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수’의 ‘아리’는 아리랑을 말한다. 그리고 ‘수(樹)’는 나무이다. ‘아리랑나무’라는 뜻을 가진 아리수는, 아리랑을 뿌리삼아 한국음악을 꽃피우는 나무가 되겠다는 의지로 태동이 되었다. 아리수는 토속민요 발굴과 보급에 앞장섰던, 1984년 창립된 단체인 ‘민요연구회’의 맥을 이어 2005년에 창단이 되었다.

 

이들은 그동안 2007년도에 발행한 제1집 음반인 ‘아리랑 나무를 심다’와, 2010년 제2집 ‘아리랑 나무에 꽃피다’를 제작하여 많은 찬사를 받았다. 민요가 이 시대에 삶을 노래하고, 상생의 음악이기를 꿈꾸며 활동을 하고 있다는 여성민요그룹 ‘아리수’. 년간 약 80여회의 공연을 하는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소리단체이다.

 

 

 

속요는 민초들의 감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소리

 

우리가 흔히 ‘속요’라고 하는 소리는 자연적이고 순차적인 전승방법에 의해서 전해진다. 현장에서 작업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소리이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부르는 속요는 정형화되지 않은 소리를 말한다. 그런 소리를 정형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이, 바로 ‘아리수’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속요는 작업의 현장이나 창자가 다르면, 그때마다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에 따라 하기가 힘들다. 그런 속요를 정형화시킨 민요는 누구나 같은 사설, 같은 음으로 부를 수 있어 전승이 수월하다.

 

 

 

지난 해부터 경기문화재단의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원 소재 화성박물관(관장 이달호)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던 아리수는 올해 2년차 상주단체로 지정이 되었다. 아리수에 거는 기대가 큰 것은, 이들이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접목을 시도하며 늘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다양한 장르를 접목시키는 아리수의 공연

 

아리수는 2005년에 창단하였다. 2009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천차만별콘서트’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2010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을 하고, 예비사회적 기업으로 지정이 되었다. 2011년에는 전문예술법인으로 지정을 받았으며, 2009~2012년에는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수원화성박물관 상설공연 ‘국악꽃피다’ 기획, 주관하여 16회의 공연을 가졌다.

 

 

 

 

수원 화성 박물관 상설공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은 ‘국악 꽃피다’는 2009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국악 꽃피다는 지역 문화의 발전을 위해 수원 화성박물관과 (사)아리수가 기획 주관하는 상설공연이다. 아리수는 이 공연을 하면서 상주단체 아리수의 신규 프로그램 개발 및 공연프로그램의 다양화를 꾀하고 민요의 대중화에 기여함은 물론, 공연장의 활성화와 관객개발. 수원화성박물관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올 12월 21 ~ 23일에는 정조와 수원 화성을 배경으로 한 소리극 ‘팔달전’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2012년 한 해 여성민요그룹 아리수는 단독기획공연인 소리극 팔달전과 해설이 있는 민요 콘서트 ‘아리랑 톡톡’과, 아리수 콘서트 ‘가·무·악’을 선보인다.

 

 

 

또한 공동기획공연으로 무대에 올리는 ‘국악 꽃피다’와 ‘색소폰 성벽을 울리다’, 직장인 록 밴드 공연 등도 준비하고 있다. 2012년 여성민요그룹인 (사)아리수의 더 많은 공연을 무대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 1756번지에 소재한 <충주조동리지석묘>. 아파트를 연상케 하는 이 지석묘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이 되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흔히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러한 고인돌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고인돌이 충주 조동리에 소재하고 있다.


불교와의 접목으로 탑과 같은 형태

충주 조동리의 지석묘는, 조동리 탑평마을 중심부에 위치하며 민가에 둘러싸여 있다. 이 고인돌은 3층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여러 개의 자연석을 고임돌로 사용하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조동리 고인돌은 인근에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조동리 선사시대 생활유적과 인접하고 있어, 중원지방의 청동기시대 생활문화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그런데 이 고인돌이 처음부터 이렇게 3층으로 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이런 형태의 모습은 후에 어떤 계기에 의해서 또 디른 모습으로 변형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지방의 고인돌과 달리 덮개돌 위에 평면 타원형의 돌을 올려놓아 3층의 탑과 같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조동리 지적묘.



아랫단의 덮개석은 그 크기가 450×350×100cm의 커다란 돌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를 굄돌을 이용하고 또 다시 2층을 더 올려놓았다. 덮개돌 위의 2층은 본래 고인돌 축조와는 시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불교 전래 이후 탑의 모습을 모방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고인돌과 불교가 결합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독특한 양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희한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워

조동리 지석묘가 언제 이렇게 변형된 모습으로 바뀌었는가는 정확히 시기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마을을 ‘탑골’ 또는 ‘탑평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마을의 이름도 이 고인돌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바둑판식 고인돌로서 3층 구조의 특이한 외부구조를 갖추고 있는 조동리 고인돌.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며, 청동기시대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학술 자료가 되고 있는 이 고인돌은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처럼 3층으로 올려쌓은 특이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탑골마을 고인돌. 문화재답사는 이런 재미가 있어, 늘 설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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