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부리성, 이름까지도 생소하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성이기에 사적으로 지정이 되었을까? 정읍을 답사하면서 내심 고사부리성을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성은 고부리의 한 편 산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성을 들어서는 입구에 안내판이 없어, 몇 번이고 길을 물어 길을 찾았다. 좁은 길목으로 올라가니 대나무 밭이 보인다.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산1-1 일원에 있는 고사부리성은 해발 132m의 성황산 정상부 두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성이다.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축성이 되어 통일신라 때 개축되었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영조 41년인 1765년 읍치가 이전되기까지 계속적으로 활용되었던 성곽이라고 한다.

사적 제494호 정읍 고사부리성
 

토성으로 남아있는 고사부리성

고사부리성은 조선시대 전기까지만 해도 돌로 쌓은 석성이었다고 한다. 조선조 후기에 토성으로 개축이 된 성곽으로 둘레는 1,050m이며, 지표조사 및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문지 3개소, 집수정, 조선시대 건물지 12개소가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상부상항인’이라는 인각와, 기마병의 선각와편, 통일신라시대의 <本彼官> 명문와 등 다량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고사부리성은 잔존상태가 양호한 다양한 유구와 유물 등이 발굴이 되어, 우리나라 고대 산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북문 터에서 출토된 '상부상항(上部上巷)' 명의 도장이 찍힌 기와는, 공주, 부여지역의 백제유적이나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인각와 등과는 다르게, 수도를 5부로 나누고 각 부를 다시 오항으로 나눈 '오부오항‘의 표시를 한 장방형 모양의 도장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대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는 고사부리성 길

마을 입구에 차를 대고 천천히 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대나무 숲을 지나 위로 올라가니, 해발 132m의 산이라고 해도 한 여름 더위에는 숨이 차다. 길은 비로 인해 여기저기 파여 있고, 길가에는 누군가 대를 잘라 놓았는지 대나무가 길을 막는다.

백제의 한 축이었을 고사부리성

숲이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는 곳을 지나니 갑자기 앞이 환하게 트인다. 앞에는 석성임을 알 수 있는 비탈진 곳이 보인다. 좌측으로는 성을 관리하는 듯한 건물 한 동이 보이고 안내판이 서 있다. 사적 제494호로 지정이 된 성이다. 그 위 성곽의 가운데가 잘록한 것을 보니 이곳에 문지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성곽 위로 오르니 저 아래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성 위에 오르면 밑으로 마을이 보인다. 성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리 높지 않은 것만 같았던 성이다. 그런데도 시야가 확 트여 있는 것이, 이곳이 성의 기능을 충실히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 여기저기에는 주추로 쓰였을 돌들이 흩어져 있다. 북문지에는 석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나, 성을 돌기에는 넝쿨로 인해 불가능 하다.

백제 때 처음으로 축성을 한 후 조선조 영조 때까지 기능을 다했다는 고사부리성. 그저 어느 마을 뒤편 동산에 쌓여진 흙더미 정도로 보이는 이 성은 학술적,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재이다. 어디를 가나 수많은 문화재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말로만 하는 문화사랑과 문화민족이기 보다는, 단 하나의 정신적인 행동으로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인지. 고사부리성을 내려오면서 입구정비라도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건물의 주추였을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이다. 전봉준은 1854년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전창혁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전봉준을 그리는 소리 ‘새야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불러본 노래다. 음률이 처량하기도 한 이 노래는 전봉준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난 뒤 순창으로 피해 다시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김경천 등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한성부로 끌려간 전봉준은 1895년 3월 30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는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하고 난 뒤,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하지 못하고, 양반들의 세를 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음을 한탄하는 소리이다.


조촐한 초가에서 세상을 바로잡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마을 한편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조금 안쪽에 초가로 지은 집이 보인다. 고택지에는 살림채 한 동과 헛간 채 한 동이 있을 뿐이다. 지난 날 어려웠던 살림살이가 느껴지는 집이다.




살림채는 전봉준이 살던 집으로 조선조 고종 15년인 1878년에 지어졌다. 4칸의 - 자형으로 지어진 살림채는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 방인 골방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골방 앞으로는 바람막이 벽이 있고, 그 앞에는 한데 아궁이를 두었다. 큰방과 윗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달아내고, 마루 끝에는 부엌과 연결이 되는 문을 달았다.

살림채 앞에 있는 헛간채는 측간과 헛간으로 사용이 되었으며, 두 칸으로 되어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의 훈장 일을 맡아하면서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그저 어느 양반집 하인들의 방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허름한 가구 몇 가지가 놓여있고, 천정은 서까래와 흑이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다.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부재도 모두 인근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그러한 나무들을 이용했다.

부엌은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은 조개무덤이 가득하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부자가 될 징조라고도 했다. 집 뒤에는 장독대가 있고, 물길을 낸 골방 뒤로는 물길 위로 지나는 연도와 굴뚝이 서 있다. 연도와 굴뚝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집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설치하고 과중한 물세를 징수하는 등, 각종 명목으로 수탈을 일삼자 고종 31년인 1894년 1월, 말목장터에서 조병갑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고 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집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오니 우물이 보인다. 지금은 장방형 돌을 이용해 우물주변을 잘 정비를 해놓았다. 전봉준의 고택 우물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아직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조소마을 주민들이 사용하던 공동우물이다.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녹두장군. 지금은 이렇게 집과 우물만이 남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한 인물을 기억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민초들의 아픔은 채 가시지를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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