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 비가 왔다고는 하지만, 8월 13일은 아직 여름이다. 한 낮의 수은주가 31도를 넘었다. 이런 날 점심을 먹고 나면 괜히 나른해진다. 그런 나른한 마음을 바로잡는 데는 땀을 한 번 흘리는 것이 제일이란 생각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만석공원으로 달려갔다. 땀 한번 쏟아보자고.

 

만석거는 일왕저수지, 교구정 방죽, 북지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가뭄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정조 19년인 1795년 이 만석거를 축조하였다. 이 만석거로 인해 황폐했던 땅에서 쌀 만석을 더 생산하였다고 하여, 그 명칭을 ‘만석거’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만석거 일대는 현재 ‘만석공원’으로 조성하여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위치한다.

 

 

만석거를 바라보는 정자 영화정

 

저수지 조성 후 쌀 만석을 더 생산했다고 해서 ‘만석거’라는 명칭을 붙인 이 저수지를 일제는 ‘일왕저수지’로 개명을 했다. 1920년대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한다는 이유로, 우리고유의 지명을 말살시키려는 음모였다. 그렇게 생겨난 명칭이 바로 일왕저수지이다. 그러나 이곳을 아직도 그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일제의 잔재가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만석거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가 있다. 지금은 ‘영화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이 영화정의 원래 이름은 ‘교귀정’이었다. 이 교귀정은 시구관의 부사와 유수들이 거북이 모양의 관인을 주고받은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원래 교귀정은 사라지고 만석공원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교귀정 자리에서 200m 정도 동북쪽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영화정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원래는 8칸 정도의 정자이며 북쪽으로 난 날개채 2칸은 온돌이고, 남쪽으로 난 세로로 두 칸은 포판인데, 3면과 온돌 뒤쪽은 모두 퇴를 반 칸씩 달아내 하엽난간을 두르고 있다고 하였다. 정자 서쪽에는 대문을 내고, 남쪽으로는 작은 문을 냈는데 둘레는 네모꼴 단장이라고 소개를 한다. 1796년 병진년 행차시에 영화정이란 편액을 달도록 했다는 것이다.

 

복원한 영화정, 만석거를 바라볼 수 있도록 담장을 낮춰

 

현재의 영화정은 1996년 10월에 신축, 복원한 건물이다. 영화정의 형태는 화성성역의궤에 기록이 되어있어 그 모습을 따랐을 것이다. 더운 날 찾아간 영화정. 한 옆으로는 하늘 높게 자란 소나무들이 서 있고, 앞 만석거에는 연잎들이 파란색을 띠고 있어 더위에 지친 마음들을 달래주고 있다.

 

 

 

전국의 정자를 답사하면서 느끼는 것은, 역시 그 정자의 누마루에 앉아 경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야 과거에 그 정자에 앉아있던 선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정을 돌아보면서, 참으로 어이가 없다. 대문이고 작은문이고, 건물 안에 방문이고 모두가 다 꽁꽁 잠겨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 누마루에 앉아 저수지쪽으로 낮게 조성을 한 담장너머로 보이는 만석거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가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가끔 이런 건물이나 정자들을 만나면 울화가 치민다. 관리를 하기 싫어서 이런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정자들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올라가 경치를 즐기고는 한다. 가까운 곳에 있는 수원 화성의 아름다운 정자 ‘방화수류정’ 역시 보물이다. 화성의 많은 전각들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올라가 쉬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직 그런 곳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그저 잠가놓고 사방에 감시 센서를 세워놓으면 관리가 제대로 되는지 아는가 보다. 이런 사고는 참 모자람의 극치란 생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는 이런 처사, 하루 속히 그런 사고가 바뀌기를 고대한다.

 

 

 

문화재란 사람들이 직접 그곳을 느끼고 더 감사를 할 때 제대로 된 보존이 이루어진다. 문마다 잠가놓고 정작 울안에 수북이 자라고 있는 풀조차 정리가 되지 않은 영화정.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만석공원에 볼만한 전각 하나가, 잠가놓는 것이 능사라는 생각으로 서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다는 생각이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11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팽성읍 객사. 팽성 객사는 조선 성종 19년인 1488년에 크게 지었으며, 그 후로 2번의 수리를 거쳤다. 객사란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묵어가는 곳이며, 일반적인 형태는 중앙에 중대청을 놓고, 양편으로 동, 서헌을 둔다.

팽성객사는 일제시대에는 양조장으로 바뀌었다가, 그 후 주택으로도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1994년 해체, 수리하면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는 대문간채와 본채가 남아 있다. 대문간채는 중앙에 솟을문을 두고, 양편으로 방과 광 등을 드렸으며, 동편을 꺾어 ㄱ 자형으로 마련하였다.



관리청으로서 위엄을 보이는 팽성객사

본채는 전체 9칸으로 가운데 3칸은 중대청, 양 옆에 동, 서헌이 각각 3칸씩 있다. 객사 본 건물의 중앙에 마련한 중대청은 안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관리들이 한 달에 두 번 절을 하던 곳이다. 절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행해진다. 중대청의 지붕은 양 옆에 마련한 동, 서헌보다 높여 건물의 격식을 높였다.

동. 서헌은 각각 중대청과 가까이에 한 칸의 온돌방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모두 누마루를 깔았다. 이 동 서헌은 다른 지방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팽성객사의 중대청과 대문의 지붕 꼭대기 양끝에는, 용머리조각을 놓아 관리청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냈다.




팽성읍 객사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팽성객사는 원래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조 현종 때 크게 중창을 하였고, 영조 36년인 1760년과, 순조 1년인 1801년에 다시 중수를 했다고 한다.

문은 잠가놓고, 쓰레기는 쌓이고

2월 12일 오후 팽성객사를 찾았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처음 팽성객사를 방문한 것은 2007년 10월 21일이었다. 그 때도 문은 굳게 잠겨있고, 관리사에는 사람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객사의 대문은 잠을 통으로 굳게 잠겨있다. 그리고 관리인이 묵는 관리동과 심지어 화장실까지 잠겨 있다.



화장실 앞에는 지저분하게 담배꽁초와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으며, 담장 밑에도 담배꽁초와 누군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담은 비닐봉지들이 나뒹굴고 있다.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리동까지 지어놓고 정작 관리는 하지 않는 문화재. 관리동과 화장실이 붙어있는 이 건물은 벽도 떨어져 나가 흉물로 변하고 있다.

주말과 일요일이 되면 문화재를 답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곳이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잠가만 두면 된다는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전주객사의 경우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누구나 들어가 동, 서헌 마루에 앉아 쉴 수가 있다.





문화재란 더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그것의 소중함을 인식할 때 지켜지는 것이다. 무조건 문을 걸어놓고 출입을 시키지 않는다고 보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돈을 들여 관리사를 짓고 사용도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도대체 왜 혈세를 낭비하면서 문화재보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해당 지자체의 반성이 있기를 바란다.

전라북도에는 ‘삼한(三寒)’이 있다. 세 곳의 찬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하나는 전주천 가에 자리하고 있는 ‘한벽당(寒碧堂)’이요, 또 하나는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이다. 그리고 남은 하나가 바로 무주에 있는 ‘한풍루(寒風樓)’라고 한다. 세 곳 모두 물에 가까이 있어 시원한 바람을 맞기에 적합하다.

한풍루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한풍루가 언제 지어졌는가는 정확지가 않다. 다만 14세기경에 지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국여지승람』무주 누정조에는 ‘한풍루재객관전’이라고 적고 있어, 한풍루가 객관에 달려있는 건물임을 밝히고 있다. 한풍루는 선조 25년인 1592년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현감 임환이 다시 지었다.


한풍루의 수난, 그러나 당당한 자태로 남아

한풍루는 누마루 밑으로 어른들도 지나갈만한 높이로 지어졌다. 정면 세 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정자는, 이층 누각을 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한풍루의 주초는 네모난 모형으로 돌을 다듬어 사용하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전체적으로 보면 당당한 자태가 남아있어 ‘호남제일루’라고도 부른다.

한풍루는 수난의 역사를 당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임환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에도 몇 차례 중수를 하였다. 이러한 한풍루는 한 때는 일본인의 소유로 넘어가 불교포교당으로 사용이 되기도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금호루’란 명칭으로 바뀌기도 했다. 수난의 역사를 당한 한풍루는 1971년에야 제 이름과 옛 모습을 찾았다.




아름다운 우물천정, 그러나 굳게 닫힌 문

밖에서 올려다 본 한풍루는 아름다웠다. 주심포계로 지어진 누정은 우물천정을 하고 화려한 색채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기둥 밖으로 뺀 누마루에는 난간을 둘러 멋을 더했다. 이층으로 올라가 한풍루의 풍취를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누각으로 오르는 출입구에는 널판으로 짠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도대체 문화재 보호를 한다고 하면, 이렇게 문을 달아 잠가버리다니.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 찾아간 곳이지만, 가는 곳마다 이렇게 문을 달아 닫아놓기가 일쑤다. 문화재보호라는 것이 문을 닫아야 가능한 것인지. 물론 화재 등 위험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겠지만,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개방을 할 수가 없는 것인지.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이렇게 문이 잠긴 문화재를 만날 때마다 참으로 난감하다. 같은 문화재인데도 불구하고 문을 잠그지 않아도 보존이 잘 되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문을 잠근다고 해서 문화재 보존을 잘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잠가버리고 나서 제대로 간수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최선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각에는 글귀가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그러나 오를 수 없는 누각 위에 있는 글귀를, 아래에서 읽을 수는 없는 일이고보면 답답하기만 하다. 위로 올라 주변 풍광을 볼 수가 있다면, 더 아름다운 모습을 적을 수 있을 텐데.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그저 꽁꽁 닫아버린 문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함양군처럼 장자와 누각이 많은 곳은 우리나라 전역을 돌아보아도 한 두 곳에 불과하다. 그만큼 가는 곳마다 만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누각이다.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그보다 바람직한 마을은 없다.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

이번 답사 길에서는 두 곳의 누각을 돌아보았다. 함양읍 운림리 함양군청 앞에 서 있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90호인 학사루와, 안의면 금천리 금호강변에 소재한 제92호인 광풍루이다. 두 곳의 누각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모두가 관아에 속해 있던 건조물로 보인다. 이 중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신라 때부터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광풍루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최치원이 올라 시를 읊었다는 학사루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 지방 태수로 재직시, 학사루에 올라 시를 읊은 곳이므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로 학사루의 건축 년대를 신라 때로 본다. 학사루의 서쪽에 객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이 이곳 동헌의 부속건물이지 않았을까 추론도 해본다. 학사루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조 연산군 때 영남파의 종조였던 김종직이 이곳 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어 연산군 4년인 1498에 무오사화를 불러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학사루는 당시의 건물은 아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함께 소실되었으며, 조선조 숙종 18년인 1692년에 정무가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현재의 학사루는 320년 정도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학사루는 2층 누각기둥에 주련을 달아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학사루. 비가 오는데도 답사를 강행하였다.

정여창이 명칭을 지은 광풍루

광풍루는 안의면 소재지 진입로 입구 금호강변에 서 있다. 광풍루의 원 이름은 선화루였다. 선화루, 선화당이란 명칭은 동헌의 누각이나 전각에 많이 붙이는 것으로 보아, 이 누각은 동헌의 건물이었다고 본다. 광풍루는 조선조 태종 12년인 1412에 당시 이안(현재의 안의면)의 현감 전우가 창건하여 한다.

그 후 조선 세종7년인 1425년에 김홍의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고, 조선조 성종 25년인 1494년에 안의 현감 일두 정여창 선생이 중건하고 광풍루로 개칭 하였다. 그 뒤에도 소실과 복원 등을 거친 광풍루의 현 건물은, 숙종 9년인 1683년 현감 장세남이 중건한 건물로 340년 정도의 세월을 지낸 누각이다.



광풍루. 금호강가에 서 있는 운치있는 누각이다.

꽁꽁 닫아라, 머리카락 보일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바로 꽁꽁 닫힌 문이다. 전국의 서원이나 향교 등을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많은 문화재들이 문을 잠그고 있다. 특히 이런 문을 닫아놓는 현상은 전각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그렇게 문을 잠그는 것은 바로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학사루 계단 위 닫힌 문에는 낙서가 가득하다. 어딜가나 낙서로 몸살을 잃는다. 그래서 문을 잠갔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학사루 이층으로 올라가는 문에는 잠을통이 걸려있다.

하지만 문을 닫아 걸어놓는다고 훼손이 되지 않을까? 요즈음 들어 각 지자체들마다 정자나 누각 등을 개방을 한다. 마루를 깨끗이 손질하고 사람들이 신을 벗고 들어가 쉴 공간으로 활용을 하는 것이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쉬기도 하고, 독서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누각이나 정자 등이 바람이 잘 통하게 구조가 되어있어, 시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누각인 촉석루 등도 모두 개방을 하고 있다.


광풍루에도 계단에 문을 달아 막아놓았다. 문 밖에서 본 이층

하지만 함양군의 두 곳 누각은 모두 잠가놓았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잠을 통을 잠가 놓아 위로 오를 수가 없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닫혀있는 것을 보면 정말 짜증스럽다. 그렇다고 문화재 보존이 잘 되는 것일까? 오히려 사람들에게 개방을 하였더니, 더 조심스럽고 보존이 잘 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광풍루 이층 누각은 잠겨 있는데 저 소주병은 신선이 내려와 마시고 갔을까?

가는 곳마다 잠겨있는 누각.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관리자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고 그 안에 못 들어갈까? 광풍루 이층 누각 마루에 소주병을 보면서, 이런 일이 얼마나 덧없는 관리인가를 묻고 싶다. 만일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을 했다면, 저렇게 소주병이 그곳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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