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군 상천면 위천리에 소재한 가섭암지. 지금은 보물 제530호 가섭암지 마애삼존입상만 남아있는 이 곳 금원산 지재미골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바위를 볼 수 있다. 단일 바위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이 바위는 ‘문바위(=門岩)’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 바위가 가섭암의 일주문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문바위의 앞으로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으며, 지금은 바위 앞으로 등산로가 나 있다. 이 바위는 가섭암, 금달암, 두문암, 기도암, 지우암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신비한 이름은 ‘용의 여의주’라는 명칭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주변에는 가섬암지를 비롯한 많은 절터가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이 문바위를 사람들이 신성시했음을 알 수 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려

바위의 앞면에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고려 말의 사람 이원달의 순절동이란 글자를 네모나게 바위를 판 후 음각을 해놓았다. 이원달은 합천사람으로 호는 ‘달암(達岩)’이며 병조참판을 지낸 분이다. 아마도 이 달암 선생을 기리기 위해 새겨 놓은 듯한데, 언제 누구에 의해서 새겨진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이 문바위는 보는 방향에 따라서 그 모습이 각기 다르다. 커다란 돌고래 같기도 한 이 문바위는 길가에서 보면 그 면이 부드럽게 보이지만, 뒷면으로 돌아가면 칼로 자른 듯하다. 이렇게 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바위의 형태가 예사롭지가 않다. 아마도 예전 이곳을 지나 가섭암으로 오르던 사람들은, 이 문바위부터 머리를 숙였을 듯하다.



쐐기돌이 받치고 있는 거대한 바위

문바위 밑으로 들어가 본다. 지금은 돌로 받침 담을 쌓아 놓았다. 그러나 그 담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몇 개의 쐐기돌이 이 커대한 바위를 받치고 있다. 그 쐐기바위들은 그리 크지가 않다. 그런데도 그 오랜 시간을 이 바위를 받치고 있었다는 것이 정말로 놀랍기만 하다.



바위의 끝으로는 쐐기 돌 옆으로 사람이 지나갈 만한 공간이 보인다. 아마도 이 공간이 일주문의 통로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누가 다닌 길의 흔적이 있다. 이곳을 지나 가섭암으로 들어선 후, 마애불까지 통했을 것이다. 주변 경치를 돌아보면서 옛 가섭암을 그려본다. 그리 크지 않은 가섭암의 모습이 떠오른다. 문바위와 하나가되어 자리를 했을 가섭암. 그리고 그 뒤편 바위 안에 새겨진 마애삼존입상.



가섭암은 사라지고 없지만 마애불과 문바위가 자리하고 있어, 가섭암이 그 가운에 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자연의 바위하나가 이렇게 클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누군가 그 위에 올라가 작은 돌탑을 쌓아놓았다. 어떻게 저 위로 올랐을까? 문바위의 궁금증은 점점 쌓여만 가는데, 빗줄기가 차츰 굵어진다. 다음에 이곳에 들릴 때는 더 많은 것을 알아볼 수 있기를 고대하며, 문바위를 뒤로한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에 소재한 태안사. 태안사는 『동리산태안사사적(桐裏山泰安寺事蹟)』에 의하면, 경덕왕 원년인 742년 2월에 이름 모를 스님 세 분이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가 절을 크게 늘려 지었는데, 이 때 절의 규모는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고종 10년인 1223년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인 1684년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 등이 보이고 있다. 태안사는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거대사찰인 태안사는 한국전쟁 때 전각 모두가 소실이 되고,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인 일주문과 능파각만이 남았다고 한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 소재한 고찰 태안사. 절 입구에 세워진 일주문은 전남 유형문화재 제83호이다. 현판에는 '동리산 태안사'라고 적었다

곡성으로 발길을 옮기다

2월 26일 토요일 오후,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온다고 하더니 날씨만 좋다. 오랜만에 두꺼운 옷을 벗어버리고, 나들이하듯 답사 길에 올랐다. 그동안 몇 번이고 찾아가려고 예정을 잡았던, 곡성군 죽곡면에 소재하는 신라 때 창건 된 고찰 태안사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곡성읍에서 태안사까지는 승용차로 30분 정도가 소요가 된다. 오후시간에 출발을 했으니 마음이 조급하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맡아보는 봄 냄새를 즐기기로 했다.

태안사 매표소에서 태안사까지는 2km 정도의 비포장 길이다.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가보면, 태안사 입구 계곡 위에 걸린 능파각을 만나게 된다. 계곡 중간에 그늘진 곳에는 얼음이 채 녹지 않았다. 헌데 계곡에는 시뻘건 흙탕물이 흐르고, 연신 커다란 트럭들이 드나들고 있다. 태안사 입구 계곡을 정비하는 모양이다.



일주문 안 쪽 굵은 기둥 윗부분에는 양편에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굵은 기둥 양편에는 보조기둥을 세웠다

한국전쟁을 피해간 일주문

능파각을 지나 200m 정도를 올라가면 태안사의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일주문. 몇 사람인가가 답사를 나온 듯, 일주문 곁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절 입구에 세워놓는 일주문은, 속세와 불계의 경계를 표시하는 의식적인 상징물이다.

한국전쟁 때 태안사의 그 많던 전각들이 다 소실이 되고, 계곡 위에 걸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인 능파각과 이 일주문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일주문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엇이라 표현할 수가 없다. 맞배지붕으로 꾸민 일주문에는, ‘동리산태안사 (桐裏山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 안에 조각된 다포식으로 된 공포

우선 안내판에서 일주문에 대한 설명을 읽어본다. 항상 어느 문화재를 만나든지, 먼저 안내판부터 살펴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래야 그 문화재가 갖고 있는 특성이나, 어느 것을 중점적으로 살펴야 하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작은 일주문 안에 숨겨진 화려함

일주문은 연못을 끼고 돌아 계단을 오르면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요즈음 절을 들어가다가 보면 위압적인 일주문들을 볼 수 있는데, 태안사의 일주문은 그저 산으로 오르는 작은 소로를 막아 경계를 삼았다. 그렇기에 장엄하지도 않고, 거대하지도 않다. 어느 고택의 일각문보다 조금 더 크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일주문은 조선조 숙종 9년인 1683년에 각현대사가 다시 지은 후, 영월선사가 중수하였다. 그 뒤에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일주문을 처음 볼 때는 너무 작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큰 규모의 태안사였다는데, 너무나 초라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정면 한 칸의 규모로 되었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워서 무게를 분배하였다.


사람을 겉만 보고는 모른다고 했던가? 태안사 일주문을 올려다보고,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음에 부끄럽다.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이다. 이 작은 일주문 안에 숨겨진 화려함. 앞, 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 찬 느낌이다.

양서로 된 살미첨차들로 내외 사출목의 공포를 짜서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그 작은 일주문 안에 이렇게 화려함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양편에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그 안에 청룡과 황룡이 마주하고, 속세에 찌든 사람들의 몸을 정결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절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은다. 작은 것을 보고 잠시라도 헛된 마음을 먹었던, 스스로를 반성하는 두 손의 모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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