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 창성사는 고려 말의 국사인 화엄종사였던 진각국사(1305~1382)의 사리탑과 함께 조성이 된, 보물 제14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던 곳이다. 진각국사의 탑비는 현재는 수원 화성 안 방화수류정 길 위편으로 옮겨져 있다.

 

상광교동 버스 정류장에서 광교산 방향으로 폭포농원이 있다. 창성사를 오르는 길이 따로 나 있지 않아 이곳을 통과해 안쪽 하천에 놓인 가교를 건너야 한다. 이곳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은 그저 평범한 어느 산골마을을 찾아가는 길 같다. 길가에 쓴 몇 기의 묘를 지나 산길을 걷다보면 길이 양편으로 갈라진다. 좌측으로 난 길이 창성사지로 오르는 길이다.

 

 

누가 쌓아놓은 돌탑일까?

 

18일 오후에 오른 창성사지 오름길. 이곳부터는 길이 험해진다. 발밑에서 바삭하며 부스러지는 마른 낙엽들이 아파하는 소리가 난다. 물길과 산길을 따라 수북이 쌓인 낙엽들을 밟으며 걷다보면 때 늦은 단풍들이 손짓을 한다. 좌측으로 계곡 옆에 선 커다란 바위 덩어리들이 보인다.

 

천천히 걸어 조금 더 오르면 누군가 쌓다가 만 돌탑이 보인다. 막돌로 쌓아놓은 이 탑은 언제 누가 쌓은 것일까? 아마도 누군가 이곳에서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길이 갑자기 험해진다. 낙엽이 쌓인 밑으로 뾰족한 돌들이 발바닥을 찌른다. 아마도 낯선 사람이 이 길로 들어선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땀이 흐르는 것을 닦으며 조금 더 오르니 창성사지가 보인다.

 

 

창성사지 이렇게 대단했었나?

 

고려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옛 축대가 보인다. 높이 4 ~ 5m 정도의 축대로 보아, 이곳을 기점으로 아래 위에 전각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창성사지 주변에 온통 여기저기 줄을 늘어놓았다. 수원시 향토유적인 창성사지를 한신대학교박물관과 수원시에서 발굴을 하고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보물로 지정이 된 창성사지 진각국사 탑비는 이곳을 떠났다. 아마도 절이 사라져버린 산 중에 놓아두는 것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 발굴의 흔적이 보인다. 모두 3단으로 축대를 쌓고 전각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 창성사지는, 발굴을 하면서 각종 와편과 석재들이 노출이 되었다.

 

그 뒤편에도 작은 축대 한 곳이 있다. 아마도 그 위에는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자리했을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석재들과 함께 몇 곳에 우물의 흔적도 보인다. 이렇게 발굴을 하고 있는 사지를 돌아보니, 창성사지가 적은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잘 다듬은 장대석을 보아도 이 절의 크기가 가늠이 간다.

 

 

많은 석재와 와편들, 창성사지 옛 역사 밝혀질까?

 

현재 발굴중인 창성사지는 장대석과 주초 등의 석재나 우물터, 축대 등으로 보아 모든 발굴을 마치고나면 사적이나 문화재자료로 지정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장대석을 잘 다듬어 사용을 했다. 한창 발굴중인 창성사지를 돌아본다. 산 정상을 바라보고 있는 소나무 뒤편으로 문양을 한 사각형의 석재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우물인 듯하다. 삼면을 잘 다듬은 네모난 석재로 마감을 하고, 그 위에 네모난 문양을 곁들인 돌을 올려놓았다. 안에는 물이 고여 있다. 그동안 노출이 되어있던 우물터는 모두 막돌로 주변을 쌓아놓았었다. 그런데 이 우물은 왜 이렇게 정성들여 꾸며 놓은 것일까? 전문가가 아니니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 우물은 특별하게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잠시 소나무 아래 그늘에 앉아 저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본다. 마치 용트림을 하듯 굴곡진 산등성이들이 보인다. 옛날 진각국사도 이런 풍광 때문에 이곳에 창성사를 중창한 것은 아니었을까? 현재 드러난 잘 다듬은 장대석과 주초, 와편, 우물터와 전각 터 등을 보아도 예사 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이 다 끝나고 나면 창성사에 대한 더 자세한 역사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조급한 마음으로 기대를 해본다.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는 번암면 소재지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남노령이 주산을 이룬 대성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중엽에 홍성 장씨들이 이주해 집단마을로 취락이 형상되었다. ‘노단이란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의 집터와 같은 명당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노단 마을 도로변 대성산 자락에는 겹처마 우진각으로 지은 육각형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정자는 길에서 보면 조금 위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낮은 담장에 일각문을 내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를 오르는 길 한편에는 반계정(磻溪亭)’이라 음각한 돌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도 깨어진 바위에 반계정이란 글이 쓰여 있다.

 

 

 

바위에 새겨져 있던 반계정 표석

 

원래 이 깨어진 바위에 새겨진 반계정이란 글씨는,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우측 도랑끝의 암벽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1978 ~ 198019번 도로의 개설로 인하여 방치되어 오던 것이라고 한다. 2007년 반계정 아래에 있는 우물을 정비하던 중, 본 표석이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를 원 상태로 복원을 하고자 했으나, 오랜 시간 풍화로 인해 보존하기가 어렵자, 탁본을 하여 현재의 돌에 그대로 새겨 넣었다고 한다. 200710월의 일이다. 계단을 올라 일각문 안으로 들어선다. 안에는 육각형으로 지은 누정이 있다. 정자로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겹쳐 놓았다.

 

 

 

취헌의 정자 반계정

 

취헌 장안택 선생은 자는 사유이고 아호는 취헌이다. 선생은 만인을 구제하는 제세구휼을 일생의 업으로 삼고 몸소 실천을 하였다고 한다. 취헌 선생의 이러한 마음은 전국 각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구제를 하던 장안택 선생은 급변하는 세태의 변천을 개탄하며, 세상을 등지고 자연에 몸을 묻고자 생각했다.

 

그래서 지은 것이 대성산 바위 암벽 아래에 반계정이다. 지금이야 앞으로 도로가 나 있지만, 아마 이 정자를 지었을 때는 바위와 앞으로 흐르는 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자였을 것이다. 선생은 이 정자에서 자손들을 교육시키며 여생을 보냈다. 반계정이란 바위와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상징하는 뜻이다.

 

 

취헌 장안택 선생은 조선조 철종 14년인 1863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조선 후기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사업가이다. 부친은 동몽교관인 장석룡이며, 조부는 남요 장홍규이다. 선생은 조부로 부터 예의범절과 학문을 닦았다. 선생의 집은 장부자집으로 통했다. 종손인 선생은 적선을 많이 하였다.

 

고종 31년인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는, 관군에 쫓긴 농민들이 장수 번암까지 피신해 이곳 번암면이 농민군들의 집결장소가 되었다. 선생은 농민군으로 인해 민폐가 일어나자, 이들에게 술과 고기 등 음식을 베풀어 민폐를 줄였다. 관군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음식을 베풀어 민폐를 줄이기도 했다.

 

 

자손들이 기억하는 반계정

 

반계정 뒤편 암벽에는 장안택, 반계정이라고 음각한 글이 있다.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자 병준이라 새개 넣었다. 조상의 정자를 기리기 위해 후손이 새겨넣은 글씨이다. 이 반계정은 1800년에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장수군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최근에 보수를 한 듯하다.

 

정자는 육각의 모든 면에 문을 달았다. 아직은 보수 중인 듯 문은 모두 떼어내 한 편에 쌓아놓았다. 정자 안에는 반계정 운이란 선생이 지은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취헌이란 편액이 있다. 정자는 입구를 뺀 전면에 난간을 둘렀다.

 

 

우진각으로 지은 정자는 밑 안으로는 장초석으로 된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운 뒤 누마루를 깐 정자를 올렸다. 그리고 겹처마를 받치기 위해 활주를 세웠는데, 아래편은 육각형의 장초석을 세운 후, 그 위에 육각형의 기둥을 받쳤다.

 

취헌 장안택 선생. 평생을 자선사업가로 살다간 마음을 담고 있는 반계정. 아직은 주변이 부산스럽기는 해도, 그 위에 올라 선생의 마음을 담아간다. 세상이란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이 있는 특별한 집이 있다. 충북 제천시 금성면 구룡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7호인 박도수 가옥은,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을 두고 있다. 날이 추워서이지 겨울철 난방을 하느라 비닐로 안채의 전면을 모두 막아 놓았으나, 전면에 보이는 살창이나 대청과 붙은 쪽의 판장문 등이 광임을 알 수 있다.

왜 이곳에 광을 들여놓았을까? 박도수 가옥은 현재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실례를 범할 수가 없었다. 비닐로 막은 안쪽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집이다.


판자벽으로 막은 문간채의 조형미

대문채의 앞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좌측으로부터 대문, 두 칸의 방과 광으로 구성된 대문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20세기 초에 지어졌다는 대문채는, 한편을 판자벽으로 막아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단순한 판자벽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각종 농기구 등을 쌓아두는 헛간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부정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다. 두 칸의 방 앞에는 툇마루가 없이 바로 툇돌로 내려가게 돌을 놓았다. 대문채의 바깥쪽 문틀을 꾸민 목재의 문양으로 보아, 이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듯 하면서도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는 박도수 가옥의 대문채다.



특히 대문채의 안으로 들어가면 판자로 만든 굴뚝이 더욱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마치 푸근한 고향집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그러한 정겨운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살기에는 불편할 줄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집이다.

모채의 쓰임새는?


박도수 가옥은 - 자형의 대문채와 ㄱ 자형의 안채가 있고, 건넌채인 모채가 트여진 쪽을 막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형으로 꾸며졌다. 20세기 초에 대문채와 함께 지어진 모채는 대문채 옆에 난 일각문을 통해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하였다. 양편에 부엌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의 방을 드린 모채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아마도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했을 경우 이 모채는 행랑채의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것 같다. 기존의 문간채나 안채보다 단순하게 지어진 것도 그렇지만, 가운데 방을 두고 양편에 부엌을 둔 것이 이 모채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모채를 드나드는 별도의 문인 일각문을 두었다는 점도 그러하다.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의 구성에서 보면, 이 모채 외에는 행랑채로 사용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안채에 낸 광은 종자를 보관하는 곳?

비닐 밖에서 확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남는 박도수 가옥. 전체적으로는 서쪽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차례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서 두 칸 대청과 광, 건넌방을 두고 있다. 특이한 것은 바로 이 광이다, 광을 이곳에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에서 마땅히 광을 둘만한 공간 확보가 어렵다고 해서 안채에 광을 둘 이유는 없다. 아마도 이 광의 용도는 농작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곳이었던 곳 같다.



대청에 다락을 만들어 사당을 드린 것도 이 가옥의 남다른 면이다. 광을 지나면 건넌방의 마루를 높이고 투박한 난간을 둘러놓았다. 아마 이 건넌방을 안사랑방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 가옥보다는 특이하게 꾸며진 박도수 가옥. 집안의 구성이라든가, 꾸밈이 전례가 없다는 집이다. 동치(同治) 3년인 1864년에 지어졌다는 상량문이 있는 박도수 가옥. 그 특이함이 눈길을 끈다.




안채의 서쪽 끝에 있는 부엌은 대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판자 바람벽을 설치했다. 그리고 위편에 까치구멍을 내고, 아래편에도 까치구멍을 내었다. 대농의 집이라기엔 조금은 좁다는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좁은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을 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안채 뒤편의 툇마루가 그러하다, 일반 가옥의 툇마루보다는 넓게 꾸며졌다. 집안에서 사용하는 기물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점도 이 가옥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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