해 고민을 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장원은 제가 차지해요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학생이 보인다. 중학교 1학년이라는 남자아이는 진지하게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 보인다. 시제를 무엇으로 잡았느냐고 물으니, 화령전이라고 한다. 화령전이라는 제목은 어린학생이 감당하기에는 조금 어려울 듯하다. 잘 쓸 수 있겠느냐고 몰었더니, 이 학생의 대답이 걸작이다.

 

 

장원은 이미 제가 맡아놓았어요. 저는 그동안 전국 백일장에서 여러 번 수상도 했고요.” 이 학생의 자신감이 도가 지나치는 듯하지만, 그런 자신감이 있다는 것이 대견하다. 그만큼 어려운 시제를 갖고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부인 듯한 한 사람은 연신 검색을 한다. 무엇을 검색하느냐고 물으니까, 자전거를 제목으로 잡았는데, 생태교통에 대한 검색을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2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제4회 정조대왕 숭모 전국 백일장. 한 낮의 햇살이 아직도 따가운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저마다 열심히 글을 적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누가 장원을 차지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가를 했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는 한 학생의 말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집안에 늘 혼자 있는 것이 무료하다고 하였더니, 누군가 새를 키우면 정서에도 좋고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다고 하면서 새집을 하나 선물한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새집을 받고나니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디. 그냥 새집이 아니고 작품으로 만든 새집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 새집 이름이 ‘자경당의 새소리’ 라고 한다.

 

혜경궁은 정조대왕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말한다. 젊은 나이에 비명에 횡사한 남편을 떠나보내고, 아들인 이산을 보면서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아마 정조대왕이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곳 화성 행궁에서 베푼 것도, 어찌 보면 한양 성 내에 있는 궁궐에서 한다는 것이 부친으로 인한 아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혜경궁홍씨를 기리는 자경당의 새소리

 

‘자경당’이란 이름은 정조대왕이 즉위하면서 그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커다랗게 집을 짓고 ‘자경당’이라 이름을 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자경이란 자친, 곧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웃어른이 되는 여성에게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종 4년에 자경전이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비로소 경복궁에 자경전이 자리를 잡았다. 고종 때 자경전이 완공될 무렵에는, 이곳에서 고종이 정무를 보는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고종 10년 12월에 큰 불이 나서, 그 일대 건물들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 화재 직후 곧 다시 지었으나, 1년 반쯤 뒤인 고종 13년 11월에 또 불이 나서 타버렸다. 이렇게 자경전이 잦은 화재로 소실이 되자, 고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간 뒤에 자경전을 다시 지었다.

 

자경전은 44칸 규모로 서북쪽에는 필요할 때만 불을 때서 난방을 할 수 있는 침방인 복안당이 있다. 그리고 낮 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쪽의 다락집인 청연루로 구성되어 있다. 둘레에는 행각 수십 칸과 일각문들이 있다. 자경전 후원에는 십장생 무늬를 새긴 굴뚝이 있는 담과, 서쪽의 꽃담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담이다.

 

 

보물 제810호 십장생 굴뚝을 담아 내

 

자경전에 있는 보물 제81호인 십장생 굴뚝은 담의 한 면을 한 단 앞으로 나오게 하여 전돌로 조성하였다. 굴뚝 벽면 중앙에는 십장생 무늬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했다. 무늬의 주제는 해, 산, 물, 구름, 바위, 소나무, 거북, 사슴, 학, 불로초, 포도, 대나무, 국화, 새, 연꽃 등이다.

 

둘레에는 학, 나티 불가사리, 박쥐 당초무늬 등의 무늬를 조성하였다. 해, 바위, 거북 등 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 나티 불가사리 등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이다. 굴뚝 윗부분 역시 모양을 낸 벽돌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꼭대기에는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인 연가를 10개 올려놓아 연기가 잘 빠지도록 하였다.

 

 

수를 놓아 만든 새집인 ‘자경당의 새소리’

 

사실 이 새집은 새를 키우도록 만든 것이 아니고,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영동시장 2층에 자리한 아트포라 입주작가인 김춘홍 작가가 직접 천에 10장생 수를 놓고, 그것을 새집에 배접을 한 후 칠을 했다. 새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화려해, 이곳에 새를 키우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이런 새집을 선물로 받아놓고도 고민이다. 이 새집에 새를 사다가 키워야 하나? 무료하다고 해서 새를 키운다면 그 또한 번잡할 것만 같다. 요즈음은 혼자 조용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답사를 떠나고, 그런 것들이 더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행궁동 일대를 돌면서 땀을 흘리고, 저녁이 되면 사진정리에 기사를 쓰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그런 것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싶기도 하다.

 

작가의 마음이 담긴 새집 ‘자경전의 새소리’. 이젠 저 아름다운 새집에다가 마음의 새를 한 마리 키워보아야겠다.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은 재위 24년간 총 66회의 행행을 하였다. 이는 1년 평균 약 3회 정도를 행행을 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의 행행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묘소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하였다. 1789년에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칭하고,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원을 참배하였다.

 

<원행정례>에 의하면 정조대왕이 현릉원으로 원행을 할 때는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수원 현릉원의 원소재실까지의 지명과 행궁, 교량 등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밑에 2행으로 지역 경계나 지역간의 거리를 기록해 놓았다. 이 원행정례에 의하면 시흥로의 경우 전 노정의 길이는 83, 교량 24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위로부터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에 도착함을 알리는 파발.왕의 행행시에 나열되는 깃발, 말을 타고 맨 앞에서는 경기감사

 

능행차반차도의 재현

 

324() 수원 화성 행궁일대는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바로 능행차반차도에 기록된 8일간의 화산릉 행차가 재현이 된 것이다. 수원 화성 행궁 앞에서 1년 동안 펼쳐지는 화성행궁 상설한마당이 시작되는 날에 이루어지는 어가행렬로 인해, 주변은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이 어머니인 경의왕후(=혜경궁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가 묻힌 화성 현릉원을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능행차반차도는 정조대왕화성행행반차도또는 화성행차도라고도 한다. 반차도란 궁중의 각종 의례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위로부터 훈련대장, 백마를 탄 정조대왕, 행행에는 상궁과 나인들도 함께 한다 

 

1795년 음력 윤 2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이루어진 정조대왕의 화성 행차에는 어머니인 경의왕후를 비롯하여 두 누이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동행하였다. 그 외에 우의정인 채제공을 비롯하여 문무백관과 나인, 호위군사 등 6천명이 동원되었다. 정조대왕의 능행차반차도에는 이들 가운데 1,779명의 사람과 말 779필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파발 뒤에 이루어진 어가행렬

 

24일 이루어진 어가행렬은 연무대에서 화성 행궁까지의 길지 않은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행렬 또한 약식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장엄은 그 적은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당시의 모습을 기억해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먼저 말 4필이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에 행차함을 알리는 파발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위로부터 혜경궁홍씨의 가마, 행궁으로 향하는 전조대왕 행차, 행궁 앞에 이른 정조대왕을 맞이하는 장용외영의 무사들

 

많은 인원이 생략되기는 하였지만, 반차도의 순서대로 행행이 이루어졌다. 길가에 늘어선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카메라와 휴대폰을 꺼내 어가행렬을 찍기에 바쁘다. 정조대왕이 화성 행궁 앞에 도착하자 장용외영의 무사들이 먼저 정조대왕을 맞이하고, 뒤이어 유수가 정조대왕을 안내해 행궁으로 거동을 한다.

 

격쟁으로 백성을 사랑한 정조대왕

 

격쟁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임금의 행행 중에 징을 치고 나아가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는 행위이다. 정조대왕의 행행 중에는 총 3,355건의 상언이나 격쟁을 처리하였다. 이는 한 번의 행차 중에 평균 51건의 민원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상언이나 격쟁은 조선 후기 왕들이 모두 허용한 일이지만, 정조대왕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 만큼 정조대왕이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 준 임금이었다.

 

 위로부터 억울한 사연을 임금에게 고하는 격쟁, 신풍루를 통과하는 고취대, 신풍루를 들어서는 정조대왕  


격쟁을 마친 정조대왕이 행궁 앞에 고취대를 앞세우고 도착을 하자, 화성 행궁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신풍루의 솟을삼문 중 중앙문을 통해 정조대왕이 입궁을 했다. 비록 적은 인원에 짧은 거리였지만, 정조의 어가행렬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수원만이 갖고 있는 자랑거리인 정조대왕의 능행차. 수원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이 시대의 문화콘텐츠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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