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은 도시계획자이면서 동시에 개혁자이기도 했습니다. 수원 팔달산에 걸쳐 화성을 축성한 정조대왕은 팔도의 상단을 수원으로 불러 모아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상권을 강화했습니다. 더불어 둔전과 많은 물을 저수할 수 있는 저수지 등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30일 오후 3시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화성박물관 기획전시실 앞에서 열린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기획전에 참석한 이재준 수원시 제2부시장은 정조는 바로 도시계획자라고 했다. 이어서 당시에는 농업은 첨단산업이었다고.

 

 

우리나라는 60~70년대만 해도 농업이 첨단산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조대왕의 업적이 있어 그동안 수원에는 지금은 이주해 간 농청진흥청이 들어왔고, 서울대 농과대학이 자리한 전국 최고의 농업도시가 되었습니다. 이제 농촌진흥청이 이주해 간 자리에는 2,200억을 들여 농업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관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 30일부터 201521일까지 전시가 되는 농업개혁의 산실특별기획전은 농업도시 수원의 전통을 재조명하고 수원시와 농림축산식품부가 함께 준비 중인 농어업역사문화전시체험관건립에 내실을 기하고자, ‘수원화성 착공 220주년 기념으로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화성> 특별기획전시를 마련한 것이다.

 

 

정조대왕의 애민정신이 돋보이는 윤음

 

이날 특별기획전의 기념식은 먼저 가야금 독주와 판소리 등 식전행사로 시작했다. 이어서 자리에는 이재준 제2부시장과 수원시의회 김진우 의장, 이낙천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이사장, 김충영 수원시 청소년 육성재단 이사장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했다. 기념촬영과 테이프 커팅을 마친 일행은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각종 자료들을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는 화성유수 서유구의 자손들이 기증한 자료들도 함께 전시가 되어있으며, 정조의 농업정책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는 화성 성역을 중지시키는 윤음 등도 국문으로 번역해 전시를 하였다. 정조 18년인 1794년 화성 축조가 한창일 때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정조는 그 해 1019일 신하들과 화성성역의 진행여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성역을 중단할 것을 명하였다. 대신 화성 북쪽의 평평하고 비어있는 땅을 개간하고, 관개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면 옥토가 되어 생산량이 높아질 것이므로 이 비용을 이용하면 화성 축성 공사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을 예견하였다. 이 윤음을 따라 내하전 12,666냥으로 둔전을 개발하고, 5,690냥으로 만석거라는 수리시설을 축조한 것이다. 윤음의 내용을 보면

 

<화성성역이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정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원침을 봉안하면서부터 유수부로 승격시켜 체모를 높이고 행궁을 설치하여 우러러보며 의지하는 마음을 붙였다. 성지(城池)를 설치함은 기호의 요충지 때문이기도 아니었고 5천 병마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에 경사들과 모의하지도 않고 재정의 출입을 묻지도 않고서 경영하기 시작하여 이곳에 성을 쌓고 참호를 팠는데, 남북의 망루가 장차 완공을 고하게 되었다. 만일 흉년이 들지 않아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았다면 이 역사는 계속해 나아감만 있고, 미루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자료 구비한 농업정책 기획전 돋보여

 

기획전에는 조선후기 이앙법의 방법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수리관개와 관련된 농기구와 함께 <홍재전서><응지농서>, 5.6m에 달하는 <윤음><천일록>, <화성성역의궤> 등의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농학자로, 1836년 화성유수로 부임하여 농업개혁가로서 변모를 실현한 사유구의 관련유물 등이 전시되고 있다.

 

우리 수원이 농업의 도시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 이렇게 정조대왕의 농업정책에 관한 많은 자료를 보고나니 새삼 내 고장에 대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 농어업역사문화전시체험관이 완공되고 나면 전국에서 가장 훌륭한 농업에 관한 자료를 갖고 있는 수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개관식에 참가한 한 시민은 이런 좋은 자료를 전국의 농생명과학고나 농업과 관계되는 일을 하는 담당자들이 한 번씩 둘러보았으면 좋겠다고. 더불어 농기구 등도 함께 전시가 되고 있어 배움에 있는 학생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한다.

전하, 저곳에 저수지를 만들면 족히 1만 명은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정말인가? 그러면 저곳에 저수지를 만들라

 

1795년 능행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장안문에 오른 정조대왕과 화성유수 조심태가 나눈 대화 중 일부이다. 만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저수지를 조성하기를 상소한 조심태. 그리고 그 때 조성한 저수지가 바로 만석거이다. 정조는 이 외에도 화성 주변에 만석거와 축만제, 만년제 등을 조성해 치수를 통한 과학적인 농경을 실시한다.

 

현재의 수원을 농업도시 수원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수원이 어떻게 농업도시가 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 것이다. 하지만 수원이야말로 과거 정조시대부터 지금까지 농업개혁의 도시이자 농업연구의 도시이다.

 

정조는 정조 17년인 1793년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오랜 시간 구상해 왔던 개혁을 시도하였다. 도시의 규모와 위상을 한양의 도성과 버금가도록 만들고 최고의 축성기술을 이용하여 공격과 수비에 용이한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한양 육의전 외에 화성에도 시전을 설치하여 상업발전을 도모하였으며, 농업기반시설을 조성하여 농업 진흥을 이루도록 독려하였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이상도시를 모범적으로 만든 뒤 이 모델이 전국적으로 파급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곳 수원화성은 정조가 만들고 싶었던 조선의 축소판이며 1794년은 그 첫발을 디딘 기념비적인 해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특별기획전을 준비하였다. 농업도시 수원의 전통을 재조명하고 수원시와 농림축산식품부가 함께 준비 중인 농어업역사문화전시체험관 건립에 내실을 기하고자, ‘수원화성 착공 220주년 기념으로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화성> 특별기획전시를 마련하였다.

 

 

정조대왕이 꿈꾼 나라는 강한 국가였다.

 

조선조 제22대 국왕으로 등극한 정조는 정조 2년인 17786, 당시 사회가 마치 병든 사람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병든 사회를 타개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개혁과제를 대내외에 천명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경장대고(更張大誥)’이다. 백성이 풍요롭게 살고, 인재를 키워 나라를 살찌우며, 군사제도를 강화하여 국방력을 키우고, 재물의 씀씀이를 다져 재정이 튼튼한 나라. 정조가 꿈꾼 나라는 이 네 가지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은 농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국가의 재정수입도 그 해 농사의 풍흉에 달려 있었다. 정조는 어느 임금보다 농업 생산성을 안정시키고 증대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매년 정월에 권농교(勸農敎)와 권농윤음(勸農綸音)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농사지을 것을 권하고, 지방관들에게는 이에 대한 행정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당대의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종합하기 위해 전국의 선비들이 정리하여 올린 응지농서(應旨農書)’를 바탕으로 농서대전農書大全편찬을 추진하였다.

 

 

만석거부터 조성하기 시작

 

정조는 1794년 화성성역을 일시 중지하고 대신 둔전을 만들고 화성유수 조심태가 간한 만석거(萬石渠)’라는 수리시설을 축조하도록 명령하였다. 만석거 축조로 인해 화성 장안문 밖의 드넓으면서도 척박했던 대유평은 수전지대로 변했으며 극심한 가뭄도 무사히 극복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화성에서 1798만년제(萬年堤)’, 1799년에는 축만제(祝萬堤)’가 연이어 축조되었으며, 수리시설 축조와 더불어 개간된 둔전에서 얻은 소출은 화성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정조대 서둔동 일대에 조성된 농업기반시설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는 권업모범장과 농림학교가 들어섰으며, 해방 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농촌진흥청이 설립됨으로써 수원은 농업연구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30일 오후 3시게 개막식을 갖고 201521일까지 특별기획전으로 전시가 되는 수원화성 착공 220주년 기념’ <정조시대 농업개혁의 산실, 수원화성>전에는 수원화성의 수리시설과 둔전에 관한 자료는 물론 3D 영상물을 제작하여 척박했던 땅을 개간하여 둔전을 만들고, 수리시설을 통해 풍작을 이루는 모습을 이야기하듯이 풀어냈다.

 

특히 영상제작을 위하여 일제강점기 지적도 등을 검토하여 수원의 옛 지형과 물길을 고증하였다. 수리관개와 관련된 농기구와 함께 연출하여 보다 입체적인 상영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번 전시회에는 <홍재전서><응지농서>, 5.6m에 달하는 윤음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농학자로, 1836년 화성유수로 부임하여 농업개혁가로서 변모를 실현한 사유구의 관련유물 등이 전시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