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다양한 문화재에 관련된 영상을 제작해 올리는 ‘헤리티지 채널’에서 영상 제작을 한다고 해서 함께 답사를 나가보았다.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쓰는 사람을 소개하는 <러브人 문화유산>이라는 코너에, 소개가 된다는 것이다.

이번 촬영을 하면서 그동안 20년 가까이 전국을 돌며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문화재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 남들은 그런 나를 두고 ‘미쳤다’라고 곧잘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그 ‘미쳤다’ 라는 표현이 그리 듣기 싫지가 않았다. 스스로도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늘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사적 파사성 / 2009, 10, 18 답사

‘힘들다’ 느낄 때에 채찍질이 되다

사실 요즈음은 힘들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모든 여건이 점점 그렇다.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체력적으로도 많이 떨어진다. 역시 세월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그래도 아직은 ‘팔팔한 청춘’이라고 말은 하지만, 남몰래 저려오는 팔다리는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

촬영 중에 프로듀서가 묻는다. ‘왜 문화재 답사를 하는 것인가?’를. 그렇게 질문을 하면 딱히 대답을 찾지 못하겠다. 왜? 라는 질문이 참 낯설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문화재 답사가 ‘왜’가 아닌, ‘당연’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적부터 그렇게 당연히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문화재 답사는 일상이요, 당연이다. 답사를 하지 않으면 도대체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렇게 돌아다녔는데도, 돌아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 그렇기에 늘 마음이 조급하다.

나에게 문화재 답사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겨울에 찾아간 수옥폭포 / 2010, 2, 15 답사

나는 왜?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한다. ‘문화재 답사란 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이라고.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석불이며, 탑, 마애불 등을 돌아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문화재는 과거 선조들과 나를 연결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 생명이 없는 돌과 바위, 그리고 나무들과 스스로 대화를 하면서, 지금의 내가 과거의 선조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난 답사를 할 때마다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왜'가 아닌 '당연'이라는 해답을 찾는다.

내가 선조들에게 묻는 것이 바로 ‘왜?’이다. 왜? 무슨 마음으로 이것을 조성하였을까? 왜? 그 오랜 세월을 이렇게 피땀을 흘린 것일까? ‘왜’는 바로 내가 만난 문화재에게, 그리고 그것을 조성한 낯모르고 이름 모를 선조들에게 묻는 말이다.

그 왜는 때로는 엉뚱한 해답을 가져오기도
한다. 물론 그 해답이라는 것이, 나 스스로의 답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문화재로 인해 선조들과 이야기를 한다. 그 안에서 왜? 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재는 바로 남의 것이 아닌 우리 것

문화국가, 문화재사랑. 참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저 마음으로나마 문화재를 소중하게 알아야한다는 생각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그러나 과연 마음으로나마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아마 다만 몇 사람만 있어도, 그 마음들이 모아지면 상당한 힘을 가질 것이란 생각이다.

단종이 귀향길에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여주 골프장 안에 있다) / 2009, 11, 11 답사 

문화재가 국가소유, 지자체소유, 아니면 개인소유일까? 아니다. 그것이 비록 법적인 주인은 국가나 지자체, 혹은 개인일지 몰라도, 그것은 남의 것이 아닌 바로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하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한다. 혹 우리 것이니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멍청이 같은 생각을 하지는 말자. 우리 것이기에 소중히 보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재 답사. 아마 그런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했다면, 벌써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내가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오늘도 짐을 싸들고 길을 나선다.


‘아이패드2’를 이용해 문화재 답사를 나가보았다. 6월 7일 오후 전주에 일이 있어 나가는 길에, 아이패드를 지참했다. 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문화재답사를 하던 나로서는, 일보 진전을 했다고 보아야할까? 아니면 현대문명의 이기를 갖고 또 다른 것을 느끼고 싶어서일까? 여러 가지 의미로 아이패드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아직은 낯설기 만한 아이패드2를 이용해 답사를 한다는 것은, 나에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동안 답사를 하면서 몇 번이고 산을 헤매다가 굴러 떨어져, 몇 대의 카메라가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하기에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 아이패드를 이용해, 편안하게 산을 탈 수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아이패드2'를 이용해 촬영한 오수리 석불입상

산에서 걸어 내려 온 ‘오수리 석불’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550번지에 소재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인 오수리 석불. 오수면 오수리 관월마을 뒷산 밑에 서 있는 이 석불은, 약 삼백년 전부터 마을의 수호신처럼 마을을 굽어보고 우뚝 서 있다. 이 석불이 이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 석불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마을의 한 아낙네가 어느 날 뒤쪽 산을 바라보니, 큰 집 채만한 바위덩어리가 걸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낙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저것 좀 보라고 큰소리를 치니, 이 아낙네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바위가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소리에 놀라 쫓아와 보니, 커다란 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하체가 땅에 묻혀있다

사람들은 이 바위가 석불인 것을 알고 난 후부터, 서로 불공을 드리고 관리에 정성을 쏟아오고 있다. 사람들은 만일 이 석불을 아낙이 조금 늦게 발견해 마을 뒤 산 쪽에 멈추지 않고 마을 앞까지 나와 자리를 잡았더라면, 이 마을이 더욱 융성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의 자손들이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라 전한다.

그 후 오랜 세월 눈, 비, 바람을 맞고 외로이 서있는 석불을, 이 마을주민인 최경태가 움막 같은 집을 만들어 주었으며, 다시 약 100년 전 쯤 진안 마이산에 거주하던 이갑용처사가 꿈에 이 석불이 나타나 ‘내가 옷을 벗고 있으니 집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하므로, 다시 개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전각은 없고 보호철책만 주변을 둘러놓았다.



아이패드2로 촬영을 해보았다. 선명도는 떨어진다
 
고려시대 지방장인의 솜씨로 조성된 석불

현재 오수리 석불의 하체 부분은 땅에 묻혀 있다.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어, 옆에서 보면 한쪽 면은 완만한 타원을 이루고 있으며 불상이 조각된 면은 약간 볼록하다. 광배의 위는 배처럼 끝이 뾰족하며, 불꽃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돋을새김을 한 석불은 민머리 위에 작은 상투 모양의 소발이 솟아 있다. 얼굴은 역삼각형이며 귀는 길게 표현되어, 어깨까지 닿을 듯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어깨에서 몸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데, 어깨 폭은 1.4m이고 땅에 접한 부분은 1m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가슴 밑에서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아래 소매 자락은 양손을 마주잡고 옷으로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볼록하게 표현되었다. 무릎 아래 부분이 땅 속에 묻혀있어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성된 석불로 보인다.



산에서 스스로 걸어내려 왔다는 오수리 석불. 아마도 세상이 하도 보기가 답답해 산을 벗어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아간 오수리 석불 앞에는, 먼저는 보이지 않던 토굴하나가 생겨났다. 그리고 불사를 준비하는지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비바람에 석불이 더 이상 마모가 되지 않도록, 전각이라도 하나 지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패드2' 휴대가 간편하고 사진촬영과 동영상이 가능해 답사를 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기능을 익히지 못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화질은 그리 좋은편이 아닌 듯하다. 좀 더 기능을 익히고나면, 또 다른 세계를 접할 수 있으려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흔히 절 입구를 들어서면서 무시무시한 사천왕을 만나게 된다. 대개는 ‘사천문(四天門)’이나 ‘사천왕문(四天王門)’ 등의 현판을 달고 있는 곳에 있는, 사천왕상이다. 이 ‘사천왕’ 혹은 ‘사대천왕’이라고 부르는 사천왕은, 그 외에도 ‘사왕’ 혹은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부른다. 세상을 보호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천왕은 사방을 뜻하는 것으로, 동방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자리한다. 또한 남방에 ‘증장천왕(增長天王)’이 있으며, 북방에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을 각각 배치한다. 사천왕은 두 분씩 모시기 때문에 한편에는 동방과 북방, 그리고 남방과 서방을 한편에 모신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모셔져 있다.

송광사는 사천왕문이 아니고 사천왕전이다. 문을 달아 전이라는 표현을 한다.

해질녘에 달려간 송광사

2월 23일, 5시가 넘어서 길을 나서 달려간 송광사. 바쁘게 움직였지만 사천왕을 모신 전각의 문을 닫아걸려고 한다. ‘잠깐만요’를 외치면서 쫒아갔다. 헐떡거리면서 ‘사진 몇 장만 찍고요’ 라고 소리를 치면서 급하게 사진을 찍어댄다. 고맙게도 일부러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 분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나왔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 길을 묻고는 제대로 차에서 내려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갈 길을 재촉하다가 보면 예의를 제대로 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것이 늘 마음이 아프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소재한 송광사의 사찬왕상은 소조사천왕상이다. 소조란 흙으로 상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보기에도 커다란 이 소조사천왕상은 보물 제125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사천왕상은 크기 면에서도 압도를 하고 있지만, 색을 입힌 모습이나 그 조성이 뛰어나다. 몇 번인가 들린 송광사인데도, 오늘 따라 사천왕상이 달라 보인다. 그동안 자세히 살피지 않았음을, 속으로 반성을 해본다.



사천왕전에 대웅전을 보고 들어서면 우측에는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자리한다. 지국천왕은 칼을,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었다. 다문천왕의 팔을 복구 중이다

문을 달아 낸 전각 사천왕전

완주 송광사는 사천왕을 모신 곳을 천왕문으로 하지 않고, ‘천왕전(天王殿)’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천왕문이 여닫는 문이 없는데 비해, 송광사는 여닫는 문이 있어 ‘문’이 아닌 ‘전’으로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그 조성연대가 적혀있다는 것이 가치를 더욱 높인 것으로 보인다.

서방을 지킨다는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년인 1649년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적혀있다. 또한 왼손에 얹어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인 1786년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조성연대가 확실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은, 어느 것보다도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는 갖는다.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모셔져 있다. 증장천왕은 용과 보주를 잡고 있고, 고아목천왕은 보탑을 손에 들고 있다

사천왕은 악귀를 쫒는 힘을 갖고 있다.

사천왕상을 보러 달려갔는데 대웅전을 향한 우측 안 편에 있는 천왕상을 흰 천으로 가려놓았다. 북방 다문천왕의 팔이 훼손이 되어,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자연적인 훼손이 될지를 모른다. 그나마 사람들이 애써 보존을 하지 않는다면, 한 해에도 수많은 문화재가 우리 곁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한쪽 팔을 가린 북방의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조성한 동방의 지국천왕은, 팔을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다리 옆의 악귀는 상의를 벗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굵은 띠를 왼쪽 옆구리에 걸쳐 두르고 있다. 남방의 증장천왕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다. 용은 팔뚝을 한번 감아 올라가고 있다.

서방의 광목천왕은 오른손을 들어 깃발을 잡고 있는데, 왼팔을 올려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놓았다. 이 보탑은 1786년에 새롭게 조성을 해서 올려놓은 것이다. 사천왕상의 다리 쪽에는 악귀들이 있다. 이 악귀들의 형태도 각각 다르다. 이런 악귀의 모습으로 보아, 사천왕은 불법과 불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상의 발밑에는 악귀들이 있다.

지은 죄가 커서 그런가?

사람들은 절에 가면 사천왕상이 제일 무섭다고 한다. 흔히들 농담 삼아 ‘지은 죄가 커서 그런가봐. 그 앞에만 가면 괜히 기분이 이상한 것이’라는 말도 한다. 그러나 정작 사천왕은 사람들을 보호하는 신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스스럼없이 사천문을 드나들지만, 처음에는 옆으로 돌아다녔다. 아마 당시 나처럼 답사를 하는 사람이 있어 설명이라도 해주었다면, 좀 더 편하게 드나들었을 것을.

겨우 문을 닫는 것을 막아선 채로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섰다. 다음에 복원이 다 끝난 다음에는 초라도 한 자루 켜야겠다는 생각이다.

전북 남원시 왕정동 482-1에 소재한 사적 만복사지. 만복사지 한편에는 전각이 한 채 있다. 이 전각 안에는 보물 제43호인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만복사지를 세 번이나 찾아갔는데, 이상하게 이곳을 찾을 때마다 해가 떨어질 시간이다. 그래서 항상 전각 안에 있는 석불입상의 사진은 늘 그늘이 드려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만복사 절터 전각 안에 서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 정도의 석불입상이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창건된 사찰인데, 이 석불입상도 창건 당시 조형된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만복사에는 동쪽에 5층의 전각, 서쪽에 2층의 전각이 있고, 그 안에 35척의 금동불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창건 당시 만복사의 사세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손과 발이 없어진 채 발견돼

이 석불입상은 민머리의 정수리에 상투 모양의 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다. 얼굴은 자연스럽게 살이 오른 타원형으로, 눈과 코, 입의 형태가 자연스러워 원만한 인상을 보여준다. 법의는 둥근 칼라와 같은 독특한 옷깃이 보인다. 신체의 굴곡은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며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유려하게 처리하였다. 11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의 뛰어난 작품이다.

이 석불입상은 발견 당시 발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었으며, 광배도 후에 발견이 되었다. 최근 묻혀있던 부분을 들어내고, 깨어진 광배도 복원작업이 이루어져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 석불입상은 오른팔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팔은 아래로 내려서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이 석불입상의 얼굴은 원만하게 조형이 되었으며, 목 뒤에는 칼라와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끼울 수 있도록 제작된 손은 사라져버렸다.

석불입상의 뒤편에 붙인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되어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머리광배에는 활짝 핀 연꽃잎과 연꽃줄기가 새겨져 있고, 몸광배에는 연꽃줄기만이 새겨져 있다. 바깥쪽으로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작은 화불을 새겨 넣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뒤편에도 선각이 된 불상을 새겨

손과 발이 사라진 만복사지 석불입상. 얼굴 부분에서도 눈 부분이 조금 손상이 되었으며, 끼울 수 있도록 제작된 팔이 보이지가 않아 불편해 보인다. 아마 팔과 다리가 제대로만 있었다고 해도, 이 석불입상의 가치는 더 있었을 것이다. 발밑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팔각형의 납작한 돌을 놓고, 그 뒤에 연꽃으로 장식한 둥근 돌을 얹었다.


받침돌과 광배에 새겨진 화불
 
이 석불입상의 뒷면에도 선각으로 처리한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불상은 한 손에 약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불로 추정이 된다. 이렇게 바위의 양편을 이용한 석불의 조형은 매우 드문 형태이다. 두 손이 사라진 만복사지 석불입상. 그 손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름다움을 위해 손을 끼울 수 있도록 제작한 석불입상이, 오히려 두 손을 잃는 계기가 되었나 보다.



뒷면에 선각처리한 불상은 약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불로 추정한다.

이번 답사에도 석양에 그늘이 드리운 석불입상을 찍는 바람에, 제대로 된 사진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실력이 있는 블로거라면 당연히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어 내었겠지만. 그저 자료 정도를 찍는 실력밖에 없으니 어찌하랴. 다음에는 오전에 찾아가 보아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 그늘을 길게 끌며 만복사지를 떠난다.

 

진천군 지역을 답사하다가 답사하는 중에, 길가에 서 있는 아주 작은 전각이 하나 눈에 띤다. 앞에는 오래되어 바란 안내판 하나가 서 있다. 곁에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가 그래도 이 전각이 역사적인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무슨 전각일까? 궁금한 것도 있으려니와, 이런 길가에 서 있는 전각에 우리가 모를 슬픔이라도 있을까보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775-1에 해당하는 작은 전각. 앞으로는 사석삼거리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우측으로는 청주와 오창으로 향하는 17번 도로이고, 좌측으로는 진천읍과 진천IC로 나가는 21번 도로이다. 전각 앞으로 가니 ‘일문사충(一門四忠)’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말 그대로 한 집에서 네 명의 충신을 배출했다는 뜻이다.



쇠스랑충신의 충혼을 배우다


사각형으로 마련한 전각에는 일문사충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그 안에는 충신들의 정려가 걸려있다. 위와 아래로 두 개의 정려에 걸린 4명은 바로 이 지역에서 충혼을 불태운 분들이다. 조선조 영조 4년인 1728년에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청주와 진천을 함락시키고, 이지경이란 자가 자칭 진천현감이 되어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때 사석리에 거주하던 김천주는 이들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동생 천장과 아들 성추, 그리고 조카 성옥 등이 마음을 합해, 이인좌의 무리들에게 대항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무기도 없이 이인좌의 무리들과 혈전을 벌였다. 맨손으로 싸울 수는 없는 일이라, 쇠스랑과 괭이 등으로 무장을 하고 진천을 탈환하기로 했다.





이인좌는 남인의 명문출신이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남인들이 정계에서 소외된 것을 불만을 삼은 이인좌는 남인명문가들의 후광을 업고,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728년 3월 15일 이인좌는 스스로 대원수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에 이르러 도순문사 오명항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패하였다.


이 와중에 진천에서 이지경이란 자가 스스로 현감이라 칭하고 백성들을 괴롭히자, 동생과 아들, 숙질과 힘을 합하여 반란군을 섬멸하자고 뜻을 모은 것이다. 쇠스랑과 괭이 등으로 무장을 한 이들은 진천을 탈환하기 위해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족으로 패배하여 모두 전사를 하였다.


네 분의 충혼 앞에 머리를 숙이다.


정려에는 위편 우측에는 <충신 가선대부 김천주 지려>라 쓰고, 그 옆으로는 <충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김천장 지려>라고 적혀있다. 형제가 나란히 정려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뒤 늦게 이들의 충심을 알게 된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향제케 하였다. 그 뒤 고종 22년인 1885년에 아들 성추와 조카 성옥도 정려를 내려 함께 병정케 하였다.





밑의 정려에는 우측에 충신 김성추를, 좌측에는 김성옥을 배향하였다. 일문에서 네 명의 충신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것을 알려주는 작은 전각이다. 이 전각은 안내판에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화재 지정은 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어디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야만 소중한 것일까? 이 네 분의 나라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마음이란 생각이다.


길가에 서 있는 외로운 작은 전각하나. 쇠스랑과 괭이를 들고 무장을 한 반군들과 혈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죽음을 당한 이분들의 그 충정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새롭게 조명을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이 땅 한 귀퉁이 한 뼘이라도, 이런 충혼들의 뜨거운 피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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