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을 돌다가 보면 동문인 창룡문 성벽에 이름이 각자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독은 누가 했으며, 석수는 누구, 그 외에 몇 명이 참여를 했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실명제로 성을 쌓았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성역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기록을 해 두었다는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 적힌 기록을 보면 심지어 어느 지역 출신 아무개가 언제부터 어디서 일을 했는지, 또 임금은 얼마를 받았는지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단 한 명이라도 소홀히 대하지 않았던 정조의 애민주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적은 것은 팔달문과 화서문에도 보인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을 한 화성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2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때문이었다. 돌 하나 목재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록을 해 놓았으며, 일일이 그림을 그려 설명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당시에 누가 얼마를 받았는지도 꼼꼼히 기록을 해 놓았다.

 

화성을 돌다가 보면, 성을 쌓은 형태가 여러 가지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각 구간마다 성을 쌓은 사람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랜 세월 풍화에 지워져 알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성벽의 기록으로 보아, 모든 장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축성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머릿돌에 해당하는 회사명을 적어놓듯, 그렇게 책임자들의 성명을 기록한 것이다.

 

 

 

 

밥숟가락의 숫자까지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화성을 쌓을 때 필요한 돌과, 벽돌, 목재, 각종 철물, 일꾼들을 먹일 식량과 땔감, 자재를 나를 수레와 우마, 공사를 기록할 지필묵, 단청에 들어가는 물감은 물론, 가마니와 땔감, 숯, 노끈, 공구, 석회 등 화성성역의궤에는 위와 같은 물자들 외에 밥숟가락, 항아리, 사발, 됫박, 저울, 주걱, 싸리 비, 솥, 가마니 등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의 세세한 항목과 수량, 단가, 구입처 등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화성성역의궤의 제5~6권은 ‘재용(財用)편’으로, 여기에는 화성 성역에 사용 된 각종 물품의 종류와 수량, 성곽과 각 부대시설별로 소요된 물품의 내용 과 단가가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화성축성 공사에 들어간 총 공사비용은, 물자와 인건비 등을 합쳐 모두 87만3천517냥7전9푼이 소요됐다고 적고 있다.  

 

 

 

2달만 일을 하면 초가집을 한 채 살 수 있어

 

정조는 화성 성역을 하면서 각 처에서 올라온 인부들에게 꼬박꼬박 임금을 지불했을 뿐 아니라, 인부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 해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다. 또한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기록에 의하면 화성 축성 및 신도시 조성공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전국의 백성들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수원에 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특명이 각 지방관들에게 하달될 정도였다고 한다.

 

화성의 축성시 장인들에게 지급된 품삯 총액은, 12만8735냥4전3푼이었다. 이 가운데 석수에게 지급된 금액이 7만3164냥으로 52.3%를 차지했고, 미장이에게 2만4419냥7전으로 19%, 목수들에게는 1만3381냥으로 10.4%, 대장장이는 1만745냥8전7푼으로 8.3% 등의 순이었다.  

 

전문 기술자들인 장인 외에 잡역부인 ‘모군(募軍)’에게 지급한 돈이 11만7520냥 8전7푼이었으며, 목재나 돌을 운반하는 ‘담군(擔軍)’에게는 5만8561냥5전7푼이 지급되어 축성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지급된 총 품삯의 액수는 30만4817냥8전4푼에 달했다. 화성 축성에 쓰인 목재와 석재 등의 총액이 39만201냥1전1푼임을 감안하면 일꾼들에게 지급된 품삯의 비중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때 성인 잡부 하루치 품삯이 대략 2전5푼이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축성 예정지에 있던 집들을 사들이면서 후한 값을 지불했는데, 북리 지역에 살던 송복동이라는 사람의 5칸짜리 초가집을 수용하면서 15냥 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부들이 당시 5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려면 집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2개월 정도 잡역을 하면 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화성이 딴 성과는 달리 치밀하고 아름답게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실명제와 함께 임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냥 겉도는 화성이 아니라, 화성을 하나하나 보아가면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에 소재한 칠장사는 국보와 보물 등을 소유한 고찰이다. 이 칠장사 대웅전 옆에는 보물 제983호인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이 입상은 원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다시 현재의 칠장사로 옮겨서 보관을 하고 있다.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인 63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고찰이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인 칠장사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이 되어있기도 하다.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은 원래 ‘아미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이 산 아래 아란야를 짓고 기도를 하던 차에, 선량치 못한 7인이 찾아와 교화가 되었다고 하여 칠현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고려 초기 작품

 

현재 보물 제98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여래입상은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의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이다. 현재 대웅전 좌측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눈과 코, 입은 심하게 닳아 제 모습을 판가름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얼굴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비교적 식별이 가능하다. 양 어깨에 걸친 법의는 어깨를 감싸 며 밑으로 흘러내린다. 옷 주름은 여러 겹의 U자형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가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다.

 

 

 

 

석불의 형태는 비교적 비례가 원만한 편이며, 전체적인 신체표현에 있어서 손이 다소 큰 편이다. 하지만 머리와 어깨의 너비 등의 신체비례가 비교적 좋은 편이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를 조각하였는데, 두광과 신광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신광으로 표현을 하였다.

 

지방의 특징을 보이는 봉업사지 석불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보면 중앙의 문화재와 지역의 문화재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앙의 기능이 뛰어난 석공들이 참여하여 조성한 석불이나 탑 등은 그 화려함이나 섬세한 조각이 뛰어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지방의 석공들이 조성을 한 석불이나 탑 등은 나름대로의 지역적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당당한 어깨와 발달된 신체표현, 그리고 U자형의 옷주름 등과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안성지방 인군의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지방은 그 지방 나름의 기능공들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조성을 하기 때문에, 그런 점을 잘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받침돌의 표현이 두드러져

 

받침돌은 아래받침돌과 위바침돌로 구분이 되어있다. 위 받침돌은 둥글게 조성을 하고 조각을 하였는데, 심하게 마모가 되어 조각을 잘 알바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아래받침돌의 문양으로 볼 때 위받침돌에는 꽃과 구름 등을 새겨 넣었을 것 같다. 또 이 위받침돌이 심하게 훼손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도 정확지가 않다.

 

 

 

아래받침돌은 문양이 그대로 살아있다. 밑으로 된 넓은 앙련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새겨 넣었다. 이렇게 연꽃잎에 꽃을 사긴 것은 흔히 볼 수 만날 수가 없다. 아래받침돌의 위부분은 돌출을 시켜 그 곳에도 8장의 꽃잎을 가진 꽃을 돌아가면서 조각하였다. 이 받침돌 하나만 보아도 당시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이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제 자리를 떠나 안성 칠장사 대웅전 옆에 서 있는 봉업사지 석불입상. 우리의 많은 문화재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 자리를 떠났다.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속으로 기원을 한다. 앞으로는 이렇게 제자리를 떠나는 문화재들이 없게 해달라고.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시집을 가서 살았다는 ‘궁집’을 돌아보고 난 뒤 앞 정원을 거닐다가 작은 석교(石橋) 하나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지나쳤는데, 다리를 건너보니 작은 돌다리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예사롭지가 않은 듯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작은 돌 하나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인자라, 다시 다리로 가서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이가 불과 2.5m 남짓인 이 돌다리가, 그냥 예삿다리가 아니라는 알았다.

 

 

 

하나의 돌로 조형한 돌다리

 

돌다리는 둥글게 위가 불룩하니 구름다리 형으로 조성을 하였다. 양편 다리 끝에는 각각 한 마리씩의 해태가 앉아있어, 사방에 해태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다리는 턱이지게 올려졌다. 다리의 옆부분에는 길고 넓적한 돌을 이용해 바닥을 놓고, 그 밑으로는 원형의 꽃문양을 세긴 버팀목을 질렀다.

 

그런데 이 다이가 조금 이상하다. 아무리 보아도 틈새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갖은 조형물을 조성하기는 했지만, 어디 한 곳도 틈을 발견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단단한 화강암을 갖고 참 정교하게 조형을 하였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다고 해도, 어디 한 곳이라도 빈틈은 있게 마련이다.

 

 

 

놀아운 조상들의 석재 다루는 솜씨

 

돌다리를 살펴본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놀라울 수가. 이 돌다리는 커다란 화강석 한 장을 이용해 조성을 한 것이다. 조형물을 갖다가 붙인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커다란 돌을 이용해 다리를 만들었다. 어떻게 이 작지 않은 돌다리를 한 장의 석재로 만들 수가 있었을까? 조상님들의 돌을 다루는 솜씨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긴 선조들의 솜씨에 감탄한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깎아지른 절벽에 돋을새김을 한 마애불을 보고 있노라, 서산에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적도 있었다. 부도탑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비에 새겨진 받침의 용두와 머릿돌의 꿈틀거리는 용을 보고, 흠칫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한 뛰어난 석재를 다루는 선조들이었다. 새삼 주변을 돌아본다. 여기저기 널린 석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내 위에 걸린 이 돌다리는 그것들 중에서도 눈에 띤다. 단 한 장의 석재를 깎아내어,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지금처럼 장비가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망치에 정 하나만을 갖고 이 작품을 완성했을 것이다. 이 돌다리 하나가 7월 17일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고 답사를 한 나에게, 선조들의 배려인 듯해 고맙기만 하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사극 드라마 등에서 가끔 등장하는 여인들의 정절을 지켜내는 작은 칼이 있다. 장도라고 부르는 이 칼은 여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장도는 대개 옛 상류사회에서 애용해온 일종의 작은 칼로 패도와 낭도의 복합어로 실용을 겸한 장신구의 일종이다. 장도 가운데 허리에 차는 것은 패도라고 하고,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은 낭도라고 불렀다. 장도는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경주 황남대총 북분출토의 금제과대에는 장도와 흡사한 소도가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이미 장도와 같은 개념의 도 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도는 남자들은 허리띠나 옷고름, 혹은 포의 술띠 등에 차고 다녔다. 이와는 달리 여자들은 치마허리에 걸거나 옷고름(겉고름과 안고름)에 찬다.

 

 

여자의 경우에는 호신용의 구실도 하여 부녀자의 정절을 지켜주는 상징으로 쓰이기도 했다. 특히 임진왜란(1592) 이후부터는 사대부 양반가문의 부녀자들이 순결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장도를 휴대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장도가 신분을 상징하는 표시가 되기도 해, 장도의 장식이 점점 사치품으로 변하자 연산군과 중종 대에는 장도를 금제절목으로 삼아 서민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친 장도

 

장도는 수천 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남녀의 애용품으로 자리를 잡기도 했다. 실생활에서도 사용했지만, 장식용과 호신용으로의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장도 중에서 은저가 달린 첨자도는 음식의 독을 분별하는데 사용하기도 했으니, 실생활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호신용으로 많이 애용되기도 했다.

 

 

전통장도는 그 재료에 따라, 금, 은, 동, 철, 흑단, 향나무, 대추나무, 흑각. 화각, 서각, 소뼈, 상아, 옥, 호박, 비취 등이 사용되었고, 공작석, 금강석 등도 사용되었다. 장도의 장인은 만난지가 벌써 꽤 오래되었다(2004년 9월 24일 취재). 풍기읍 동부리 507 거주하는 김일갑 장인은 장도를 만드는 솜씨가 뛰어나, 1990년 8월 9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을 받았다.

 

오직 전통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지켜 온 세월

 

어린 시절부터 금은패물공방에서 기능을 연마한 김일갑 장인은 우리 전통장도에 대해서는 남다른 식견을 지니면서 장도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김장인은 이들을 모두 다루기는 하지만 고급 호화품은 특별한 주문이 있지 않는 한, 대개 수요에 쫓아 소뼈나 먹감나무를 사용하여 대중성이 있는 제품을 만들고 있다.

 

김장인의 풍기장도는 원통형과 사각도, 육각도 등을 주로 생산한다. 장도의 모양새도 칼자루와 칼집의 머리를 바로 마무리하는 평맞배기, 대칭으로 꼬부리는 乙자맞배기, 칼집에 첨사를 끼우는 첨사도 등 세 종류가 있다. 칼집에도 남자의 경우는 누각, 운학, 박쥐, 용 등 장생문을 사용하고, 여성은 나비, 국화, 난, 매화 모양의 장식을 붙인다.

 

그리고 칼등 쪽에는 자신의 호가 들어있는 글자를 새겨 자신의 작품임을 나타낸다. 이는 자신이 만드는 장도 한 자루마다 생명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작품 하나마다 장인의 숨결이 배어있는 것이다.

 

이제는 마음의 장도를 품어야 할 때

 

장도 한 자루를 만드는 데는 모두 23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 모든 공정에 전혀 기계를 쓰지 않고 거의 원시적인 공법으로 정성을 쏟고 있어, 대개 한 자루를 제작하는데 4, 5일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요즈음 들어 장도는 그저 ‘여인의 정절’을 상징하는 것으로 표현이 되고 있지만, 실은 실생활과 호신용, 그리고 장식용 등 다양하게 시용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여인의 정절을 지켜주던 의미로서의 장도가, 그저 장식용으로 사용이 될 뿐이다. 세상이 변하면서 정절에 대한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면서 장도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한 어르신은 이렇게 말한다.

 


“장도 한 자루에 무슨 정절이 지켜지겠습니까? 그것도 옛날 이야기죠. 지금은 마음의 장도를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그것마저 없다면 참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난잡하게 변하겠죠. 모든 여성들이 마음의 장도를 품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실상사 백장암.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에 소재한 백장암은, 남원에서 실상사로 가는 길 좌측으로 가파른 비탈을 올라가면 대나무 숲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백장암은 실상사의 암자로 예전에 경작지였다는 곳에, 국보 제10호 실상사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실상사 백장암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은 정리를 하고 사람 출입을 삼가게 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석등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국보인 삼층석탑을 만나면서, 석등은 빛을 잃게 된다. 그 정교함이나 아름다움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문화재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기존의 통일신라시대의 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백장암 삼층석탑은, 가히 국보 중에 국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삼층탑의 정교한 조각 뛰어나

 

백장암의 삼층석탑은 전체가 놀라운 조각의 솜씨를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삼층석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정교한 조각은 백장암 석탑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일층의 탑신에는 신장상과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금방이라도 호령을 하며 뛰어 나올 것만 같은 역동적인 신장상이나, 곱게 단장한 보살상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이층과 삼층의 탑신은 줄어들지 않고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층의 탑신에는 사방으로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8명의 천인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삼층의 탑신에는 천인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음악으로 치유를 해주는 것만 같다. 이렇게 다양한 천인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보기가 힘들다.

 

지붕돌의 삼존상. 삼층석탑의 색다른 멋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의 탑들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형식을 탈피했다. 탑을 조성한 장인의 솜씨는 최고였고,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 탑의 특징이다. 낮은 기단 위에 올려 진 삼층의 석탑은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돌에 조각을 한 지붕돌을 올렸다는 것이 특이하다. 기단과 탑신의 고임돌에는 난간모양을 새겼다.

 

 

이 백장암 삼층석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삼층 지붕돌이다. 일반적인 지붕돌은 연꽃이나 구름 등을 새겨 넣는다. 그런데 이 탑의 삼층 지붕돌에는 각 면마다 삼존불상을 새겨 넣었다. 각 면마다 조각한 삼존불상이 있어 이 탑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탑의 어느 한 곳도 빠짐없이 조각을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해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그것이 바로 백장암 삼층석탑이 예술적으로 뛰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이지 않는 석탑

 

'백장암 석탑을 보지 않았거든 석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지 말라'

 

문화재 답사를 하러 다니는 중에 전주의 한 사찰에서 만났던 스님의 이야기다. 그만큼 백장암 삼층석탑의 조각이나, 전체적인 모습이 아름답다는 표현이다. 실제로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가 않는다.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만들어 낸 정교한 예술품이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고 해도 어찌 이러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통일신라시대 손으로만 빚어낸 걸작. 백장암의 삼층석탑을 만들기 위해 장인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다했을까? 그 앞에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렇게 땀과 정성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문화재들.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그 누구라도 우리 예술품의 높은 경지를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문화재를 보호하고 살펴야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전히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최고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