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는 번암면 소재지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남노령이 주산을 이룬 대성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조선조 중엽에 홍성 장씨들이 이주해 집단마을로 취락이 형상되었다. ‘노단이란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의 집터와 같은 명당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노단 마을 도로변 대성산 자락에는 겹처마 우진각으로 지은 육각형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정자는 길에서 보면 조금 위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낮은 담장에 일각문을 내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를 오르는 길 한편에는 반계정(磻溪亭)’이라 음각한 돌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도 깨어진 바위에 반계정이란 글이 쓰여 있다.

 

 

 

바위에 새겨져 있던 반계정 표석

 

원래 이 깨어진 바위에 새겨진 반계정이란 글씨는,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우측 도랑끝의 암벽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1978 ~ 198019번 도로의 개설로 인하여 방치되어 오던 것이라고 한다. 2007년 반계정 아래에 있는 우물을 정비하던 중, 본 표석이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바위를 원 상태로 복원을 하고자 했으나, 오랜 시간 풍화로 인해 보존하기가 어렵자, 탁본을 하여 현재의 돌에 그대로 새겨 넣었다고 한다. 200710월의 일이다. 계단을 올라 일각문 안으로 들어선다. 안에는 육각형으로 지은 누정이 있다. 정자로 오르는 계단은 장대석을 겹쳐 놓았다.

 

 

 

취헌의 정자 반계정

 

취헌 장안택 선생은 자는 사유이고 아호는 취헌이다. 선생은 만인을 구제하는 제세구휼을 일생의 업으로 삼고 몸소 실천을 하였다고 한다. 취헌 선생의 이러한 마음은 전국 각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구제를 하던 장안택 선생은 급변하는 세태의 변천을 개탄하며, 세상을 등지고 자연에 몸을 묻고자 생각했다.

 

그래서 지은 것이 대성산 바위 암벽 아래에 반계정이다. 지금이야 앞으로 도로가 나 있지만, 아마 이 정자를 지었을 때는 바위와 앞으로 흐르는 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자였을 것이다. 선생은 이 정자에서 자손들을 교육시키며 여생을 보냈다. 반계정이란 바위와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상징하는 뜻이다.

 

 

취헌 장안택 선생은 조선조 철종 14년인 1863년에 태어났다. 선생은 조선 후기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사업가이다. 부친은 동몽교관인 장석룡이며, 조부는 남요 장홍규이다. 선생은 조부로 부터 예의범절과 학문을 닦았다. 선생의 집은 장부자집으로 통했다. 종손인 선생은 적선을 많이 하였다.

 

고종 31년인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는, 관군에 쫓긴 농민들이 장수 번암까지 피신해 이곳 번암면이 농민군들의 집결장소가 되었다. 선생은 농민군으로 인해 민폐가 일어나자, 이들에게 술과 고기 등 음식을 베풀어 민폐를 줄였다. 관군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음식을 베풀어 민폐를 줄이기도 했다.

 

 

자손들이 기억하는 반계정

 

반계정 뒤편 암벽에는 장안택, 반계정이라고 음각한 글이 있다.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자 병준이라 새개 넣었다. 조상의 정자를 기리기 위해 후손이 새겨넣은 글씨이다. 이 반계정은 1800년에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장수군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최근에 보수를 한 듯하다.

 

정자는 육각의 모든 면에 문을 달았다. 아직은 보수 중인 듯 문은 모두 떼어내 한 편에 쌓아놓았다. 정자 안에는 반계정 운이란 선생이 지은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취헌이란 편액이 있다. 정자는 입구를 뺀 전면에 난간을 둘렀다.

 

 

우진각으로 지은 정자는 밑 안으로는 장초석으로 된 석주를 세우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운 뒤 누마루를 깐 정자를 올렸다. 그리고 겹처마를 받치기 위해 활주를 세웠는데, 아래편은 육각형의 장초석을 세운 후, 그 위에 육각형의 기둥을 받쳤다.

 

취헌 장안택 선생. 평생을 자선사업가로 살다간 마음을 담고 있는 반계정. 아직은 주변이 부산스럽기는 해도, 그 위에 올라 선생의 마음을 담아간다. 세상이란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열미리 산 174번지는 곤지암천을 끼고 있는 곳이다. 98번 도로를 따라 곤지암에서 여주군 산북면 쪽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에 '백인대(百仞臺)'라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백인대가 무엇인지 궁금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안에는 축산물등급판정소가 있다. 그 앞을 지나면 곤지암천이 흐른다. 그곳에서 아래쪽으로 보니 건너편에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작은 정자가 하나 서 있다. 바로 백인대이다.

백인대를 바라보면서 밑으로 내려가니 소의 분뇨를 버린 듯 냄새가 코를 짜른다. 아직은 눈이 녹지를 않고 설 연휴에 며칠간 날이 푹하다 보니, 개울에 얼었던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른다. 건너갈 곳이 마땅치가 않다. 그렇다고 포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할 수 없이 돌을 집어 물에 던져 넣었다. 수십 개의 돌을 큰 돌 중간에 던져놓고, 그 돌을 밟고 기우뚱거리며 겨우 내를 건넜다.



송시열이 제자와 강학을 논하던 곳

물을 겨우 건너고 보니 이번에는 녹은 얼음으로 인해 발이 빠진다. 겨우 벗어나니 눈길이다. 그래도 저 앞에 보이는 백인대를 올라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눈에 미끄러지면서 겨우 벼랑 아래에 도착을 한다. 계단은 절벽에 돌을 쌓아 놓았는데, 눈과 낙엽이 가득 쌓여 있다. 눈을 헤치고 낙엽을 밀어내며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경사가 급해 자칫 한발만 실수를 하면 저 밑 곤지암천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바위를 잡으며 겨우 오른 백인대. 백인대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송시열이 충청도에서 상경할 때는 반드시 들렸던 곳이라고 한다. 송시열은 이곳에서 광주 출신의 제자인 구문찬과 더불어 경학을 강론하고 시를 지었다. 백인대는 곤지암천이 흐르는 절벽 위에 지었는데, 물이 많아지면 배를 타고 건너고, 물이 마를 때에는 걸어서 건넜다고 한다.




아슬아슬한 계단을 올라 백인대 가까이 다가가 본다. 밑으로는 곤지암천이 휘감아 흐른다. 이곳에서 대학자인 송시열과 강론을 한 구문찬. 1937년에 구문찬의 후손들이 이곳에 육각형의 정자를 지었다고 하나, 훼손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백인대는 시멘트로 지었으며, 1996년에 신축한 것이다. 백인대는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렇게 위험한 답사는 정말 × 같아요'

백인대를 돌아보고 내려오려는데 난감하다. 도저히 미끄럽기도 하고 가팔라서 내려갈 길이 막막하다. 할 수 없이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 쌓인 낙엽과 눈을 치운다. 그래도 서서 내려가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듯하다. 할 수없이 엉덩이를 계단에 붙이고, 한발씩 자리를 잡으면서 엉금엉금 내려오는 수밖에.



그렇게 한참이나 고생을 한 끝에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동행을 한 일행은 건너편에서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절벽을 기어오르듯 올라간 것도 위험한데,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손에 땀이라도 날 정도였다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답사를 하는지 알아주나요?"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정말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이렇게 × 같은 경우를 당하는 것인지 몰랐네요."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닌데 멀 그리 야단이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정말 이런 답사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팔자가 그러려니 하고 웃고 말아야지.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그렇게 편안하리란 생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젠 '× 같은 답사'라는 소리까지 듣다니. 글쎄다. 앞으로는 편한 글을 쓸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백인대의 기억은 아마 두고두고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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