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재’라고도 하고, ‘배꽃고개’ 혹은 ‘배티재’라고도 했다. ‘이치재’는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대둔산 옆 자락을 끼고 넘는 도로의 정상에 있는 고개마루턱이다. 정확히 말을 하자면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을 연결하는 고개를 말한다.

이 이치재는 임진왜란 때 3대 대첩지의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그리고 이치대첩을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는다. 이치전투는 그럴 만큼 적을 완전 섬멸한 승리의 장소이기도 하다.


황진장군의 전승기념비가 서 있는 곳

그 고개마루의 휴게소 앞이 바로 임진와란 때 대승을 거둔 뜻 깊은 장소이다. 지금은 그저 이치대첩지란 비가 서 있고, 후에 세운 ‘황진장군의 이치대첩비’ 가 있다. 그곳에서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 왜군을 맞이하여 대승을 거둔 곳이다. 당시 왜병의 시체가 수 십리에 즐비했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알만하다.

왜장 <고바야가와 다카가게>가 이끄는 수만의 왜병은 금산에서 웅치 방어선을 뚫고 호남의 수도라는 전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는 하동을 거쳐 올라온 왜병들과 연합으로 전주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동북현감 황진장군은 남원진에서 급히 전주로 올라와, 안덕원까지 침입한 적을 물리쳤다. 그리고 바로 이치로 자리를 옮겨 휘하의 장수인 공시억, 위대기,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사력을 다하여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금산군 진산면의 어르신들께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아군들의 치는 징 소리가 골짜기를 울려, 떠날 갈 듯 했다는 것이다.

계룡산과 지리산의 산신들의 각축장이 된 대둔산의 전설

예전에 대전KBS에서 방송을 할 때, 책을 내기 위해 이치재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전라북도 완주를 거쳐 금산으로 넘어오다가 진산면에서 들은 이야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치재에서 대둔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전라도 쪽은 기암괴석으로 되어있고, 충청도 쪽은 밋밋한 산이기 때문이다.


왜 대둔산의 형태가 양편이 그리 달라진 것일까?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양도의 산이 달라진 것이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이 들려주신 대둔산의 전설

옛날에 지리산 산신과 계룡산 산신이 만났어. 바로 이 대둔산이 양산의 중간쯤이 되거든. 그래서 두 산신이 음식을 준비해서 이곳에서 만났는데, 지리산과 계룡산의 산신이 둘 다 여자였던 거야. 두 산신은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언니, 동생을 정하기로 했지. 그래서 내기를 해서 언지 동생을 정하기로 한거야.

두 산신은 하나, 둘, 셋을 세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대둔산에 있는 돌들을 바람으로 날려 상대 쪽으로 많이 날려 보내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했지. 다음날 아침 두 산신이 하나, 둘을 세었는데, 그런데 계룡산 산신이 셋을 세기 전에 미리 바람을 불어버린 것이야. 그래서 충청도 쪽 돌들이 모두 날아가 전라도 쪽에 쌓였다고 전하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럴 듯도 하다. 9월 4일 늦게 도착한 대둔산 이치재. 주말 이치재를 넘는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고 있지만,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아쉽기만 하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급적이면 들리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향교와 서원이다. 향교나 서원은 예전 교육기관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교육기관인 향교나 서원을 가급적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간을 내어 깊숙이 자리한 향교나 서원을 찾아가보았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향교나 서원은 꼭 문을 닫아 놓는 것일까? 그것도 보물 등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은 오히려 개방을 한다. 또 어느 지역을 가면 그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거개의 향교와 서원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다.


꽁꽁 닫혀있는 향교, 연락처 하나 없어

출장을 가는 길에 문화재 한 점이라도 조사를 할 양으로, 일부러 금산으로 길을 잡았다. 대둔산을 넘어 금산으로 가는 길은, 이치재를 넘어서 바로 진산면이 된다.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355번지에 진산향교가 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찾아갔지만, ‘역시나’ 였다.

문은 굳게 잠겨 있는데, 그 흔한 전화번호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 이렇게 굳게 잠가놓을 것 같으면, 전화번호라도 하나 남겨주던지 정말로 어이가 없다. 일부러 길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향교까지 찾아들어 갔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여기 관리자가 없느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하긴 요즘 사람들,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면 도통 신경을 쓰지 않는다. 토요일 오후라서 어디 연락을 할 수도 없다. 향교 담장 밖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러나 외형만 찍는 사진, 답답하기만 하다.

조선조 영조 51년에 복원한 진산향교

현재 충남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진산향교는, 원래는 조선조 초기에 현 진산중학교 자리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영조 51년인 17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6, 25 한국전쟁 째 훼손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보수하였다.



진산향교는 외삼문, 내삼문, 전교실,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인 명륜당과, 그 뒤편에 마련한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선철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폐를 모셔 놓고,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진산향교는 비탈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지었다. 향교를 바라보면 맨 아래 쪽에 외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명륜당이 자리한다. 진산향교를 찾아간 것은 바로 이 명륜당 때문이다. 누각 형태로 지은 명륜당은 딴 곳의 전각과는 다르다. 비탈진 곳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마루를 어떻게 깔았는지 볼 수가 없지만, 누각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에 온돌은 없고, 누마루의 형태로만 되어있는 듯하다. 누각은 계단을 이용해 오르게 하였으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이다. 문은 정면과 후면을 세 칸의 판문을 달아냈다. 좌우에는 한 칸의 문을 내었으며, 양편으로는 풍판을 달아냈다.

주심포계로 지어진 진산향교. 밖에서 아무리 돌아다녀 보았지만,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전혀 없다. 할 수 없이 담장 밖에서 명륜당 몇 장을 촬영하고 돌아서는 수밖에. 이럴 때는 정말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문화재는 가까이서 살펴보고, 느껴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꽁꽁 닫힌 향교와 서원, 과연 바람직한 행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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