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란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조까지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립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는 향학이라고 했다. 향교는 전학후묘의 구성으로 앞에는 교육을 하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뒤편으로는 공자를 비롯한 명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인 문묘가 있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516-2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32호인 ‘정산향교 (定山鄕校)’가 소재한다. 정산향교를 세운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특한 향교 입구인 청아루

 

정산향교의 구성은 배우는 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를 비롯하여 청아루와 전사청이 있고, 제사 공간으로 공자와 우리나라 성현 27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와 그의 제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산향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많이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졌다. 현재는 봄, 가을에 제향을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정산향교의 특별한 구성은 입구에 있는 누각인 청아루이다. 목조건물로 된 향교 입구인 청아루는 아래로는 삼문을 내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형태이다. 이 청아루는 밖으로만 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쪽으로도 또 문이 있는 이중문으로 꾸며져 있다.

 

 

장맛비 속에 찾아간 정산향교

 

벌써 정산향교를 다녀온 지가 20여일이 지났다. 문화재 답사란 그 특성상 다녀왔다고 바로 글을 올릴 수가 없다. 한 번 답사를 나가면 꽤 많은 양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역과 종류가 다른 문화재들을 한꺼번에 소개한다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결국 한 번 답사를 다녀오면, 누구 말마따나 곶감 빼 먹듯 할 수밖에.

 

7월 14일 돌아본 충남 청양군. 정산향교는 답사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장맛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들이붓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그런 날 잠시 비가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정산향교 입구에 도착했다. 아무리 여름날이라고는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은 일찍 날이 저문다. 오후 5시 경이었지만, 벌써 어둑한 기운이 감돈다.

 

 

향교는 대개 그 담장 외곽에 붙어있거나, 가까운 곳에 관리를 하는 집들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주변을 돌아보아도 그럴만한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 빗속에서 사람들을 만나 묻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포기를 해야 하나? 하지만 이 빗길에 멀리 달려온 향교가 아닌가. 그냥 돌아갈 수가 없다. 할 수없이 담장 밖으로 돌아보는 수밖에.

 

수령 640년의 은행나무에게 묻다

 

전국에 있는 향교를 찾아가면 대개 고목이 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들은 향교와 그 역사를 같이한다. 은행나무는 향교의 경내에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정산향교의 경우에는 주변 높은 곳에 은행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640년에 높이는 18m, 밑동의 둘레가 5.2m가 넘는 거목이다.

 

 

은행나무 쪽으로 올라가면 정산향교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은행나무와 정산향교의 관계는 무엇일까?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향교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할 수 없이 밖에서나마 향교를 살펴보는 수밖에. 담장 가까이 다가가려니 자라난 풀들이 엄청나다. 풀 더미를 헤치고 담장 가까이 가서 향교를 살펴본다.

 

정산향교는 딴 곳과는 달리 특이하게 조성을 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성전의 경우 외담 안에 다시 내담을 쌓아 놓았다. 또 측면 담벼락에도 격자창을 내어 놓았다. 다행히 향교의 관리자가 대성전 위편 담장 밖의 풀을 깎아놓아 주변을 돌아보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장맛비 속에서 찾아간 청양 정산향교. 비록 안을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었지만, 밖으로 돌면서도 향교의 곳곳을 살펴보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향교 담장 밖을 한 바퀴 돈 다음에 차에 오르자, 다시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가을에 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었을 때,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1495-1에 소재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167,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이다. 은행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과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수령이 8001,0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2m, 가슴높이의 둘레가 16.27m로 마을 인삼밭의 중앙에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전체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일부 가지는 부러질 염려가 있어서 받침대로 받쳐져 있다. 주변에 인삼밭이 있어 걱정스러운 것은, 농약을 심하게 뿌리는 인삼밭이 있어, 자칫 은행나무에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지팡이가 변해 이 나무가 되었다고?

 

가을이 되면 노란 단풍이 매우 아름다운 반계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그동안 반계리 은행나무는 지나칠 때마다 찾아가던 곳이다. 늘 그 멋진 나무를 보고 오면, 무엇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이다.

 

522() 찾아간 반계리 은행나무. 멀리서 보아도 그저 나무 한 그루가 작은 동산만큼이나 커 보인다. 아우들과 함께 찾아간 반계리 은행나무. 한 나무임에도 몇 그루가 모인 것처럼 중앙을 비워 놓고 가지가 솟아 있다. 중앙에 빈 공간은 장정 한 사람이 앉아보아도 남는 면적이 있을 정도로, 그렇게 땅 속에서 솟아 난 가지가 퍼져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살던 성주 이씨의 한 사람이 나무를 심고 관리하다가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큰스님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물을 마시고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 지팡이가 자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고목에 대한 전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뜬금이 없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은행나무 안에 흰 뱀이 살고 있어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전국에 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에는 왜 흰뱀이 살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이런 전설이 터무니없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 주민들이 위하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간다. 반게리 은행나무는 가을에 단풍이 한꺼번에 들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정말 이 수령이 맞나요?

 

반계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반계리 주민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왔다. 은행나무 안에 들어가 팔을 벌리고 앉아있는 아우는 마치 은행나무에서 기를 받는 듯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옛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자네는 늙지 않을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스님?”

! 이 사람아 매일 그렇게 오래된 나무, 천년 세월을 뛰어 넘은 석불과 석탑. 그런 것들을 만나면서 그 기운을 받고 살았으니 늙지를 않지

 

어느 노스님의 말씀이다. 글쎄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우리 문화재가 좋아서 20년이 넘게 전국의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찾아다닌 문화재를 담은 자료가 벽면 하나를 채우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농 삼아 이야기를 한다.

 

 

 

아마 저 CD 불 지르면 바로 죽어 버릴걸요

 

방안 가득 체우고 있는 문화재를 담은 자료를 보고 지인들이 하는 말이다. 웃고 말지만 정말 그럴 것이란 생각이다. 가끔 문화재에 대한 기사를 쓸 때마다 생각을 한다. 이런 은행나무가 알려준 세상사는 방법이다. 천년 세월이 지나도 변치 말라는. 아마도 반계리 은행나무를 만나지 않았다고 하면 어찌 그 오랜 세월을 문화재를 만나러 전국을 돌아다녔을까?

 

나무 한 그루에서 배운 세상살이가, 지금의 나를 지탱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가 늘 고맙기만 하다. 반계리 은행나무를 만날 때마다 속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정말 고맙소. 그 자리를 지켜주어서. 인간이란 것들은 아침저녁으로 잘도 변하는데, 그렇게 천년 세월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리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소.”

누마루에 앉아 위로 올려 건 창문 아래로 보이는 경치가 절경이다. 수령 450년의 고목이 된 은행나무 너머로 북한산의 바위가 병풍처럼 드리워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파란 잔디 위에서 한가롭게 뛰노는 개 몇 마리가 평안함을 안겨준다.

 

주인이 타 주는 향이 좋은 차 한 잔이, 오히려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의정부시 정암동 19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3호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 비록 사랑채 한 채만 남아있지만, 그 한 채 만으로도 옛 정취를 가늠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 사랑채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서계(西溪) 박세당(1629 ~ 1703)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이다.

 

서계 선생이 집필을 하던 곳

 

서계 선생은 인조 7년인 1629년에 이조 참판을 역임한 박정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1세인 현종 1년인 1660년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 겸 경연 시독관, 함경북도 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라는 한창 조정에 나아가 일을 할 나이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穡經)」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思辯錄)」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졌었다고 한다. 사랑채 앞에 서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자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사랑채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멋을 겸비한 사랑채,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정기를 느낄 수 있어

 

서계선생의 사랑채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을 지나 금강산으로 여정을 잡았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들려 차 한 잔에 피곤한 다리를 쉬어갔기 때문이다. 이곳은 금강산으로 가는 곳의 길목으로, 누마루에 걸터앉으면 앞으로 펼쳐지는 북한산의 절경이 장관이다.

 

 

 

사랑채는 모두 네 칸 반 정도의 팔작집이다. 집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반 칸은 광을 달아내고 두 칸 반을 방을 드렸다. 방 앞으로는 마루를 넓게 놓아 생활공간을 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 좌측의 한 칸은 층이 지게 누정을 조성하였다.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올린 누정은 삼면으로 들창을 내어 멋스러움을 더했다.

 

아마도 서계선생은 그 누정에 올라 책을 쓰고, 사람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담소를 했을 것이다. 들창을 모두 열어젖히고 서계 선생의 후손인 집 주인이 타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아마 예전 선생이 이곳에 기거를 했을 때도 이렇게 나그네들과 차 한 잔으로 세월을 낚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뒤편에는 하석 박정의 영정이 있어

 

사랑채 뒤편으로 돌아가니 좁은 협시문에 ‘서계박선생진영각’이라 쓰여 있다. 담으로 돌아 주인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가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7호인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하석 박정의 초상화 두 점이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는 잘 보여주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영정은 외부인에게는 보여주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볼 기회가 거의 없다.

 

하지만 7월 17일 찾아간 이 고택에는 동행자 중 한 분이 문화재위원이면서 집 주인과 친분이 있어 영정 두 점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박정은 광해군 1년인 1619년에 문과시험에 합격을 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남원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영진각에 모셔져 있는 두 점의 초상화 중 한 점은 낮은 사모를 쓰고 푸른색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영정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에 걸린 이 그림은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 얼굴을 그렸다. 다른 하나의 영정인 우측의 영정은 서계의 초상화이다. 숙종 연간이 1690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창주 조세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조세걸은 숙종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를 한 인물로, 서계에게 팔선도를 증정하기도 했다. 서계와는 교류가 깊어 석천동을 자주 방문하기도 했다. 이 초상화를 주선한 사람은 서계의 아들인 박태보로 알려져 있다. 

 

 

지난 해 불이 나 많은 자료가 전소되어

 

사랑채와 두 점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진각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기둥과 벽 등에 불탄 흔적이 보인다. 지난 해 12월에 누전으로 인한 불이 났다는 것이다. 소화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작동이 되지 않아 사랑채 옆에 있던 서가와 진영각 뒤편의 창고가 전소가 되어버렸단다.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볼썽사납다.

 

그 무엇보다도 서가에 보관하고 있던 300여권의 고서가 불에 전소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은 그 책들이 다 타버린 것으로 인해 많은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다. 금강산으로 향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쉬어가던 곳. 서계 박세당의 사랑채. 오늘 그 곳에 앉아 옛 선인들의 마음을 함께 느껴본다. 아마도 북한산의 기운이 이 집으로 응집이 되어, 이곳에서 새로운 기운을 얻은 것은 아니었을까?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이곳을 찾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반계리 은행나무. 가을철에 보면 반계리 은행나무의 진면목을 볼 수가 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천연기념물이 되려면 이 정도 위용은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반계리 은행나무의 높이는 34.5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는 자그마치 17m에 달한다. 동서로 38m 정도에 남북으로는 31m 정도의 거대한 나무다. 밑동의 둘레만 해도 15m 정도이니 이 나무의 크기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수령은 800년이 지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을엔 주변이 온통 노랑색

 

이 나무가 가을에 물들기 시작하면 그 멋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반계리 은행나무만큼 무성한 나무가 흔치 않다. 또한 균형이 잘 잡혀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중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이 나무를 즐겨 찾는 이유는 땅위로 솟아나온 나무의 뿌리 때문이다. 밑동을 둘러 쌓고 있는 돌출된 뿌리들을 보면, 마치 용틀임을 하는 듯하다.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용 몇 마리가 서로 은행나무를 차지하려고 자웅을 겨루는 모습이다. 그래서 나뭇잎이 무성할 때가 되면 모든 일을 마다하고 반계리로 달려간다.

 

 

 

어깨를 펴고 하는 자랑. “나 천연기념물이야”

 

멀리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반계리 은행나무가 보인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그 위용이야 어디로 갈까? 나무 밑으로 들어가 위를 쳐다보니, 세상에 정말 아름답다. 나무 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하나가 된 은행잎들이 몽환적이다. 그 너머 아직도 초록빛을 띤 은행잎들도 함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밑에서 올려다 본 은행나무. '아~' 하고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아직은 노랑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지만,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다. 아니 오히려 햇볕사이로 보이는 초록색의 조화가 만들어진 멋진 색깔이 더욱 아름답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이 마을에 살던 성주이씨 가문의 한 사람이 심었다고도 하고, 이곳을 지나 가던 법력 높은 대사가 물을 마신 후, 짚고 가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전설이야 어느 곳에나 있지만, 은행나무 안에 흰 뱀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계리 은행나무는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또한 은행잎이 한꺼번에 물이 들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랜 성상의 흔적, 나무 혹

 

이 반계리 은행나무를 살펴보면 여기저기 혹 같은 것이 돌출이 되어있다. 그만큼 오랜 성상을 살아왔다는 징표인가 보다. 나무의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은데, 전하는 전설마저 신비하다. 그래도 아직 생육상태가 좋아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 가을 단풍이 들 때쯤 찾아간다면, 정말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을이 되면 사진깨나 찍는다는 분들이 전국 각처에서 모두 모여 든다. 시간을 내어 달려올 수 있도록 아름다운 나무이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한 그루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것은 그냥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아무 나무가 천연기념물이 되는 것이 아니여."

고려 성종은 제6대 군주로 재위기간은 981~997년이다. 벌써 천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다.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에 소재한 청안초등학교 교정에는 천살이 넘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165호이다.

 

은행나무는 생명이 길어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병충해가 없으며 잎을 피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을에 단풍이 들 때까지, 변화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로수 등으로도 많이 심는다. 우리나라에는 용문사 은행나무,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등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은행나무들이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

 

잎이 없어도 서있는 자체만으로도 압권인, 천살을 넘긴 청안초등학교 교정 안 은행나무. 나무의 높이는 17m 정도에, 가슴 높이의 둘레가 7.4m이다. 동서로 뻗은 가지는 16.5m, 남북으로도 17.5m여나 된다. 이렇게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학교 교정 안에 우뚝 서 있다.

 

"아저씨 은행나무 찍으러 오셨어요?"

"그래."

"그거 왜 찍어요?“

"응, 신문에 내려고."

"그럼 교과서에도 실려요?"

"아니. 신문에만 실려."

"교과서에 실려야 하는데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천년을 넘게 살았잖아요. 이렇게 큰 나무는 교과서에 실어주어야 한데요."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이들이 쫒아와 하는 이야기다. 천연기념물이 교정에 서 있다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자긍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어린 마음에 천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가, 대단하게 보였을 것이다. 비록 잎을 다 떨어뜨리고 있기는 하나, 천년 세월을 살아 온 은행나무답게 당당하다.

 

성주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의 상징

 

고려 성종 때 이곳의 성주가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성내에 연못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청당(淸塘)'이라는 못을 파고 그 주변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 나무들 중에 하나가 살아남은 것이, 현재 청안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은행나무라는 것이다.

 

괴산군은 고려 성종 14년인 995년 지방제도 정비 후에, 충주, 청주 등 13주 45현으로 구성된 중원도(中原道)에 속했다. 이후 현종 때 괴산지역은 충주목의 속군인 괴주군과 청주목의 속현인 청천현, 청안현, 청당현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이 청당현이 연못이 있는 이 지역을 포함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주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은행나무는, 지금도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돌보고 있다고 한다. 더욱 학교 교정 안에 서 있는 이 은행나무는, 아이들에게도 큰 자랑거리이다.

 

귀 달린 흰 뱀이 사는 은행나무

 

청안 읍내리 은행나무 속에는 귀 달린 흰 뱀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를 해하는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전설이 전해지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성주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나무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다.

 

 

나무를 돌아보니 여기저기 수술을 한 자욱이 보인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는 밑동서부터 잔 가지들이 무수히 솟아나 있다. 그리고 중간에도 잔가지들이 솟아나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고려 성종 때 이 나무를 심은 성주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저 나무가 성주라면, 그 숱하게 자라나고 있는 가지들은 백성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천년 넘은 세월을 그렇게 마을 주민들에게 상징처럼 살아온 은행나무. 2월 찬 날에 아직 밑에는 눈이 녹지 않은 채로 있지만, 그 자태만큼이나 당당하다. 앞으로 또 천년을 저리 살아간다면, 그 때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잎이 무성한 날,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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