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세상을 살다가 하직하고 나면, ‘유택(幽宅)’이라고 하는 묘에 들어가 영면을 한다. 물론 요즈음은 묘를 쓰지 않고 화장을 해서 뿌리거나, 그런 것이 서운하면 수목장(樹木葬)이나 혹은 납골당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묘문화에 대해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봉분을 고집하는 분들이 꽤나 된다.

 

그런데 이 묘를 보면, 참으로 그 사람이 살아생전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를 궁금하게 만드는 묘들이 많다. 앞에는 석물이 있고, 봉분은 남산만하다. 거기다가 큼직한 돌에는 별 이상한 글도 적혀있기도 하다. 자손을 잘 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대단한 인물인지 가끔은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돈으로 도배를 한 묘야,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기능하다. 그러나 그 묘에 가서 아무도 머리를 조아리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다. 그 자손들이야 찾겠지만.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4에 소재한 태종 무열왕릉

 

묘역을 갖고 사람을 판단할 수 없어

 

그런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묘가 아니다. 사람이 평생을 나라를 위해 살다가 죽은 이도 있겠고, 그저 고생만 하다가 죽은 이도 있을 수가 있다. 그런데 나라님이라고 하는 분들은 죽은 후에 그 묘를 보면, 대충 그 사람이 얼마나 백성들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묘 하나만 갖고 그 임금님의 일생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경주 서악동에 있는 태종무열왕의 묘를 보면 그 크기가 대단하다. 무열왕의 묘도 대단한데 그 앞에 있는 둘째아들인 김인문의 묘 또한 만만치가 않다. 무열왕릉의 뒤편에는 왕릉이 3기가 있다. 추사 김정희는 『신라 진흥왕릉고』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 진지, 문성, 헌안왕 능으로 추정한 바 있다. 보물 제65호인 서악동 삼층석탑을 비껴서 안으로 들어가면 왕릉 2기가 있다.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 비

 

사적에 묻힌 나라님들

 

사적 제178호로 지정이 된 신라 46대 문성왕릉(839~857 김경응)은 진흥, 헌안왕 능과 함께 선도산 남쪽 구릉 말단에 있다. 능의 지름은 20,6m에 높이는 5.5m이다. 문성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왕위에 올라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였으며 임해전(안압지)을 크게 보수하였다.

 

사적 제179호인 신라 제47대 헌안왕릉(재위 857~861/김의정)은 문성왕릉의 바로 곁에 있다. 지름은 15.3m에 높이는 4.3m이다. 이 능은 밑 둘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고 봉토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몇 개만 들어나 있다. 헌안왕은 신무왕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 이었다. 헌안왕은 저수지를 수리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등,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하지만 이 두 임금의 묘는 무열왕의 묘에 비길 바는 아니다. 신라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들의 유택을 보면, 그 나름대로 나라님들이 백성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견훤왕릉을 보면 제대로 된 이정표 하나 없이 덩그러니 봉분만 남아 있다. 후백제를 세우고 한 때는 후삼국 중 가장 큰 세력을 갖기도 하였으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아들 신검과의 내분으로 고려에 의해 멸망을 하고 말았다.

 

명장을 만드는 것은 휘하의 장졸이다

 

이런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라님의 유택만이 아니다.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경주 김유신의 묘나, 23전 23승이라는 놀라운 전승의 해전 기록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의 유택 역시, 수많은 시간이 지났으면서도 후대들에게 교훈을 남기고 있다. 그들의 삶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역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모든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세계 4대 해전이라는 대단한 해전인 한산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이 대승을 거둔 것은 이순신이라는 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장만 있어서 그 험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가 않다. 그 밑에는 장군을 믿고 의심 없이 따르는 수많은 장수들과, 이름 없는 병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만큼 명장 밑에는 백성들을 생각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수하의 인물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라님 주변 사람들이 과연 명장 밑에 있는 명 장수들일까? 그들이 과연 국민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일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다가 보면 참담하다는 생각만 든다.

 

 

바로 이런 차이다. 훌륭한 명장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를 믿고 따르고 나라와 국민들을 생각하는 장졸들이 있어야만 한다. 요즈음 들어 많은 지자체장들을 보아도, 그 주변에 명장을 만들 수 있는 장졸들이 그리 흔하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후일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를 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일이다. 곁에 명 장수가 없고, 자신의 버팀목이 될 수 없는 장졸이라면, 당당히 버릴 사람은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말없이 숱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역사는 준엄하게 그 사람을 심판하기 때문이다.


옹기는 언제부터 우리가 사용을 했을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誌 魏志 東夷傳)』 고구려조에 보면 「집집마다 작은 창고를 갖추고 있는데, 이를 부경(浮京)이라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매우 청결하여 저장을 잘하며, 발효된 음식을 먹기를 즐겨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경우에는 제31대 신문왕조에 왕이 왕비를 맞이하는데, 왕비의 집에 보내는 예물품목이 쌀, 술, 기름, 간장, 포와 젓갈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통일 이전부터 저장구인 옹기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선화봉사 고려도경』에는 수옹도기라는 단어가 나오며, 규모가 높이 6자 너비 4자 5치, 용량이 3섬 2되가 든다고 했다. 이는 고려시대에는 이미 옹기를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늘에 걸린 <조선옹기 특별전시장>의 간판과 옹기를 둘러보는 사람들

서민들과 함께 한 옹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많은 기록에서 옹기가 나타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상도 초계군과 진주목 세 곳에서 황옹을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국대전』공정 외공장조에 보면 충청도 임주에 황옹장이 한 사람이 있으며, 공전 경공장조에는 본조 봉상시 등 14개 기관에 옹장이 104명에 각각 뒷일꾼 2명씩을 배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와 같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진 옹기는, 시대가 지나면서 더 많은 종류의 옹기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은 서민 생활에서 꼭 필요한 그릇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건너편으로 30m 정도를 이목대 쪽으로 가면 팔도 옹기전을 열고 있다. 여기저기 널린 다양한 옹기들을 관람 할 수가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매매도 이루어진다. 팔도옹기전에 보이는 옹기들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 옹기들을 둘러본다.



다양한 형태의 옹기들


'술독'이다. 술을 빚은 날짜와 몇번 째 슬독인지, 누가 담구었는지를 적게 되어있다. 높이는 5자 정도이며 길고 위가 불룩하게 생긴 것이 특징이다. 




맨위는 '청수단지'다. 청수단지란 이른 아침에 주부들이 깨끗한 물을 길어 부어놓고, 집안의 안과태평을 빌 때 사용을 하는 옹기이다. 가운데 것은 '좀도리'라고 하는 옹기이다. 좀도리란 매일 밥을 할 때마다 조금씩 쌀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옹기항아리다.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공동체를 볼 수 있는 그릇이다. 아래 항아리는 '물두멍'으로 물을 많이 담아주기 위한 항아리다. 물두멍은 키는 낮고 배가 불룩하며 주둥이가 넓어 편하게 물을 퍼담을 수 있다.




위에 것은 '시루'라고 부른다. 흔히 떡을 찔 때 사용하는 것이다. 가운데는 '자배기'라고 하며 물건을 담아두거나 물을 담아 두기도 한다. 장독을 덮을 때도 사용을 했으며, 집안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옹기 중 하나이다. 맨 아랫 것은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높이는 85cm, 둘레는 295cm로 곡식, 물, 김치 등을 담아둔다.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사용했으며, 배둘레가 크고 키가 작아 사용하기에 편리하다.




맨 위에 것은 '간장통'이다. 중간에 꼭지가 있어 간장을 따르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가운데는 '소줏고리'라고 부른다. 좌측은 경상도 소줏고리이며 우측은 전라도 소줏고리이다. 소줏고리는 증류식 소주를 만드는 용기이다. 아랫것은 조선조 말에 만들어진 '똥 항아리'이다. 높이는 135cm, 둘레는 395cm이다.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똥통으로 땅에 묻어 사용을 했다.




위에 것은 '앵병'이라 부르는 옹기이다. 짠지를 담아두기도 하고 청주나 막걸리를 담아 두기도 한다. 가운데는 '씨앗항아리'다. 각종 씨앗을 담아두는 용기로 사용을 했다. 맨 아래는 '장군'이라 부르며, 누여 사용하고 보관은 세워둔다. 어떤 액체를 담느냐에 따라서 물장군, 술장군, 오줌장군, 똥장군 등으로 부른다.


이 옹기는 '귀때단지'라고 부르는 물을 담는 용기이다. 둘레의 한편에 주둥이가 달려 물을 따르는데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옹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예전부터 민초들이 즐겨 사용하던 옹기. 옹기는 숨을 쉰다고 하여 음식을 담아 놓으면 오래도록 상하지가 않는다고 한다. 선조들이 어떤 그릇을 사용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그래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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