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하나가 고을의 운세를 바꾼다'고 하면 그런 허황된 말이 어디 있느냐고 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있는 정자 군자정은, 고을의 운세를 바꾸는 정자로 알려져 있다.

 


  
군자정의 현판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군자정은, 고부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주변이 집들로 싸여 있어, '이 정자가 무슨 고을의 운세를 바꿀만한 대단한 정자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그저 평범한 마을 안에 있는 정자의 모습일 뿐이다.

 

이 고부정은 주변을 둘러 파서 연못 안에 작은 섬을 만들고,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 넓지 않은 정자마당에는 각종 비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그 중 눈길을 끄는 것들은 반 토막이 된 비석들이다.

 


  
군자정은 주변을 파서 연못 가운데 자리한다. 돌 다리를 건너야 정자로 들어갈 수가 있다.


  
군자정 주변에는 토막이 난 비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이 군자정의 원래 이름은 '연정(蓮亭)'이었다고 한다. 정자의 주변이 연못이고 온통 연꽃들이 피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땐가 군자정(君子亭)이라고 바뀌었는데, 연꽃이 '꽃 중에 군자'라고 많은 사람들이 칭송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군자정이 왜 마을의 운세를 바꾼다고 전해지는 것일까?

 

이 군자정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조선조 현종 14년인 1673년에 고부군수 이후선이 이 정자가 황폐해져 인재가 나지 않는다고 하자, 연못을 파내고 정자를 새로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자는 그 이전부터 있어 왔고, 황폐가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400년 이상이 된 유서 깊은 정자다. 연못을 정비하고 난 뒤에 홍백색 연꽃이 자생 하게 되고, 그때부터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 뒤 두 차례 중건을 해서 오늘에 이르는 이 군자정이다.

 


  
군자정은 가운데 방을 두고, 우편은 마루 위로 누각식의 높은 마루를 만들어 놓았다


  
방의 좌측 마루도 조금 높게 만들어 놓았다. 세심한 배려를 한 정자이다.

 

지금은 주변 연못이 그저 정자를 겨우 감싸고 있을 정도다. 아담하게 지어진 군자정은 가운데 방을 두고 있다. 우편은 마루 위로 누각식의 높은 마루를 만들어 놓았다. 뒤편에는 여닫이문을 달아 주변 경치를 볼 수 있게 하였다. 높은 곳에서 연못을 둘러보기 위해서인가 보다. 좌측에는 마루보다 조금 높게 단을 만들어 역시 문을 달았다. 그저 평범한 듯한 정자지만, 하나하나 세심한 배려를 한 정자다.

 


  
조선조 현종 14년인 1673년에 고부군수 이후선이 이 정자가 황폐해져 인재가 나지 않는다고 하자, 연못을 파내고 정자를 새로 고쳐지었다


  
전면을 제외한 삼면을 문으로 처리를 해 주변 경관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를 둘러보다가 혼자 피식 웃는다. '고부마을에서 요즈음은 장원급제를 하는 사람들이 나오지를 않겠구나'하는 객쩍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군자정 한편 처마 밑에 커다란 스피커가 달려 있다. 아마 마을에서 무엇을 알리기 위해 사용을 하는 스피커인 것 같다. 저 스피커가 군자정에 달려 시끄러우니, 장원급제자가 나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혼자서 수많은 곳을 답사를 하면서 생긴 이상한 버릇이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이런 버릇들이, 십년 넘게 답사를 다니면서 어느 새 버릇으로 굳어버렸다.

 


  
인재를 배출헤 마을의 운세를 바꾼다는 군자정

 

한때는 마을의 운세를 뒤바꿀만한 정자로 유명세를 탔던 군자정. 이제는 그 화려하게 피었던 연꽃의 잔치도 줄었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던 옛 기운도 사그라진 듯하다. 그러나 저 조졸하기만 한 군자정이, 언제 또 다른 인재를 배출할지 기대를 해본다. 이런저런 사유를 갖고 있는 것이 정자이기 때문에.

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26호 김동수 가옥. 호남 부농의 상징인 이 가옥은 김동수의 육대조인 김명관이, 정조 8년인 1784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흔히 아흔 아홉 칸 집으로 불리는 김동수 가옥은 해수로 따지면 230년이 되었지만, 이 가옥은 아직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우리 고택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문화재로 꼽히고 있다.

 

청하산을 배경으로 앞으로는 정읍의 젖줄인 동진강의 상류인 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김동수 가옥의 특징은 대문채인 바깥사랑채, 사랑채와 중문채, 그리고 안채와 아녀자들이 외부의 여인네들과 만나서 담소를 즐기는 안사랑채가 별도로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담 밖으로는 노비들이 묵는 '호지집'이라고 하는 집이 여덟 채가 집 주위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중 두 채만 남아있다.

 

 

김동수 가옥을 둘러보면 참으로 대단한 가옥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서 65m, 남북 73m의 장방형 담장을 둘러 그 안에 건물을 지었다. 한 채의 가옥이 이렇게 넓게 자리를 한 집은 많지가 않은 점도 이 집안 부의 내력을 알만하다.

 

'호지집'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김동수 가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담밖에 자리한 호지집이다. 솟을대문을 약간 비켜서 한 채가 있고, 담 밖 전후좌우에 모두 여덟 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두 채만 남아있다. 호지집이란 말은 생소하다. 김동수 가옥을 방문하기 전에 수많은 고택을 답사했지만, 호지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호지집은 노비들이 기거를 하던 집이라고 한다. '호지(護持)'란 수호하고 지켜낸다는 소리다. 이 호지집을 단순히 노비집이라고 설명을 하기에는 적당치가 않다. 단순히 노비였다면 무엇 때문에 전후좌우에 두 채씩 배분을 해서 지었을까?

 


  
김동수 가옥의 담장 밖에 있는 여덟채의 호지집은 노비집이라고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비가 아닌 사병이 묵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아마 생각해보건 데 이 김동수 가옥의 규모로 보아 지역의 부농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많은 곳간과 헛간들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 많은 양의 곡식과 재물이 있는 김동수 가옥은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재물을 지키기 위해 사방에 집을 짓고, 집을 수호하는 역할을 준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기에 단순히 노비집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호지가(護持家)>라고 했을 것이다. 즉 이 호지집에 묵는 노비들은 일을 하기 위한 노비이기보다는, 집을 지키는 경계의 업무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호지집에 사는 사람들은 기실 노비가 아닌, 노비로 가장한 김동수 가옥을 지키는 사병(私兵)이었을 확률이 더 크다.

 

대문채와 마주한 사랑채는 전국에서 단연 으뜸

 

김동수 가옥은 행랑채라고 부르지 않고 대문채, 혹은 바깥사랑채라고 부른다. 행랑채에도 많은 손님들이 묵었다는 설명이다. 주인을 찾아오는 외부의 손님을 행랑채에 묵게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므로, 바깥사랑채 혹은 대문채라 한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솟을대문 좌우에 담을 쌓아 건물로 사용을 했으며, 담장에 나 있는 대문을 들어서면 좌, 우측에 곳간과 마굿간 방, 대청 등이 자리한다. 곳간의 넓이로 보아서도 이 집의 부(富)가 상상이 간다. 대문채를 들어서 우측에 마굿간 등이 있으며 꺾인 북쪽에 있는 칸에도 방을 두 칸 두고 있다.

 

  
대문채의 동편부분이다. 마굿간과 방 들로 꾸며져 있다. 행랑채라고 하지 않고 바깥사랑채라고 부른다.

 

이 대문채와 마주한 사랑채야 말로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건물 중 단연 최고이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一자형 평면이다. 높은 기둥에 세워 방은 두 칸과 뒷방 한 칸을 꾸몄다. 부엌과 안창고라 불리는 내고(內庫)가 있는 외는 전부를 마루로 만들었는데 보기에도 시원한 양청으로 꾸며 멋을 더했다.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만든 장대석의 기단 위에 올려놓은 사랑채는, 김동수 가옥이 얼마나 집을 짓는데 있어 방위와 멋을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전국에서 보이는 많은 고택 중, 김동수 가옥의 사랑채를 단연 으뜸으로 치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김동수 가옥의 사랑채는 고택의 사랑채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이 사랑채에는 재미난 점이 하나가 있다. 바로 사랑채에 붙은 방이다. 사랑채의 방은 ㄴ자 형태로 3칸의 규모이다. 이 세 칸 중 앞에서 보이는 2칸은 어른이 사용을 하였고, 뒷방 한 칸을 아들이 사용하였다. 뒤쪽 방을 아들이 사용한 까닭은 안채의 며느리가 사용하는 건넌방과 동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동선이 사당 쪽에 담장을 낀 좁은 통로로 이어진다. 이 길을 지나면 건넌방의 뒤편이 나오는데, 툇마루를 놓아 뒷문으로 방을 드나들 수가 있다. 집안사람들의 눈을 피해 젊은이들이 정담을 나눌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 김동수 가옥의 최고의 멋이란 생각이다.

 

마주한 안채와 중문채의 비밀

 

김동수 가옥의 특징은 집들이 서로 마주하고 앉았다는 점이다. 대문채와 사랑채가 마주하고, 중문채와 안채가 마주한다. 중문채는 모두 11칸으로 지어졌으며 양편을 꺾어 날개채를 달아냈다. 이 중문채는 집안의 여자하인들과 어린자녀의 공부방, 안변소와 곳간 등으로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특징은 사랑채와 대문채도 그러하지만, 중문채와 안채도 방이 서로 마주하지를 않는다.

 

대문채와 중문채의 방을 놓는데 있어, 조금은 비켜서 방을 놓았거나 꺾인 부분에 방을 들여 놓았다. 중문채는 안 변소, 헛간, 곳간에 이어 내외벽이 있는 두 칸의 중문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헛간과 곳간이 계속되다가 아홉 칸 째에서 꺾이어 북쪽으로 부엌과 방이 두 칸 이어진다.

 

  
집안 곳곳을 담장으로 막고 일각문을 내어 통행을 하도록 하였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길게 ㅡ자로 늘어선 중문채의 중문을 지나야만 한다.

왜 이렇게 방을 놓는데 있어 주인과 하인의 방을 마주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아마 두 가지의 의미가 있으리라고 본다. 하나는 주인의 신분이 하인과 마주 할 수 없이 높다는 뜻일 테고, 또 하나는 밑에 사람들이 마주하면 불편할 것을 감안해 조금 비켜나도록 방을 들였을  것이란 생각이다.

 

중문채와 마주하는 안채는 집안의 여주인이 거주하는 것이다. 이 안채는 ㄷ자형으로 지어졌는데 양편 꺾인 부분에 부엌을 달아낸 독특한 방법을 썼다. 안채는 가운데 6칸을 대청으로 조성을 하였다. 이 안채 역시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김동수 가옥의 중요 건물 중 하나로 그 멋을 더했다. 대청의 양 끝에 방을 두고 대청의 뒤로는 큰 문을 내어, 뒤뜰의 경계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김동수 가옥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멋스러움을 지닌 안채. 양편 날개채에 부엌을 들인 독특한 형태이다.

출가한 딸이 해산을 하기 위해 친정에 오면 이곳에서 몸을 풀기도 하고, 찾아온 여인들이 묵기도 했다.

김동수 가옥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안채의 서남쪽에 자리한 안사랑채다. 사랑채는 주로 남주인이 기거를 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이지만, 이 안사랑채는 안주인을 찾아오는 여인들이 하루 유숙을 하기도 했지만, 출가한 딸이 해산을 하기 위해 친정에 오면 이곳에서 몸을 풀었다고 한다. 결국 사랑채보다도 더 안채를 중시한 가풍을 느낄 수가 있다. 이 안사랑채는 입향조인 김명관이 본채를 지을 때, 그 자신과 목수들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남향으로 지어진 이 안사랑채는, 一자형으로 정면 5칸, 측면 한 칸 반이 되는 규모로 지어졌다.

 

  
담장 안에 있는 집들 중 유일한 초가집인 외측

한 때는 가을에 수확한 벼가 1200섬이 넘었다고 하는, 부농의 상징인 김동수 가옥. 2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원형 그대로를 유지한 채 지켜낸 집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건물과 건물을 담으로 막고, 일각문을 내어 출입을 도운 김동수 가옥. 99칸의 대부호의 집답게 여기저기 둘러볼 것이 많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난 동선을 따라 이동을 하면서 괜히 혼자 가슴을 설레 본다. 그 곳에 기다리는 여인이 있지도 않건만. 

 

정자(亭子)는 아름답다. 정자라는 것은 대개가 세도하는 사람들이나, 동계(洞契)모임 등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다가 짓기 때문에, 주변과 어우러진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의 절경에는 많은 정자가 있고, 그 정자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몇 년간 정자 기행을 하면서 참으로 아픈 역사를 가진 정자를 만났다. 갑오농민혁명의 현장을 취재하면서 보니 두 곳의 정자가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정자가 있으나, 이곳은 오래전에 세운 것이 아니라고 해도 뜻이 깊은 곳이기에 더욱 마음에 닿는다.

 

 

그저 그곳에 있어야 할 만석정

 

그 중 하나는 이평면 예평마을에 있는 만석정이다. 만석정은 갑오농민혁명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던 곳이다. 만석보터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좌측으로 안길수의 만석보혁파비가 서 있다. 만석보혁파비는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을 한 조병갑이 만석보를 만들고, 농민들에게 무리한 조세를 수취한 장소이다.

 

배들평야의 농민들은 이것에 불만을 품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는데, 이것이 갑오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그 후 광무 2년인 1898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가 만석보를 완전히 혁파시켰다. 농민들은 그 뜻을 감사히 여겨 9월에 만석보혁파비를 세웠다.

 

만석정은 그 혁파비 바로 곁에 서 있다. 그저 단청도 하지 않은 정자. 그리고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수수히 서 있는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농민들의 정감어린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 정감어린 마음속에는, 1894년 갑오농민혁명을 일으킨 끓는 피가 있어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드는가 보다.

 

 

갑오농민혁명의 장서에 선 말목정

 

또 하나의 정자는 바로 정읍시 이평면 면사무소 곁에 있는 말목정이다. 말목정은 만석정과는 달리 단청이 되어 있고, 잘 가꾸어진 모습이다. 말목정은 원래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110호인 말목장터와 감나무 곁에 서 있었던 것을, 70m 정도를 옮겨 현재의 자리에 지어 놓았다. 말목정은 삼강오륜의 정신 계승과 실천으로,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기 위한 뜻을 갖고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의 말목정은 원형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으로, 2002년 7월에 이전하였다.

 

말목정은 옮겨지기 전에 감나무 곁에 서 있었다. 이곳은 1894년 1월 전봉준 선생이 농민군수 천명을 모아 놓고, 고부군수 조병갑의 비리와 포악한 실상에 관해 일장 연설을 한 곳이다. 전봉준 선생은 이곳에서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말목정은 그러한 곳에 1994년 지어진 정자이다.

 

전봉준 생가

 

고부농민혁명의 자리에 선 두 곳의 정자. 아름다운 곳에 서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목정과 만석정은 깊은 뜻을 갖고 있다. 비록 그 서 있는 곳이 장터 앞과 만석보터 앞이긴 하지만, 어느 정자보다도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갑오농민혁명을 찾아 떠난 길에 만나 두 곳의 정자. 정자 위에 오르니 감회가 새롭다.

 

지난날의 피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아이 두서넛이 모여 맴을 돌며 뛰어다닌다. 그래, 그곳에서 너희 선조들은 피를 흘리며 이 땅과 삶을 지켜내었으니, 너희들이야 말로 그렇게 뛰놀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느냐? 앞으로 또 너희 중에 누가 이곳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이곳을 근거지로 농민운동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한 해의 끝자락이 가까워 오는 날에 만난 정자, 높다란 하늘에 뭉게구름 한 덩이가 한가로운 날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을 말한다.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서원은 려말선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서재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서재는 학문을 연마하던 곳인 데 비해, 서원은 학문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현을 모시는 사묘로서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향교에 비해서 서원은 그 규모 등에서 작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각처에 산재한 서원에는 어린 학동들이 학문의 터득을 위해 모여들었다. 서원은 대원군 때 전국에 있는 것들이 대부분 헐리게 된다. 아마도 서원철폐령이 내리지 않았다고 하면, 지금보다 몇 배나 되는 서원이 남아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계절이 배어있는 곳, 거북이와 대면하다.


정읍시 북면 보림리에 위치한 남고서원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그저 별다르지 않은 이 남고서원은 가을이 배어 있는 곳이다. 남고서원은 호남의 성리학자인 이항과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천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조선조 선조 10년인 1577년 처음으로 세워져 숙종 11년인 1685년에는 사액서원으로 선정이 되었다.


사액서원이긴 하지만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고종 8년인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헐리고 말았다. 그 후 김천일의 후손들이 1899년에 다시 세웠다. 이항의 문집목판을 소장하고 있는 남고서원은 현재는 이항, 김천일을 비롯하여 김점, 김복억, 김승적, 소산복 등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있다.


손을 맞는 두 마리의 거북이가 반기다.


가을이 되면 서원의 담 안에 가을빛이 아름답다는 남고서원. 외삼문을 들어서 뒤를 돌아보면 괜한 웃음을 짓는다. 문을 잠구는 빗장걸이가 두 마리의 거북이가 대신하고 있다. 그저 '별것이 아니다'라고 돌아설 수도 있겠지만 괜히 눈길을 끌고 싶은 것인지. 좌측 거북이는 머리를 쥐어박았는지 무엇이 보기 싫었는지 머리를 졸아들었다.

 

 


외삼문 곁 작은 쪽문도 재미있다. 돌담 사이에 난 쪽문은 그저 어른 한 사람이 통과할 만하다. 마음을 넉넉히 먹지 않으면 짜증이라도 날만한 그런 크기다. 왜 이렇게 작은 협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을까? 아마도 자신을 이렇게 작게 내려놓으란 소리인가 보다. 남고서원이 재미있는 모습들이다.


가을빛이 아름다운 남고서원


올봄과 지난가을 두 차례 남고서원을 찾았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면 서원 강당건물이 있고, 뒤로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서 있다. 서원의 뒤로는 이항 등의 위패를 모신 문경사가 자리하고 있다. 봄에 찾아갔을 때는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고 기억을 한다. 하지만 가을에 찾아가는 남고서원의 멋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들이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우수수 떨어지는 노랑 은행잎들이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것이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그런 가을 정취를 느끼며 글을 읽는 학동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작은 시골에 소재한 서원이지만 이 남고서원이 왜 철폐령에서까지 제외가 되었는지, 나름대로 수긍이 간다.


유난히 서원이 많은 정읍이다. 아마 그만큼 이곳은 양반들이 선호하는 지역이었을 것이다. 곡창지대인 이곳에 모여들어 자녀들을 교육시키려다보니 그만큼 많은 서원이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서원의 존폐를 떠나 노랑 가을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를 찾아본다는 것은 어느 때 찾아갈 것인가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남고서원이야 말로 가을 은행잎이 물드는 시기에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올 가을, 서원에 은행 빛이 아름답게 물이 들 때, 다시 한 번 여정을 잡아야겠다.

양반들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조선조 말의 장시는 한 때 전국적으로 상당한 숫자가 개설되어 있었다. 『만기요람』에는 19세기 초 우리나라의 장시는 8도 327개 군, 현에 1,061개의 장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장시 숫자가 인구수에 비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장시의 숫자가 많은 것은, 지금처럼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근에 있는 장시를 이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임원경제지』를 살펴보면 순조 30년인 1830년에는 전국에 1,052개의 장시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장시가 조선조 말에 들어서는 단순히 장의 기능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물교환을 하던 조선조 말의 장시

 

조선조 말의 장시의 형태는 금전을 이용한 거래보다는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이 서로 물건을 갖고나와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는 물물교환의 형태로 거래가 되었다. 이 당시의 장시에는 비슷한 처지의 민초들이 모여서 양반들을 비판하거나, 나라의 정책에 대한 불신을 토로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양반들의 수탈과 과도한 조세 등에 불만을 품던 민초들은 이러한 불만이 쌓이다가 보면 장날과 장터가 집회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즉 장시가 장의 기능 외에도 정치적 기능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장시는 집회의 장소와 정치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곳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발상지이다. 양반들의 무리한 조세포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군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 기념관에는 조선조 말의 장시를 소개하고 있다. 테마인형으로 처리한 이 장시의 모습은, 전시실 1층 <19세기 조선과 자각하는 농민들>이란 주제로 전시가 되어있다.

 

인형으로 만들어 놓은 당시의 장터 모습이 재미있다. 한편에서는 삿갓을 쓴 사람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삿갓을 쓴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양반에 대한 비판을 하거나, 사람들을 계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많은 장시에서는 집회가 빈번히 일어나기도 했다. 그 중에는 유관순열사가 만세운동을 일으킨 아우내장(병천)도 있다.

 

 

 

이렇듯 장시의 기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에서 그치지를 않았다. 물론 장이라는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가 보니, 가장 손쉽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고를 알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장시이다. 당시의 장시의 형태를 보면 민초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장시의 기능은 다양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시에서는 그 기능도 다양했다. 우선 장시의 기능은 ‘중매터’이기도 했다. 서로 5일마다 한 번씩 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기 마을의 사람들을 소개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중매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예전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대개는 이 장터의 중매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한 가지는 장시는 ‘정보통’이었다는 점이다. 장시를 떠도는 장돌뱅이나 보부상들에 의해 팔도의 정보가 장시로 흘러들게 된다. 큰 점포를 가진 대상들이 상대적으로 정보에 밝아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전국의 장시에 자신의 사람들이 다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장시의 흐름에 빠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장시는 이제는 ‘전통시장’ 혹은 ‘재래시장’이라는 명칭으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이 전통 장시의 인심 하나는 그 어느 곳도 따를 수 없다. 그것은 오랜 세월 장시의 인심이기도 하다. 걸인들까지도 사람취급을 해주는 곳. 그것이 바로 장시였다. 동학농민기념관에서 만난 장시의 모습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