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이별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만 같다. 물론 첫사랑에 성공을 한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다 그 이전에 알게 모르게 청소년기에라도 이별이라는 것을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마다 성격이 달라 이별이라는 것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고, 혹자는 쉽게 이별을 하기 때문에 마음에 공백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누구의 잘, 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고 이별은 마음이 아픈 것이다. 그래도 한 때나마 생각했던 사람, 자신과  함께 웃고 울던 시절을 가져봤단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왜 유독 가을이면 생각이 나는 것을까?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

사람들은 가을을 '분위기 있는 계절'이라고 한다. 분위기야 사람마다 잡기 나름이니 무슨 계절과 관계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유난히 가을을 타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나도 그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이다. 가을이 되면 문화재 답사를 더 열심히 하는 것도, 어찌보면 그 분위기 탓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같은 문화재라도 철마다 느낌이 다르다. 그런데 가을이 되면 문화재가 더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가을에 떠난 사람 때문인가도 모르겠다. 유별나게 가을을 좋아했던 사람. 가을 단풍을 보기 위해 하늘 높게 달린 재를 신바람나게 노래를 부르며 운전하며 올라가던 사람. 그리고 가을이 되면 술 한잔에 취해 세상 멋이 무엇인지를 알던 사람.

난 그 사람을 가을을 남기고 갔다고 늘 생각한다. 가을에 떠난 사람이라는 유행가 가사가 아니다. 정말 마음 속에 두었던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이 계절이 되면 더 더욱 생각이 난다. 함께 문화재 답사를 다니면서 가끔은 지루해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말없이 먼 길을 달려가고는 했다. '남자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못하면 죽은 인생'이라고 늘 버룻처럼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다.


"왜 가을엔 떠난 사람 생각이 날까요?"


스님께 물었다.

"가을이면 떠난 사람이 왜 더 생각이 나느냐고 물었나요?"
"예"
"그거야 가을이니까"


세상에 난 지금 선문답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왜 가을이면 떠난 사람 생각이 나느냐고 물었는데, '가을이니까'라는 대답이다. 그러더니 뒤이어 이런 말씀을 하신다.

"가을에 사람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죠. 그리고 계절이 가을이기에 더욱 생각이 나는 것이죠. 가을엔 모든 것이 떠날 준비를 하는 계절이죠. 만물이 그러하죠. 나뭇잎이 변하고 떨어진다는 것은, 곧 그것이 떠날 것이란 것을 의미하죠. 사람이나 세상사 모두가 떠날 때는 더욱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죠. 좀 추한 인간들을 빼고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별을 하게 되죠.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연인들이 가을에 가장 많이 이별을 한다고 하네요. 아마도 가을은 이별의 계절이기에, 그 계절이 오면 당연히 생각나는 것이겠죠"


그래서 사람들은 가을에 더 많은 이별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이별의 계절에 떠난 사람이 더욱 생각나는 것일까? 그러나 가을이기에 떠날 준비를 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왜 가을엔 사람들이 이별을 준비하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 스스로가 자연에 속해있기 때문이죠. 사람은 자연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사람과 자연은 상부하는 것이죠. 사람이란 것이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가을에 떠난 사람이 더욱 생각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마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만큼 가슴 아린 사랑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문제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혼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가을엔 떠난 사람은 더욱 마음 아플 수도 있거든요. 그런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사랑하던 사람들은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쪽이 마음 아파하면 저쪽도 이 가을에 마음 아파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아름답게 헤어진다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모르겠다. 어렵다. 가을에 떠난 사람이 더욱 생각나는 이유가 이렇게 복잡한 것인지 미쳐 몰랐다. 다만 한 가지 내 마음이 아플 때 그 사람도 마음이 아프다면, 정말 그런 것이라면 이제 더 이상은 마음 아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또 가을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생각조차 하지 말라니. 이 죽을 놈의 가슴 아픈 계절인 가을이.      

세상을 살면서 한 번도 안 해본 이야기 하나를 해야겠다. 체질적으로 연애이야기는 맞지도 않거니와, 표현력 또한 부족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도 머쓱하긴 하다. 그러나 지금도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참으로 아까운 여자를 놓쳤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를 당당하게 만드는 여자

지금이야 세상이 많이 바뀌어졌다. 하지만 사람의 심성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 아마 지금 세상에도 이런 여자가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총각 때니 아마도 내 나이가 20대 중반을 넘어섰을 때쯤으로 기억이 된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동료였으니, 벌써 40년은 지난 이야기이다.


한 직장에 있는 동료와 연애를 한다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늘 바라보고 있자면 마음이 설레기도 하니까. 또한 복도에서라도 마주치면 눈인사라도 하고 지나치지만, 그 또한 직장생활이 즐거울 수밖에 없다.

당시는 근무를 마치고 데이트를 한다는 것이, 분위기 좋은 곳을 찾거나 좋음 음식을 먹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가까운 곳에 있는 길을 걷는다거나, 음악다방에 가서 차를 한 잔 마시는 것이 고작일 때이다. 그런데 그렇게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고 계산을 할 때면, 내가 들고 다니는 책을 슬그머니 집어간다.

그리고는 핸드백을 열어 무엇인가를 책갈피에 끼워, 다시 책을 돌려준다. 책 표지를 열면 그 안에는 언제나 빳빳한 지폐 몇 장이 들어있다. 그것으로 계산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언제나 앞장 서 문을 나선다. 남자를 당당하게 만드는 행동이다.

무용을 하는 이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인가 위였다. 아마도 그 친구 집안에서 반대가 없었다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더 길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는 집 안의 반대라는 것이 그리 쉽게 넘길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결국 그 친구는 외국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지금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았을 텐데 말이다.

결코 앞서지도 나대지도 않는 여자

당시는 길을 걸을 때도, 지금처럼 찰떡 붙듯 왜 붙어 다니지 못했는지 모른다. 지금 젊은이들이 보면, 머 이런 바보 같은 연인이 다 있나 하겠지만. 길을 갈 때도 한 번도 앞장 서는 일이 없었다. 다만 앞을 설 때는 어쩌다가 길거리에 몇 개 없었던 육교라도 오르려면, 항상 한 발 앞서 육교를 오른다.

그런 행동이 하도 이상해서 물어보았다. 왜 육교를 오를 때는 나보다 먼저 오르는가를. 대답을 듣고 참으로 세상을 올곧게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자가 험한 길을 걸을 때는 남자가 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남들 보기에 남자가 여자를 보호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처음 여자를 새겨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두고두고 잊히지가 않는 것이, 아마도 이런 마음 때문인가 보다. 남자를 편하게 하는 여자. 그리고 남자를 당당하게 만들 줄 아는 여자. 이런 여자가 지금도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연애에 대한 글을 써보질 않아 표현력이 부족하여 고작 이렇게 밖에 표현을 할 수가 없지만, 아마도 이런 여자가 있다면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조건 잡아야 내 인생이 잘 된다는 생각이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새록새록 생각이 나는 그런 사람이다.

감악산 연수사. 그 이름만큼이나 어느 오랜 옛날, 꿈속에서 돌아본 듯한 정겨운 이릉이다. 6월 10일, 한 낮의 온도가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시간에, 감악산 연수사를 찾았다.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에 소재하는 연수사는, 해발 951m의 감악산 기슭에 자리한 절이다. 연수사를 찾은 것은 경내에 있는 수령 600년이 지났다는 은행나무가 보고 싶어서이다.

연수사는 신라 애장왕 3년인 802년에, '감악조사(紺岳祖師}‘가 현 사찰 남쪽에 세우려 했던 절이다. 이 연수사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감악조사가 절을 짓기 위해 서까래를 다듬어 놓았다. 그런데 잠을 자고 일어나니, 사람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큰 통나무 기둥이 사라진 것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 연수사 은행나무

서까래가 옮겨진 곳에 터를 잡은 연수사

아침에 주변을 살펴보니 현 연수사 대웅전 자리에 서까래가 놓여있어, 그 자리에 대웅전은 짓고 가람을 이룩했다고 한다. 연수사는 조선조 숙종 시에 벽암선사(1575-1660)가 사찰을 중수하고, 십여 사원을 지어 불도를 크게 일으킨 절이라고 한다. 연수사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바위 구멍에서 떨어지는 맛 좋은 샘물이 있으며, 극심한 가뭄에도 절대로 마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라의 헌강왕은 이 샘물을 먹고 중풍을 고쳤다고 전해지고 있어, 연수사의 물이 병 치료에 좋기로 소문이 나 있으며, 이 물은 사철 물 온도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 이 연수사를 오르기 전에 만나는 일주문을 바라보고, 좌측에 수령이 600여년이 지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여승이 심었다고 전하는 연수사 은행나무

예전이나 지금이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연수사 은행나무도 애틋한 세상사의 이야기 한토막이 전한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연수사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육백여년 전 어느 젊은 여인이 10살 먹은 자신의 유복자와 이별을 하고 비구니가 되면서 심었다고 전해진다.

이 두 모자는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전나무를 심고 어머니는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전나무는 1980년 경 강풍으로 부러져 없어지고 은행나무만 남았다는 것이다. 연수사 은행나무는 높이가 38m에, 밑동둘레가 7m나 되는 거목이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는 동서로 21m, 남북으로 20m 정도에 이른다.



물맞이 시설, 땀을 흘리며 찾아갔는데

연수사 일주문 곁에 있는 은행나무를 돌아보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양편에는 누군가 돌탑을 여러 개 쌓아놓았다. 이렇게 돌탑을 쌓은 사람은, 돌 하나를 놓으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대웅전 우측으로는 호리병에서 물이 흐른다. 아마도 저 샘물이 그 용하다는 물은 아니었는지. 대웅전 뒤편 산비탈에는 크지 않은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절을 한 바퀴 돌아 내려와 일주문 앞 암석에 잠시 다리를 뻗는다. 눈앞에 물 맞는 곳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180m. 천천히 걸어 산길로 접어든다. 아름드리 고목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린다. “딱딱딱딱...” 더운 여름 날 그 소리가 마치 청량음료 한 잔을 마신 듯한 기분이다.

저만큼 강돌로 쌓은 구조물이 보인다. 끈끈한 몸을 물이라고 적실 요량으로 달음질을 쳐 구조물 안으로 들어간다. 한편에는 여탕이라는 간판이 놓여있다. 그 반대편으로 들어가니 입구를 꺾어 안으로 들어가게 조성을 하였다. 당연히 물이 쏟아질 것으로 생각을 했는데, 물기 하나 없이 마른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물을 연결한 물길과 호스가 따로 떨어져 있다.




갑자기 목도 마르고 더위가 몰려온다. 괜히 이마에 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이다. 속으로 투덜대면서 돌아 나오는 길에, 저 밑으로 거창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별로 올라온 것 같지가 않은데, 꽤나 지역이 높은가보다. 심호흡을 한 번하고 산길을 돌아 나오니 은행나무가 보인다. 그 오랜 시간 저리고 꿋꿋이 서 있는 은행나무.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음이 후회스럽다. 저리도 불평 없이 오랜 세월을 서 있는데, 나는 그 작은 것 하나에도 순간적으로 혈기를 내다니. 또 한 번의 부끄러움에 허한 웃음을 허공에 날린다.

아리랑에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십리는 커녕 오리도 못가서 마음이 아픈 정자가 있다.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에 소재한 전북 문화재자료 재56호인 ‘오리정(五里亭)’이 바로 그런 곳이다. 오리정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려가는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다.

오리정은 목조 2층 건물로 1953년에 지어진 정자이다. 이 오리정은 광한루에서 처음 만난 이도령과 춘향이가 사랑을 나누다가, 이곳에서 이별을 하던 장소라고 한다. 춘향전 속에는 서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이 이도령이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가게 되자, 이곳까지 쫒아 온 춘향이가 애끓는 이별을 서러워하면서 이도령을 떠나보냈다는 것이다.


도로변에 선 오리정은 늘 한산해

오리정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17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보면 우측 길가에 서 있다. 좌측으로는 오리정 휴게소가 있고, 도로변에 2층으로 된 정자가 보인다. 정자 옆에는 수련이 피어잇는 연못이 있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쉴만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가끔은 지나는 사람들이 찾아 들어오지만, 늘 한산한 모습이다.

춘향가 중에서 오리정 이별대목을 보면 이곳에서 춘향이와 이도령이 얼마나 마음아픈 이별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고 있다. 생전에 명창 김소희 선생님께서 즐겨 부르시던 대목이다.




(아니리/ 말로 하는 대목) 방자 충충 들어오더니 "아 도련님 어쩌자고 이러시오 내 행차는 벌써 오리정(五里亭)을 지나시고 사또께서 도련님 찾느라고 동헌이 발칵 뒤집혔소. 어서 갑시다." 도련님이 하릴없이 방자 따라 가신 후 춘향이 허망하야 "향단아 술상 하나 차리어라. 도련님 가시는디 오리정에 나가 술이나 한 잔 드려보자."
(진양조/ 제일 늦은 소리) 술상 차려 향단 들려 앞세우고 오리정 농림 숲을 울며불며 나가는디, 치맛자락 끌어다 눈물 흔적을 시치면서 농림 숲을 당도허여 술상 내려 옆에다 놓고, 잔디 땅 너른 곳에 두 다리를 쭈욱~ 뻗치고 정강이를 문지르며 "아이고 어쩔거나. 이팔청춘 젊은 년이 서방 이별이 웬일이며, 독수공방 어이 살꼬. 내가 이리 사지를 말고 도련님 말 굽이에 목을 매여서 죽고지고!"
(자진모리 / 빠른소리) 내행차 나오난디 쌍교를 거루거니 독교를 어루거니, 쌍교 독교 나온다. 마두병방 좌우나졸 쌍교를 옹위하야 부운같이 나오난디, 그 뒤를 바라보니 그 때여 이 도령 비룡같은 노새등 뚜렷이 올라 앉어 제상 만난 사람 모냥으로 훌쩍훌쩍 울고 나오난디, 농림 숲을 당도허니 춘향의 울음소리가 귀에 언뜻 들리거날 "이 얘, 방자야. 이울음이 분명 춘향의 울음이로구나. 잠깐 가보고 오너라." 방자 충충 다녀오더니, "어따, 울음을 우는디. 울음을 우는디, 울음을 우는디..." "아 이놈아. 누가 그렇게 운단 말이냐?" "누가 그렇게 울겄소? 춘향이가 나와 우는디 사람의 자식은 못 보겠습디다."
(중모리/ 조금 늦은 소리) 도련님이 이 말을 듣더니 말 아래 급히 나려 우루루루루루.... 뛰어가더니 춘향의 목을 부여안고 "아이고 춘향아. 네가 처연히 집에 앉아 잘 가라고 말허여도 나의 간장이 녹을 텐디 삼도 네 거리 떡 버러진데서 네가 이울음이 웬일이냐!" 춘향이 기가 막혀 "도련님 참으로 가시오 그려. 나를 아조 죽여 이 자리에 묻고 가면, 영영 이별이 되지마는 살려두고 못 가리다. 향단아! 술상 이리 가져오너라."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몇 년째 없어

이런 슬픈 이별의 장소인 오리정이다. 춘향전에서 나오는 오리정 대목을 생각하면서 지은 정자 오리정. 이곳은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가는 이몽룡을 따라 쫒아오다가 신발이 벗어진 곳이라고 한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면 이곳에서 두 다리를 뻗치고 울음을 울었을까? 도로변에 나 있는 오리정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늘 볼 수가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목조 2층이다. 정자에 오르면 찻길 반대편으로는 펼쳐진 논이 있다. 이층으로 오르려는데 계단이 없다. 그냥 이층만 꾸며 놓은 것일까? 이층을 오르던 계단을 놓았던 자리는 있는데, 정작 계단이 없다. 이층 바닥에 난 계단을 놓았던 곳에는 칠이 되어있지 않아, 이곳에 계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계단이 사라진 것일까?




춘향이와 이도령이 이별을 서러워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이곳. 오리정은 그렇게 길가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아픈 이별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어져, 진한 그리움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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