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의외의 모습에 가끔은 놀랄 때가 생긴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 국보나 보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자리한 송광사. 송광사에는 모두 네 점의 보물이 있다. 한 절에 이렇게 많은 보물을 소유하고 있는 곳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선사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인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지금은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사찰 중 한 곳으로 번성하였다.


십자각으로 지어진 특별한 종루

송광사에는 십자각으로 지어진 누각이 있다. 흔히 종루라고 이야기하는 이 누각은 열십자로 축조를 하였다. 이층형 누각으로 지어진 이 전각은 범종이 걸려있는 중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각 한 칸씩을 덧붙였다. 지붕 역시 중앙에서 한 곳으로 모여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2월 23일, 퇴근을 하고 부리나케 송광사로 달려갔다. 수차례나 찾아간 송광사지만, 늘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송광사로 달려간 것은 종각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송광사에 있는 소조사천왕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보물로 지정된 소조사천왕상은 일반적인 전각과 달리 문을 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왜 십자각이 눈에 걸리는 것인지. 일몰시간이 다되었다는 것에 마음이 바쁜데도, 종각에서 발길이 멈추고 말았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 북, 운판을 각각 돌출된 곳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대웅전 방향으로 돌출된 남은 한 칸에는 전북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동종을 두었다.

누마루 밑의 기둥이 자연일세.

송광사 종각에서 보이는 여유로움은 바로 이층 누마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목조 기둥으로 마련을 한 이 기둥은 중앙 칸을 중심으로 각 면에 두 개씩의 기둥을 두고, 열십자로 빠져나온 곳마다 다시 2개씩의 기둥을 놓았다. 어느 방향에서 보던지 한 방향에는 4개씩의 기둥이 나열이 되었다.



그런데 이 기둥을 보다가 손바닥을 쳤다. 그렇게 몇 번을 보았는데도 새로운 것을 보았다. 그동안 아마도 별 신경을 쓰지 못한 듯하다. 그저 종각이 아름답다는 것만 알았지, 그 종각의 면면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만 했다. 이제 보니 그 기둥들이 각양각색이다.

어느 기둥은 원형으로, 또 어떤 것은 사각형으로 되었다. 밑에 바친 주추도 모두 제각각인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을 하였다. 누각을 조성할 당시 이만한 절에서 보기 좋게 조형을 한 주추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기둥도 자연에다 받친 주추도 자연이다. 송광사 종루는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현란한 조각이 돋보이는 종각

조선시대에 지어진 전각 중에 유일한 십자각이라는 송광사 종루. 처마 밑으로는 익공과 포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종각 위로 올라가보니, 그곳에서 바라다보는 주심포, 주간포, 귀포 등 일일이 명칭을 열거하기조차 힘든 모습으로 눈을 현란케 만든다. 아마도 이렇게 복잡한 건축기술로 인해 송광사 종루가 유명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사천왕상을 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다시 일깨운 종각의 모습에 넋을 놓아버린 문화재 답사. 그래서 문화재 답사는 시간을 정할 수가 없다. 만나는 문화재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다가 보면, 시간이 가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새로운 눈을 떠갈 때마다, 조금 일찍 시작하지 못했음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12월 11일 답사 첫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남원을 출발하여 인월을 거쳐 실상사가 있는 산내면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실상사로 가다가 보면 일성콘도 입구 못 미쳐, 냇가 옆에 정자가 서 있다. ‘퇴수정(退修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525에 소재한 퇴수정의 앞으로는 만수천의 맑은 물이 흐른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5호인 퇴수정은 조선 후기에 벼슬을 지낸 박치기가 1870년에 세운 정자이다. 박치기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벼슬에서 물러나 수양을 하기 위한 정자라는 뜻으로, ‘퇴수정’이라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정자는 단청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단아한 모습 그대로 앞으로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고 있다.


1870년 박치기가 심신 단련을 위헤 세웠다는 퇴수정.
 
사각형 주추를 놓은 정자

퇴수정은 만난 처음부터 마음에 든 정자이기도 하다. 정자를 찾아 내려가는 길에는 ‘개인소유의 땅이니 출입을 금지한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러니 어찌하랴, 길을 돌아 냇가로 내려가는 수밖에. 앞으로는 암석을 타고 넘으며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에는 몇 그루의 노송이 가지를 내리고 있다.

12월 초겨울에도 이렇게 운치가 있는 곳이라면, 한 여름 이곳을 찾았다면 아마 감탄이 절로 나왔을 것만 같다. 장대석 기단을 쌓고 한편으로 정자로 오르는 계단도, 장대석 돌로 놓은 것도 특이하다. 정자 가까이 가서보니 주춧돌이 모두 사각형이다. 이런 것 하나에도 많은 공을 들여서 지은 정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장대석 돌로 계단을 놓고, 네모난 주추를 사용했다.

돌계단을 밟고 정자에 오르니, 측면과 뒤편으로는 커다란 암벽이 둘러있고, 만수천을 흐르는 물은 소리가 맑기만 하다. 정자는 누마루를 깔고 중앙 뒤편으로 판자로 두른 방을 한 칸 마련하였다. 원래 문이 없었는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절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슴 가득 시원함을 느끼게 해준다. 정자 앞을 가로지른 노송의 가지는 금방이라도 냇물로 들어설 것만 같다.


정자 앞을 흐르는 만수천과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수많은 편액이 정자의 운치를 더해

정자에는 여기저기 벽면마다 수많은 편액이 걸려있다. 아마 어느 정자를 가보아도 이렇게 많은 편액이 걸린 곳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만큼 퇴수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마 이 12월의 초겨울. 글이라도 좀 쓸 줄을 알았다면, 나라도 한 두 어자 적고 가지 않았을까?

정자 안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찬바람이 옷깃 안으로 파고들지만, 그 바람이 대수랴. 이렇게 아름다운 운치를 더하는 정자에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다본다. 저 맑은 물에 세상에 찌든 마음을 훌훌 털어내어 씻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청정한 마음을 갖고 돌아갈 것인가? 그렇게 할 수 없음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누마루를 깔고 뒤편에 판자방을 들였다. 수많은 편액들이 벽에 걸려있다.

갈 길이 멀어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 이럴 때는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저 이곳에 몇 시간이고 서서 흐르는 물에 마음을 적시고 싶다. ‘그래 오늘은 돌아가자. 하지만 내년 꽃피는 시절에는 반드시 이곳을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가는 발길을 붙잡는 여울진 곳으로 흘러드는 물소리가, 유난히 높게만 들린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청아한 젓대의 소리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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