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돕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나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질이 많다고 해서 남을 돕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남을 돕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지리산에서 만난 한 노스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대로라면 오늘 모인 사람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일 것이란 생각이다.

 

사단법인 출범에 따른 ‘사단법인 수원시 행복 · 캄 개소식’이 7월 8일(월) 오후 5시 30분, 수원시 인계동 944-4번지에 소재한 태산빌딩 3층 행복 · 캄 사무실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홍순목 행복 · 캄 회장을 비롯하여, 염태영 수원시장을 대신해 참석한 김영규 수원시 기획조정실장, 민한기 수원시의회 부의장, 윤건모 팔달구청장, 라수홍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 수원시 의회 김명욱, 박정란 의원 등 많은 축하객들이 참석을 했다.

 

 

순수민간봉사단체인 행복 · 캄

 

이번에 사단법인으로 새롭게 출범을 하는 ‘행복 · 캄’은 순수 민간봉사단체이다. 이들은 캄보디아에 있는 수원마을 지원사업을 계속하여 펼치고 있으며, 인도적 지원을 넘어서 사회, 경제, 환경, 문화, 교육 등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모든 것을 회원들이 공동으로 해결하고 있다.

 

행복 · 캄은 순수봉사단체 중 가장 값진 국제봉사를 하는 단체이다. 순수 민간단체 회원들인 행복 · 캄은 민간인이 주를 이루어 봉사를 하고 있으며, 수원시에서는 행정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과거 우리가 도움을 받던 나라를 도와준다는 자긍심을 갖고 봉사를 하고 있다는 (사)수원시 행복 · 캄의 개소식이 더욱 뜻 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마을의 정자나무와 같은 행복 · 캄이 되기를

 

홍순목 헹복 · 캄 회장은

“과거 우리가 도움을 받던 나라를 이제는 우리가 도와줄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성장을 했다. 벌써 몇 년째 캄보디아를 돕고는 있지만, 정작 우리들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무실조차 변변히 갖질 못했다. 오늘 이렇게 행복 · 캄 사무실의 개소식을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 매우 기쁘다. 그리고 이렇게 사무실을 낼 수 있도록 함께 해주신 회원님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는 마음껏 남을 돕는 행복을 수원시민 모두가 함께 누렸으면 한다.”고.

 

염태영 수원시장을 대신해 참석을 한 수원시 김영규 기획조정실장은

“예전에 어릴 적에 시골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습니다. 흔히 정자나무라고 부르는 오래된 나무죠. 이 나무들이 도시에 와서 살다가 시골을 찾아가면, 그 주변에 살던 주민들은 다 떠나도 그 나무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는 했습니다. 바로 행복 · 캄의 여러분들이 이런 정자나무의 역할을 해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바뀌어도 언제나 끊임없이 이웃을 위해 봉사를 할 수 있는 그런 행복 · 캄이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8년 째 봉사를 하고 있는 민간봉사단체 행복 · 캄

 

사단법인 수원시 행복 · 캄은 2007년부터 8년 째 캄보디아에 가서 봉사를 하고 있다. 2007 년 우물 42공을 개발하여 우물 1공을 판 것을 비롯하여, 2008년에는 마을회관을 신축 완공했다. 화장실 7개실도 신축했으며, 수원마을 초. 중학교 교실을 10개실 신축 완공했다. 2009 년에는 수원마을 도로 833.8m의 도로포장 공사를 완공했으며, 교량 및 농사 물막이 수문 공사도 했다.

 

그런가 하면 각종 물품지원사업도 병행했다. 캄보디아 시엠립주 프놈끄라옴 수원마을에 쌀 30.000kg과 1가구당 20종씩 그릇 세트 630 가구분을 지원했으며, 수원마을 주민들에게 갈비탕 2.500인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타월 2.000장과 학용품 및 슬리퍼 3.000켤레, 교복 950 벌, 상의 티셔츠 200벌을 봉사 후 주민들에게 전달했다.

 

2010 년에는 수해가정에 쌀 10.000kg을 25kg씩 400가구에 전달을 했으며, 2011년까지 각종 종합 현황게시판 시공 · 제작과, 송아지 40마리와 어미소 3마리를 전달하고, 자전거 6백대를 기증하기도 했다. 또한 그릇세트 500가구분과 생활용품과 세제 등을 전달하는 등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그 외에도 의료지원사업 6회에 4,580명 진료와, 이미용 봉사 2회에 1,250명에게 따듯한 마음을 전하기도.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개년에 걸쳐 위의 지원 외에도 상당한 노력을 했다. 민간단체가 찾아가서 지원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지만, 과거 우리가 도움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더 많은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을 했다고 한다. 김미선 행복 · 캄 사무국장은

 

 

“2007년 이전부터 수원시와 시민들이 환경이 열악한 캄보디아 시엠립주 프놈끄라옴 마을을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해왔습니다. 프놈끄라옴 마을은 410가구에 인구 2,800명 정도입니다. 2004년에는 수원시와 시엠립주정부와 자매결연을 체결했으며, 2007년에는 수원마을 후보지답사와 MOU를 체결했습니다. 2007년 6월 25일에 프놈끄라옴을 수원마을로 정하고, 2007년 12월 25일에 수원마을선포식을 개최했습니다.”라며

 

“그동안 저희들은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민간봉사단체가 이 정도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회장님을 비롯한 전 회원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수원시의 적극적인 행정지원이 있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저희 행복 · 캄은 더 오래, 더 많은 봉사를 프놈끄라옴 주민들에게 베풀어, 수원이라는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개막식이 끝난 후 비가 오는 가운데도 일층 현관 입구에서 가진 행복 · 캄의 현판제막식. ‘국제교류 캄보디아 수원마을 행복 · 캄’답게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한 수원마을을 만들어 가기를 기대한다.

예전에 MBC - TV 프로그램 중에 ‘행복주식회사 10,000원의 행복’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만원의 한계를 극복하는 초특급 프로젝트로, 스타들이 출연을 해 만원으로 한 주간을 버티는 프로그램이었다. 사회에서 돈의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으로, 연예인들이 출연을 해 재미를 더해 준 프로였다.

 

요즈음 장을 보러나가면, 만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만원을 들고 장을 보라고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고, 돈의 가치는 하락하고 말았다. 하루에 만원을 갖고 살라고 해도 힘든 지경이다. 밥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남는 것이 없을 정도이니, 만원의 행복이란 그저 꿈같은 이야기이다.

 

 

단돈 만원으로 하루를 살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루가 행복하려면 목욕을 해라,

일주일이 행복하려면 이발을 해라,

한 달이 행복하려면 결혼을 해라,

일 년이 행복하려면 새집을 구하라,

일생이 행복하려면 정직하라’

 

라는 말을. 사람들은 적어도 이발을 하고나면 일주일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 시골 장터에 가도 이발비가 최하 8,000원을 주어야 한다. 이발을 했다고 해서 일주일이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만원을 들고 이발을 했다고 하면, 그 다음 배고픔은 어떻게 해결을 할까? 그리고 하루를 무엇으로 소일을 할 것인가?

  

사실 요즈음 단돈 만원을 들고 하루를 보내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하루 종일 소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이 있다면 휴일 날 집안에서 전전긍긍하는 남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단 돈 만원으로 과연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가 있을까? 문제는 이발까지 하고 말이다.

 

 

단돈 만원으로 하루 종일 행복해 질 수 있는 곳

 

단 돈 만원을 들고 하루를 소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벽화 길로 유명해지고 있는 수원시 팔달구 지동이다. 실제로 11월 25일(일), 단돈 만원을 들고 오전부터 지동을 걷기 시작했다. 지동시장 순대타운 곁에 자리한 주차장 건너편 팔달새마을금고 영천지점에서 미나리광시장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수원식품(수원시 지동 400-8) 옆으로 작은 이발소 하나가 보인다.

 

‘즐거운 이발’이란 이 집이 바로 이발을 하는데 3,500원이다. 세상에 요즈음 이발료를 3,500원을 받는 곳이 어디 있을까? ‘즐거운 이발’의 주인은 이발경력이 45년이 지났다. 12살 어린나이에 이발소에 취직을 해, 사람들의 머리를 감기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요즈음처럼 사람들이 살기가 힘든데, 이렇게라도 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이발료를 싸게 했다는 것이다.

 

다만 즐거운 이발소에서는 면도를 해주거나 머리를 감겨주지 않는다. 머리는 본인이 직접 감아야하는데, 머리를 감을 경우 물 값과 수건사용료 500원을 더 내야한다. 그렇게 해도 이발료가 4,000원이다. 아침에 나가 이발을 하고 나니 시간이 점심때가 다 되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바로 옆 못골 시장으로 들어갔다.

 

 

국수 한 그릇 먹고 즐기는 벽화길

 

못골시장 안에는 ‘통큰 칼국수’집이 있다. 이 집에서는 잔치국수는 2,000원, 칼국수는 3,000원이다. 칼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이발을 하고 점심을 해결하는데 들어간 돈이 7,000원이다. 그리고 칼국수집을 나와 천천히 지동 벽화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발을 해서 기분이 좋은데다 칼국수 한 그릇을 먹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그리고는 바쁠 일이 없다. 어차피 만원을 갖고 하루를 소일해 보려고 나선 길이다. 천천히 지동 벽화길을 살피면서 돌아보니, 날마다 달라지고 있는 벽화골목이 행복감을 더해준다. 가다가 다리를 쉴 수 있는 평상 등이 있어 더 좋은 벽화길이다. 벽화 골목길을 돌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세상사는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 벽화골목 구경을 하고 나오는 곳에 핑퐁음악다방이 있다. 그곳에 들어가 직접 내려주는 커피 한 잔의 향에 취한다. 커피 값이 3,000원이다. 단돈 만원짜리 한 장을 들고 하루가 행복하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돌아본 ‘지동의 행복’은, 그렇게 만원으로 나를 기분좋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지동이 좋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사람을 기분좋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만원으로 즐길 수 있는 행복. 만원으로 이발을 하고, 점심을 먹고, 벽화길 구경하고, 커피까지 마실 수 있는 곳. 이곳이 진정한 만원의 행복이 아닐까? 생각할수록 기분 좋은 마을이다.

지동의 순 우리말 이름은 ‘못골’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 큰 연못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동새마을 금고에서 못골어린이 놀이터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좌측으로 이발소 하나가 보인다. ‘조원이발관’이라는 이 이발관은 이순재씨(남, 65세)가 운영을 하고 있는 이발관이다.

 

탤런트 이순재와 이름이 같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름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농을 해대고는 한다. 한국동란 때 부모님과 함께 월남을 하여, 못골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이발 기술을 배워 이발관을 시작한지가 벌써 40년이 지났다. 숱한 세월을 못골 사람들과 함께 애환을 달래면서 살아온 이순재 사장이다.

 

 

“그 땐 제일교회가 판자집이었지”

 

이순재 사장이 운영하는 이발관은 마을 어르신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꼭 이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소일을 하기 위해서 들려가고는 한다. 찾아오신 어르신들이 머리가 단정치 않으면 그냥 머리 손질을 하기도 한다.

 

“처음 이발관을 열었을 때는 마을에 어르신들이 한 150여 명 정도였는데, 40년 세월동안 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젠 한 열 분이나 남았나 봐요. 그 땐 이발소에서 위편으로 제일교회 있는 곳까지 집이 없었어요. 모두 밭이고 지금 앞으로 난 길 건너편은 논이었으니까요. 그 때는 제일교회도 판자였었어요. 그러다가 이렇게 지금처럼 큰 대형교회가 되었지만.”

 

사람이 좋아 그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 이 이발관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지만 안을 들어가면 40년 전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40년 세월의 손때가 묻어있다.

 

 

40년 세월을 느낄 수 있는 조원이발관

 

“예전에는 손님들도 참 많았어요. 많을 때는 혼자서 하루에 20명을 이발을 한 적도 있었고요. 그 때는 정말 젊어서 그런지 정신없이 일을 하고는 했는데. 이런 적도 있었어요. 제가 낚시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낮에는 이발을 하고 밤에는 낚시를 다니고는 했죠. 그러다가 보니 낮에 이발을 하러 손님이 오셨는데, 그만 졸고 있었나 봐요. 어르신이 피곤하면 잠시 들어가 눈을 붙이고 나오라고 하시데요.”

 

그래서 방으로 들어가 잠시 눈을 부친 것이 두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발을 하러 오신 어르신은 그 자리에 앉아 계시더라는 것. 그만큼 못골의 옛 어르신들은 정이 넘쳤다고 이야기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동이 너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지동에는 어르신들 중에 남자가 별로 없어요. 모두 다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마나님들만 남아 계시죠.”

 

 

40년 세월을 많은 사람들과 접하다가 보니, 마을의 집집마다 그 속을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조원이발관은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속내를 풀어내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이발을 하러 오거나, 그저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이곳을 찾았거나 아무래도 좋았다는 것.

 

“어르신들이 오시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시기 때문에, 마을 사정을 잘 알고는 했죠. 어느 날부터인가 어르신들이 한 분씩 보이지 않는 거예요. 세상을 떠나신 것이죠.”

 

한 자리에서 40년 세월을 남의 머리를 만지며 살았다. 그리고 어르신들과 함께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아직 못골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는지. 이발소 안에는 나무로 열을 내는 난로가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있다. 40년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 있는 셈이다.

 

“저희 집에는 아직도 220V 전기를 쓰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선풍기고 무엇이고 다. 40년 동안 함께 이 이발관을 지켜 온 것들이죠. 그래서 쉽게 바꿀 수도 없고요”

 

그랬나보다. 곁에서 대담을 듣고 있던 마을분이 한 마디 거든다. 그 말에서 40년 세월을 못골 사람들의 머리를 만지며 그 애환을 함께 한 것이 아닐까?

 

“참 오래되었죠. 저 의자도 아마 처음 문을 열 때 그대로인 것 같아요. 타일을 붙인 저 세면대도 그 때 그대로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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