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란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조까지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립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는 향학이라고 했다. 향교는 전학후묘의 구성으로 앞에는 교육을 하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뒤편으로는 공자를 비롯한 명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인 문묘가 있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516-2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32호인 ‘정산향교 (定山鄕校)’가 소재한다. 정산향교를 세운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특한 향교 입구인 청아루

 

정산향교의 구성은 배우는 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를 비롯하여 청아루와 전사청이 있고, 제사 공간으로 공자와 우리나라 성현 27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와 그의 제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산향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많이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졌다. 현재는 봄, 가을에 제향을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정산향교의 특별한 구성은 입구에 있는 누각인 청아루이다. 목조건물로 된 향교 입구인 청아루는 아래로는 삼문을 내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형태이다. 이 청아루는 밖으로만 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쪽으로도 또 문이 있는 이중문으로 꾸며져 있다.

 

 

장맛비 속에 찾아간 정산향교

 

벌써 정산향교를 다녀온 지가 20여일이 지났다. 문화재 답사란 그 특성상 다녀왔다고 바로 글을 올릴 수가 없다. 한 번 답사를 나가면 꽤 많은 양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역과 종류가 다른 문화재들을 한꺼번에 소개한다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결국 한 번 답사를 다녀오면, 누구 말마따나 곶감 빼 먹듯 할 수밖에.

 

7월 14일 돌아본 충남 청양군. 정산향교는 답사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장맛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들이붓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그런 날 잠시 비가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정산향교 입구에 도착했다. 아무리 여름날이라고는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은 일찍 날이 저문다. 오후 5시 경이었지만, 벌써 어둑한 기운이 감돈다.

 

 

향교는 대개 그 담장 외곽에 붙어있거나, 가까운 곳에 관리를 하는 집들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주변을 돌아보아도 그럴만한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 빗속에서 사람들을 만나 묻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포기를 해야 하나? 하지만 이 빗길에 멀리 달려온 향교가 아닌가. 그냥 돌아갈 수가 없다. 할 수없이 담장 밖으로 돌아보는 수밖에.

 

수령 640년의 은행나무에게 묻다

 

전국에 있는 향교를 찾아가면 대개 고목이 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들은 향교와 그 역사를 같이한다. 은행나무는 향교의 경내에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정산향교의 경우에는 주변 높은 곳에 은행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640년에 높이는 18m, 밑동의 둘레가 5.2m가 넘는 거목이다.

 

 

은행나무 쪽으로 올라가면 정산향교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은행나무와 정산향교의 관계는 무엇일까?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향교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할 수 없이 밖에서나마 향교를 살펴보는 수밖에. 담장 가까이 다가가려니 자라난 풀들이 엄청나다. 풀 더미를 헤치고 담장 가까이 가서 향교를 살펴본다.

 

정산향교는 딴 곳과는 달리 특이하게 조성을 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성전의 경우 외담 안에 다시 내담을 쌓아 놓았다. 또 측면 담벼락에도 격자창을 내어 놓았다. 다행히 향교의 관리자가 대성전 위편 담장 밖의 풀을 깎아놓아 주변을 돌아보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장맛비 속에서 찾아간 청양 정산향교. 비록 안을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었지만, 밖으로 돌면서도 향교의 곳곳을 살펴보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향교 담장 밖을 한 바퀴 돈 다음에 차에 오르자, 다시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가을에 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었을 때,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면암 최익현 선생. 조선 말기의 대학자이며, 의병장이기도 하다. 나라를 구하고자 살신성인 한 선생은 한 때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171에 소재한 모덕사 안에 자리한 고택에서 기거를 했다. ‘중화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고택은, 1990년 4월 선생이 경기도 포천에서 ‘호서 정산’으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던 집이다.

 

이제 113년이 된 이 한옥은 당시 선생이 일제에 의해 가택연금 중에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선생은 이 집에서 많은 사람들 모아놓고 강의를 하고,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이 집에서 선생이 사신 것은 고작 6년 여. 1906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왜헌병의 감시를 피하여 야간을 틈 타 떠나신 곳이다.

 

 

전국에 남아있는 선생의 사우

 

면암 최익현선생만큼 많은 사우와 유적 등에서 모시고 있는 분도 그리 흔치는 않다. 선생은 현재 청양 모덕사를 비롯하여, 경기도 포천의 채산사, 경기도 가평의 삼충단, 전북 군산의 현충단, 전북 진안의 이산묘, 진안 마령면의 영곡사, 전북 순창의 지산사, 전북 정읍의 시산사,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호남의병 창의지인 무성서원 등에 선생의 영정과 비 등이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전북 고창의 도동사, 광주 광산의 대산사, 전남 함평의 월악사, 전남 곡성의 오강사, 전남 구례의 봉산사, 전남 보성의 모충사, 전남 무안의 평산사, 전남 화순의 춘산사 등에도 선생의 영정과 위폐 등이 모셔져 있다. 전남 신안군에는 여기저기 선생의 흔적이 보인다.

 

 

경상도와 제주도, 일본, 강원도 등에도 선생의 유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경북 울진의 아산영당에 영정, 경남 하동의 운암영당에 영정이, 제주도에는 선생의 유적비 등이 있으며, 금강산에는 선생의 글씨가, 대마도에는 순국비가 있다.

 

일본의 쌀 한 톨,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아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이곳 중화당에서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경에 나포가 되어 대마도에 구금이 되었는데,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고 버선 발 속에 조국의 흙 한줌을 넣었다고 한다. 또한 물 한 동이를 갖고 배에 올랐는데, 일본 땅으로 끌려가서는 단 한 톨의 쌀도 입에 대지 않고 있다가, 1907년 단식 끝에 순국하셨다.

 

 

면암 선생은 일본 대마도에서 1906년 11월 마지막으로 임금께 글을 올렸다. ‘유소’라는 이 글에 보면 선생의 애국충정이 그대로 배어있다.

 

‘죽음에 이른 신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에 왜놈 경비대 안에서 서향 재배하고, 황제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신이 이곳에 온 이래 한술의 쌀도 한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지라, 차마 입과 배(먹는 것)로써 의를 더럽힐 수 없어 그대로 물리쳐 버리고 단식으로 지금 선왕의 의리에 따르고 있습니다.(중략)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일이 할 수 없이 이리 되었다고 속단마시고, 큰 뜻을 더욱 굳게 하여 과감하게 용진하여 원수 왜놈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새겨, 실속 없는 형식을 믿지 마시고, 놈들의 무도한 위협을 겁내지 마십시오. 또한 간사한 무리들의 아첨을 듣지 마시고, 힘써 자주체제를 마련하여, 길이 의뢰하는 마음을 버리고, 더욱 와신상담의 뜻을 굳게 하여 실력 양성에 힘써서 영재를 등용하고, 군민을 무양하여 사방의 정세를 보살펴서 일을 꾸미면, 백성들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것입니다.(하략)‘ - 자료출처 모덕사

 

 

이등박문과 원세개도 만사를 보내와

 

면암 최익현 선생은 1907년 1월 1일에 순국하시니, 제일 먼저 이등박문이 만사로 조문을 했다고 한다.

 

‘대한 왕께 절 올리며 임을 위해 곡 하올제

흐르는 눈물 바람에 날려 온 하늘에 비가 오네.

고국명산 그 어느 곳에 임의 유택 정하올가?

그 좌향 묻지 마라 백이의 서산에서 노중연의 동해여라‘-이등박문

 

 

7월 14일 장마비속에 찾아간 청양군. 선생이 살다 가신 중화당은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조상의 위폐를 모신 영모재로 구성되어있다. 중화당의 사랑채 앞에서 잠시 집을 바라다본다. 이 집을 한 바퀴 돌면서 집에 대해 곳곳을 소개한다는 것이 새삼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그저 이곳에서 살다가 타국땅에서 순국하신 선생의 뜻에 만분지일이라도 알고 간다면, 그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을.

 

사랑채 툇마루 앞에 걸린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충효전가(忠孝傳家)’, 충과 효를 대대로 물리는 집이라는 소리이다. 아마도 선생의 그 충정을 이 한 마디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세차게 퍼 붓던 장맛비가 잠시 멈추었다. 중화당 앞 연못가에 조성한 선생의 동상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선생이 사시던 집조차 돌아보기가 죄스럽기 때문이다.

 

미쳐도 이렇게 미치면 남들은 아예 포기를 할 것만 같다. 14일(일) 오전 9시에 집을 나섰다.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인천방향으로 가다가 서해안 고속도로로 갈아탔다. 그리고 다시 당진 대전간 고소도로를 타고 가다가 예산을 거쳐 청양읍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40분. 관광안내도를 하나 받아들고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청양군까지 가기 전부터 난관에 봉착을 했다. 장마전선이 북으로 올라갔다는 말만 믿고 나선 답사 길이다. 하지만 평택에 들어서 서해안대교에 진입하자, 10m 앞도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가 퍼붓는다. 그냥 들이붓는다는 말이 적당할 정도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가는 날이 장날 맞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청양군청에서 멀지 않은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 15-37에 소재한 석조여래삼존불상. 보물인 이 삼존불상을 보기 위해 좁을 길을 몇 번이나 돌아서 찾아갔지만, 보호각 공사 중이라고 삼존불을 아예 막아놓았다. 어떻게 비집고 들여다 볼 틈도 보이지가 않는다. ‘가는 날이 장날’, 정말 딱 맞는 말이다.

 

그리고 청양군 일대를 샅샅이 비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힘들게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일반적으로 어느 지자체나 문화재 안내판이 큰길가나, 아니면 가로 안내판 등에 적혀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청양군 내의 거의 모든 문화재들은 길가에 안내판이 하나도 없다. 유일하게 도로표지판에 나타나는 것은 장곡사 등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비는 하루 종일 퍼붓고, 안내판은 찾아 볼 수 없고. 이런 답사라면 차라리 발길을 졸려버리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왕 나선 길이 아니던가? 그리고 얼마 만에 이렇게 1박 2일로 나선 답사인가? 도저히 뒤돌릴 수가 없어 빗길에 답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난 미친 문화재 답사가라네.

 

정말 그랬다. 어쩌다가 문화재를 찾다가 근처 주민들에게 문화재가 어디 있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웬 정신 나간 미친 인간이 이 장대비 속에서 문화재를 찾아왔느냐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가 있단 말인가? 조금은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고 해도, 하루 종일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답사를 계속하는 수밖에.

 

 

그렇게 몇 곳을 돌다가 보니 벌써 시간이 오후 2시가 다 되었다. 늦은 점심 한 그릇을 먹고 다시 답사를 시작했다. 향교, 고택, 석탑, 사찰, 그리고 연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모덕사’까지. 거기다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어가 있는 길과, 옛 칠갑산 고갯길에 있는 ‘콩밭 매는 아낙네 상’까지 찾아보았다.

 

저녁 6시까지 그렇게 돌아본 청양군의 문화재 답사는, 악천후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상한 눈으로 본다. 도대체 제 정신이라면 이런 장대비 속에서 어찌 문화재 답사를 할 것인가? 장곡사를 들려 나오는 곳에 장승공원을 들렸다. 갖가지 표정의 장승들이 웃고 쳐다본다.

 

 

빗길에서 얻어 낸 짐 보따리, 이젠 풀어야지

 

1박 2일 동안 참 많이도 돌아쳤다. 자료만 해도 17곳을 뒤졌으니 정리를 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하다. 하지만 이 많은 자료들을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그것을 글로 옮긴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를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다.

 

문화재답사. 그리고 그 답사를 빗길에서 1박 2일을 보내고 돌아오면서, 괜히 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고 만다. 언젠가 잘 아는 지인에게서 들은 소리가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미친 문화재답사가 한 사람이 참 여럿 즐겁게 만드네.”

 

“이 장마 통 장대비가 내리는 날 미치지 않고서야 무슨 문화재 답사람?”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난 거의 어김없이 문화재 답사를 떠난다. 그것이 어디가 되었거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그런 날 꼭 문화재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하필 장대비가 내리는 날 문화재를 보아야만 할까? 남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나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비를 맞은 문화재들은 부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선명하게 드러난 문화재들을 잘 살피다가 보면, 그동안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샅샅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맛비에 찾아간 고달사지

 

7월 12일(금) 중부지방에는 정말로 장대비가 내렸다. 그 빗속에 찾아간 고달사지.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를 찾은 것이다.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되어 있다. 아직도 발굴 중인 이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들이 소재해 있는 옛 절터이다.

 

혜목산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 처음에 절이 창건된 지 벌써 1250년이 지난 옛 절터이다. 이 절은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병화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굵은 빗줄기 속에 희뿌옇게 모습을 보이는 고달사지. 그 안쪽 한편에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있다. 탑비는 없이 귀부 위에 이수만 얹힌 모습이다.

 

바람이 날 것 같은 콧구멍과 왕방울 눈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59년에 태어났다. 90세인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인근 원주의 거돈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광종은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고 할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몸돌은 깨어져 딴 곳으로 옮겼으며, 비 몸돌에는 가문과 출생, 행적 등이 적혀있다고 한다.

 

 

몇 번이나 들린 고달사지이다. 그러나 갈 때마다 이 귀부를 보면 딴 곳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이렇게 이 귀부에 마음이 가는 것은 귀부의 모습 때문이다. 문화재를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난 이 귀부를 볼 때마다 알 수없는 힘을 느낀다. 마치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내딛을 것만 같은 발. 격동적인 발은 발톱까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

 

장맛비에 들어난 조각, 정말 장관일세

 

머릿돌인 이수에는 명문에 혜목산 고달선원 원종대사의 비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이 원종대사 탑비의 이수에는 용들이 용틀임을 하고 있는데, 비를 맞은 용의 비늘이 장관이다. 돌에 새겨놓은 비늘이 바로 꿈틀거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장관을 보기 위해 비속을 뚫고 답사를 다닌다.

 

 

발을 본다. 두려움이 느껴진다. 비에 젖은 앞발이 힘 있게 대지를 움켜잡은 모습이다. 어떻게 저렇게 표현을 했을까? 탑비의 뒤편으로 돌아가 웃음을 터트린다. 힘이 넘치는 앞모습과는 달리, 뒤편에 말려 올라간 꼬리가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라야 이러한 것들이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래도 비가 오는 날 답사를 나간다고 난리를 칠 것이여?”

미쳤다고 하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비가 오는 날, 그것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답사를 해보지 않은 분들은 그 멋을 모르니 말이다.

 

세상에는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들.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지 이상하게 집착을 하고, 무조건 자신이 먼저라야 한다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 한 마디로 피곤한 사람들이죠. 남을 위해 나눌 줄 모르는 이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정말 팍팍한 세상일 듯합니다.

 

서로 마을을 나누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아마도 그런 세상이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끔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담소를 하며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란 생각입니다.

 

 

장마가 들기 전 오른 산행(山行)

 

6월 중순부터 장마가 든다고 합니다. 장마가 들기 전 산행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15일(토), 1박 2일로 산행을 하기로 생각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산삼 몇 뿌리라도 건진다면, 꼭 마음을 먹고 주어야할 사람들이 있어서입니다. 가끔은 이렇게 캔 산삼으로 주변에 몸이 편치 않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했지만, 정작 마음을 먹고 주어야 할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마음을 전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산행은 마침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에 소재한 정수암 주지이신 진관스님이 함께 동행을 하기위해 밤길을 달려 오셨습니다. 만나자마자 인사를 하고 스님은 가방에서 망에 든 풀 같은 것을 내어주십니다.

 

“이것 금강산에서 채취한 산죽 말린 것입니다. 고혈압과 위장병, 당뇨 등에는 최고로 효능이 좋다고 하네요. 직접 채취해 그늘에서 말린 것입니다. 유리그릇이나 질그릇 등에 넣고 끓여서 냉장고에 넣고 마시세요. 건강에 참 좋다고 하네요.”

 

그것이 돈으로 가치를 환산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이미 감동입니다. 이렇게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서로 나누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 요즈음 사람들이 좋아하는 ‘힐링’이라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이죠.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

 

15일 늦게 도착한 스님과 이야기를 하느라, 16일(일) 아침을 좀 늦게 먹고 난 후, 잠시 산수유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자니, 누군가 ‘형’하고 부릅니다. 여주에서 정원수 등을 가꾸는 동생입니다. 서울서 살다가 여주로 내려 온 이 동생도 남에게 주는 것을 엄청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평소 잘 아는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이 애써 가꾼 나무들을 갖다가 심어주고, 주변을 아름답게 꾸미고는 합니다. 평소 잘 가는 아우네 집에 있는 블루베리 나무와 해당화 등도 모두 이 아우가 갖다 심어 놓은 것입니다.

 

“형, 오늘은 브로콜리 좀 캐 와야겠어요. 아는 동생이 재배를 했는데 제대로 자라지가 않아 상품가치가 안된데요. 밭을 갈아 업는다고 하는데, 몸에 좋은 것이니 가서 좀 캐오려고요.”

 

그렇게 동생들은 브로콜리 밭으로 가고, 스님과 함께 산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30도를 웃도는 날의 숲속으로 들어가니,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산을 오를 뿐입니다. 계속 산을 오르다가 보니, 산삼 몇 뿌리가 보입니다. 조심스레 주변 흙을 파내고 잔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정성스레 채취를 합니다.

 

그렇게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벌써 차에 가득 실어 온 브로콜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정성스럽게 다듬어서 한 봉지를 내어줍니다.

 

“오라버니는 이것 한꺼번에 다 드실 수가 없으니 드실만한 크기로 잘라 끓는 물에 데쳐서 냉동실에 보관하셨다가, 드실 때 꺼내 드세요.”

 

그림을 그리는 장화백도 정성스럽게 손질을 한 브로콜리를 한 봉지 내어줍니다. 이 집은 빈 손으로 오면, 집으로 돌아올 때는 항상 양손에 짐이 하나 가득입니다.

 

“형, 다음에 오실 때에는 오시기 전에 미리 전화를 해주세요. 냇가에 팔뚝만한 고기들이 있는데, 그것을 미리 잡아서 탕 거리를 준비해 놓을게요.”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나누는 마음이 풍족한 곳. 주말이면 세상 모든 일을 다 젖혀놓고 달려갈 곳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는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이런 곳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을 듯합니다. 캐온 산삼 몇 뿌리를 손질을 잘 해 보관을 합니다.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저도 나누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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