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각(御書閣)’이라고 하면 듣기에는 생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국에 수많은 어서각이 건립되어 있다. 어서각은 바로 왕이나 왕비 등이 친히 내린 글을 보관하는 곳이다. 왕이 친히 내린 어필은 자손과 신하에게 내린 명령이나 가르침인, 교시(敎示), 훈유(訓諭), 편지, 현판, 시고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어필을 민간에서는 어서각을 세워 봉안하는 것이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1118에 위치한 어서각은, 추담 장현경에게 영조가 하사한 친필을 보관하기 위하여 정조 23년인 1799년에 건립된 전각이다. 무주에서 장수를 거쳐 남원으로 내려가는 길에, 어서각의 표지판을 보고 찾아 들어갔다. 장수의 어서각은 전각을 둘러친 내담이 있고, 그 밖에는 철문으로 막은 외담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잠긴 철문, 알고 보니 열려 있어

 

철문은 잠긴 듯해 밖에서만 촬영을 하다가보니, 안으로 잠근 쇠가 그냥 열게 되어 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까치발을 들고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진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홍살문이 있고, 삼문을 단 벽은 꽃담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그 안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어서각을 지었다. 전각의 중앙에는 ‘어서각(御書閣)’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자물쇠를 걸어놓았다. 한편에는 어서각을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중수기를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안에는 영조가 직접 써서 장현경에게 내린 글씨를 보관하고 있다고 하나 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

 

 

 

정조가 친히 어서를 내려

 

장현경(1730∼1805)은 흥덕사람으로 자는 백회, 혹은 사응이며, 호는 추담이다. 영조 28년인 1752년에 정시에 급제한 후, 홍문관박사를 시작으로 춘추관, 기주관, 편수관 등을 역임하였다. 어서각에 보관된 어서는 22㎝× 35㎝의 크기인 홍저지에 쓴 영조의 친필이다.

 

영조 39년인 1763년 겨울 장현경이 사관으로 입직하였을 때, 영조께서 정청에 나오시어 잣죽과 꿩구이를 내리자, 성은에 감복하여 율시를 지어 올리니 대왕께서도 크게 기뻐하시어 어서를 하사하신 것이라고 한다. 장현경은 이 글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서각을 짓고 이곳에 보관하였다.

 

 

 

잘 보관된 문화재에도 옥에 티가 있어

 

장수의 어서각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다고 전한다. 넓지 않은 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어서각. 아마 장현경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이곳에 접근하지를 못했을 것이다. 어서각 여기저기에 CC카메라가 달려 있다. 영조의 친필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누군가 어서각을 출입하였는지 마루에 무엇이 놓여있다. 들여다보니 이곳에서 고추를 말렸는가 보다. 하기에 집안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있을 테니, 고추인들 말리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감히 임금님의 글씨를 보관한 집인데 말이다. 하기야 요즘 세상 사람들에게 임금의 친필이 무슨 대수가 될까?

 

 

이제는 문화재라는 의미도 사람들에게는 점점 퇴색되는 듯하다. 하기야 누군가 이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답사를 하는 나에게 물은 말이 있다. 참 가슴 아프게 받아들인 말이지만.

 

“문화재가 밥 먹여줍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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