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보에서 충주로 3번 도로를 타고 나오다가 보면, 우측 길 밑에 고택이 있다. 충주시 살미면 용천리 428-1에 소재한 충북유형문화재 제87호인 최함월 고택은, 안채와 행랑채, 서재, 광채, 정자, 사당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조선 숙종 때의 문장가인 함월 최응성이 거처하던 곳으로, 원래는 살미면 무릉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1983년도에 충주댐의 건설로 인해 인근의 많은 고택들이 자리를 옮길 때, 이 가옥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최응성은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자는 인보(仁甫), 호는 함월(涵月)이다. 아우 최응건과 함께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집 앞에 정자를 짓고 학문에 힘썼다. 권상하는 이를 칭찬하며 정자 이름을 '함월정'이라 하였는데, 이 정자의 이름을 따서 최응성이 호를 함월이라 했다고 한다.

 

정자 함월정과 안마당의 강돌 우물이 아름다운 집


 

 

고택의 앞에는 연못 뒤에 작은 정자가 서 있다. '함월정(涵月亭)'이란 현판이 걸린 이 정자는, 최응성이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과 측면이 한 칸 정도로 꾸몄으며, 가운에 방을 드리고, 주변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방은 3면에 창호를 내고 한 벽만 담으로 쌓았다. 작은 정자지만 앞에 판 연못과 함께 어우러져 운치가 있어 보인다. 이 정자의 특이함은 바로 주춧돌이다. 밑은 사각형으로 하고, 그 위에 둥그렇게 제작을 해 기둥을 놓았다. 삼면의 창호는 모두 네 짝 문으로 마감을 하였다.

 

이 정자와 함께 최함월 고가를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것은, 안마당에 있는 우물이다. 둥근 우물은 위로 올라 온 부분에 강돌을 붙여 아름다움을 더했다. 고택 자체가 조선조 중기의 건물로 독창적인 면이 돋보이고 있는 데는, 이러한 정자와 우물이 일조를 하고 있다.

 

함월의 서재인 염선재와 행랑채

 

 

염선재는 사랑의 구실을 하고 있는 곳이다.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이 함월재는 대문 좌측에 l 자로 형성되어 있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함월재는 밖을 향해 툇마루를 놓고, 좌측에는 뒤편 툇마루로 들어가는 문을 냈으며, 한 칸의 방을 두 짝 문과 한 짝 문으로 꾸며놓았다. 뒤편으로도 툇마루를 놓았다.

 

대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조성된 염선재. 앞쪽으로는 마루를 놓았으며, 마루 뒤편에도 방을 드리고, 끝에 두 칸의 방을 드렸다. 두 칸의 방 앞에도 좁은 툇마루가 길게 놓여있어, 이동을 편하게 하였다. 집의 구조는 땅을 밟지 않고, 염선재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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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열면 바람벽이 있고, 그 옆으로 문을 내어 대문을 열고 닫기 수월하게 하였다. 집안 식구들의 이동하는 동선을, 최대한으로 줄여놓은 주인의 마음이 보인다. 행랑채는 대문을 포함하여 모두 다섯 칸으로 꾸몄다. 행랑채는 안채의 대청과 마주하고 있으며, 방과 광, 부엌 등으로 꾸며놓았다. 바깥 담장 역할을 하고 있는 행랑채는 광은 판자벽으로 마감을 하였으며, 한 칸짜리 방 세 개를 나란히 놓았다.

 

ㄱ 자형의 안채는 충북지방의 일반적 형태

 

 

 

안채는 충북지방의 일반적 평면형식인 ㄱ자형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중앙 부분에 두 칸의 넓은 대청을 만들고 있는데, 겨울을 나기 위해 그중 반을 막아놓았다. 안채를 바라보고 좌측으로는 건넌방과 칸 반의 부엌, 그리고 두 칸의 고방을 두었다. 부엌의 위쪽은 다락을 내었으며, 밑으로는 까치구멍을 냈다.

 

부엌문은 투박한 판자문으로 구성하였으며, 고방의 문도 역시 투박하다. 부엌문보다 더 크게 만든 고방의 문은, 물건을 넣고 뺄 때 편안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고방 문 옆에는 이단으로 낸 폭 넓은 끼치구멍이 있는데, 이도 막아 놓았다. 대청을 건너 꺾이는 부분에는 윗방과 안방, 그리고 부엌을 드렸다.

 

대청에서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는 또 하나의 문을 벽 중간에 내어 놓았다. 그리고 부엌 위에는 다락을 꾸몄는데, 이곳에도 통풍을 위한 작은 창호를 내었다. 다락의 밑으로는 기둥에 붙여 또 하나의 문을 내고 있다. 안채와 행랑채, 그리고 서재인 사랑채는 큰 ㅁ자 형으로 놓여 있다. 평범한 듯 하면서도 나름대로 특징을 갖는 함월 고택이다.

 

판자벽을 두른 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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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담을 외곽으로 두른 최함월 고택은, 안채 안방 부엌의 뒤편에 판자벽으로 두른 광채가 있다. 광채는 ㄱ자 형으로 하였는데, 전체를 판자벽으로 마감하였다. 문은 꺾인 양편에 한 곳씩 내었으며, 자연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렸다. 이 광채를 지나면 일각문이 있고, 그 일각문을 통하여 함월정과 사당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함월정과 안마당의 우물이 아름다운 집. 최함월 고택은 평범한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유학자의 집안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충청도 양반가의 틀이 되는 최함월 고택. 함월정 앞 연못에 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집이 더욱 아름답게 변해 있을 듯하다.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를 지나다 보면, 길가에 5층 석탑과 석불이 서 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동쪽의 낮은 산 쪽으로 쇠줄로 이어 만든 철렁다리를 건너면 돌계단이 나타난다. 낮은 구릉을 넘어서면, 강 쪽 밑으로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낙엽이 쌓이고 눈이 채 녹지 않은 계단을 내려가려면 조심을 해야 한다.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강물로 처박힐 판이다. 강가로 내려서면 우측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높이 6m가 넘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성이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이 마애불이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아마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26일부터 3일간 벌어진 인근의 탄금대전투로 인해, 이런 이야기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왜군과 탄금대에서 전투를 한 신립은 적병 수십 명을 죽이고, 전쟁에 패하게 되자 스스로 탄금대 앞 남한강으로 뛰어 들었다. 같이 이 전투에 참여했던 부장 김여물과 이종장도 신립의 뒤를 따라 전사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왜군은 충주성에 입성하게 된다.

 

결국 신립의 패전으로 인해 선조는 한양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이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애불이 왜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할까? 그것은 아마 마을사람들의 염원인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한 무장 신립의 마음을, 남한강을 바라다보고 있는 이 마애불과 같다고 생각을 했던 것일까? 아마도 멀지 않은 곳 탄금대에서 남한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버린, 신립 장군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러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대적으로 많은 차이가 나는 이러한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때로는 황당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마을 사람들 마음속에 전해지는 그 내적 사고가, 오늘날 우리들의 끈끈한 정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야 한다. 낙엽과 눈이 쌓여 미끄럽다. 아래로는 남한강의 물이 보인다.


충주지역의 대표적인 마애불

 

남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연 암벽에 조성을 한 이 마애불은 윗부분은 돋을새김을 하였다. 아래로 내려오면서 선각으로 처리를 한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낮은 돋을새김을 한 것이 선각처럼 보인다. 아래는 생략이 된 듯한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마애불에 속한다.

 

크고 길게 찢어진 눈꼬리, 큼직한 코와 귀 등이 자애로움보다는 근엄함을 엿보게 한다. 흡사 근엄한 장수상의 상호다. 그래서 신립 장군의 자화상이라고 했던 것은 아닌지. 법의는 통견으로 그려냈는데, 구불구불한 선을 어찌 저리도 부드럽게 처리를 할 수 있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절벽에 그려낸 마애불의 법의 자락이 바람이라도 불면 너풀거릴 것만 같다. 11세기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창동 마애불. 어찌 보면 투박하기 만한 이 마애불이 오히려 정감이 드는 것은, 토속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인가 보다.

 


마애불의 윗부분은 돋을 새김을 하였다. 찢어진 눈꼬리와 뭉뚝하고 큰 코가 위엄있게 보인다. 그래서 신립의 자화상이라고 했을까?


통견으로된 법의. 선각인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돋을새김을 한 것이다. 법의의 굴곡된 주름이 자연스럽게 너풀거리는 듯 하다.


어떻게 이런 곳에 조성을 한 것일까?

 

창동 마애불은 발목 밑의 부분이 생략이 되어 있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생략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한 밑 부분의 바위가 아래쪽으로는 움푹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저 부분이 저렇게 들어간 것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일까? 만일 그 밑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이라면, 그 부분에 발이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크기로 보아 그 움푹한 곳이 바로 발목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계단을 놓고 마애불의 앞쪽에도 난간을 둘러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지난 세월에는 강물이 발목까지 출렁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 마애불을 조성을 할 수가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마애불은 산이나 들에 조성한다. 자연적인 절벽을 이용해 마애불을 조성하지만, 이렇게 강가에 조성을 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것도 당시의 지형적인 여건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주변을 보면 이곳이 물에 잠기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위에서 밧줄이라도 타고 내려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해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마애불의 밑을 보면 움푹 들어가 있다. 저 곳이 떨어져 나간 부분이라면 발이 있었을 것이다.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한 창동 마애불. 고려시대의 거대마애불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문화재들을 본다. 그 하나하나가 정성이 가득하다. 아무리 사소한 문화재라고 해도, 그것을 만든 장인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 정신이 오래도록 문화재를 지켜 온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즈음 살아가는 사람들이 쉽게 생각할 수도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노력과 땀이기에, 우리가 그것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 어이가 없다. 이 정도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만하다. 도대체 문화재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소중한 문화재를 쓰레기통 취급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한 마디로 참담한 심정이다. 831,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를 찾았다.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아직도 발굴 중인 이 고달사지에는 국보를 비롯한 보물들이 소재해 있는 옛 절터이다.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귀부와 이수가 그동안 몸돌을 복원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신라 때 창건한 혜목산 고달사지 석조

 

혜목산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처음에 절이 창건된 지 벌써 1250년이 지난 옛 절터이다. 이 절은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저만큼 새로 몸돌을 치장한 원종대사 탑비가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가려는데, 중간에 보이는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지정이 된 석조 안에 무엇인가가 널려있다.

 

 

이 석조는 각 면의 모서리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어, 세심한 부분까지 관심을 가지고 치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조의 내부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밑 부분에서 호형으로 치석하여 장식적인 기교를 보이고 있으며, 바닥 중앙부에는 지름 7.5cm의 원형 배수공이 관통 되어 뚫려 있다.

 

이 외에 주목되는 부분은 모서리의 치석과 장식 수법이다. 특히 모서리는 바깥 면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으며, 상면 모서리에는 안쪽으로 연꽃잎이 말려 들어가는 듯한 양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였다. 이처럼 석조의 모서리부분을 화형으로 치석한 경우는 보기 드문 예에 속한다. 이 석조는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형문화재를 쓰레기통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이 석조 안에 무엇인가를 담은 봉지와 종이박스, 음식을 조리하는 휴대용 열기구 등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누구인가 이곳에서 컵라면 등을 끓여먹고 그 쓰레기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놓은 것이다. 라면박스 안에는 라면도 몇 개 들어있고, 휴대용 조리기구와 그 케이스도 있다.

 

담배꽁초도 보인다. 이런 모습으로 볼 때 이곳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라면 등을 끓여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 처리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먹고 난 것들을 하필이면 유형문화재인 석조 안에다 놓은 것일까? 마침 일요일을 맞이하여 고달사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구경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은 어이가 없다면서 혀를 찬다.

참 대책 없는 사람들이네요. 어떻게 문화재 현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먹고 난 것들을 이렇게 문화재 안에다가 버젓이 쌓아놓을 수가 있는 것인지. 이 현장에도 문화재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이게 무슨 짓거리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창피하네요. 고작 이정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문화재 현장을 지키고 있다니.”

 

문화재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소중한 문화재 안에다 모아놓은 쓰레기들과 조리기구.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고 있는 관리자들.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우리문화재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참담하기 짝이 없다.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 번지에 소재하며 사적 제5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현재 남한산성의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한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 정도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한강과 더불어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는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는 숭열전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이다.

 

치욕의 장소이기도 한 남한산성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는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인 1626년에 완공한 남한산성.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 등이 있다. 또한 비밀통로인 암문과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도 볼 수 있다. 남한산성은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이 남한산성의 행궁 앞편 산 중턱에 서 있는 정자가 바로 침괘정이다.

 

무기제작소로 잘못 알려진 침괘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인 침괘정은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영조 27년인 1751년애 광주유수 이기진이 다시 지은 후에 이름을 침과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백제 온조왕의 궁궐터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 침괘정의 오른쪽에는 무기를 보관하던 무기고나 무기를 만들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면 7,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침괘정의 안쪽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회랑과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뒤편에는 연도를 빼 건물에서 떨어져 굴뚝을 세웠다. 이 침괘정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있었던 전각으로 보인다.

 

침괘정은 네모난 기둥을 쓰고 있으며, 툇마루는 앞과 뒤, 그리고 측면에도 놓았다. 주초는 커다란 돌을 네모나게 다듬어 사용을 하고 있으며, 7칸 중 두 칸은 전체를 문으로 돌렸다. 이를 보아 이곳이 온돌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침괘정은 무기고나 무기제작소가 아닌 하나의 정자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산시 대부북동 1058에 소재한 쌍계사는 1660년 경 취촉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다섯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물이 나와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찰에 보관된 <정수암성조기(淨水庵成造記)>에 의하면 1689년 죽헌비구가 정수암을 중창하여 없어진 후, 1745년 그 자리에 다시 사찰을 세워 1750년부터 쌍계사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찰 내에서 만력4(萬曆四年 : 1576)에 제작된 기와가 발견되어, 16세기 후반부터 이 지역에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고개를 숙인 자세의 목조여래좌상

 

쌍계사 극락보전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1호인 쌍계사목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92cm로 좁은 어깨에 머리를 앞으로 숙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모양의 나발이 촘촘하고,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높이 솟아 있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이마 위에는 타원형의 중앙계주와 정수리에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타원형의 얼굴은 이마가 넓고 귀가 어깨 위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눈두덩이와 양미간이 각이 져 조선후기 제작된 불상의 전형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두터운 법의자락은 오른쪽 어깨에 짧게 늘어져 반전하고, 팔꿈치와 배를 지나 일부 대의자락이 왼쪽 어깨로 넘어가게 조형하였다. 왼쪽 어깨의 법의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반대쪽 법의자락과 겹쳐져 유려한 U자형을 이룬다. 하반신을 덮은 법의자락은 중앙의 S자형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로 짧게 늘어져 있다.

 

법의 안쪽에는 복견의를 입고, 가슴을 가린 승각기를 끈으로 묶어 윗부분에 5개의 앙연형 주름이 있다. 불상의 뒷면은 법의자락이 목 주위와 등을 V자형으로 덮어 조선후기 불상의 후면에 나타난 표현과 차이를 가진다. 따로 제작한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수인이지만, 이와 같은 손의 자세는 조선후기 제작된 아미타불을 비롯한 약사불과 지장보살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좌는 연꽃이 위를 향한 앙연의 연화좌와 삼단을 이룬 팔각대좌가 한 쌍을 이루고, 팔각대좌 중단에 하늘을 날고 있는 용과 천인이 화려하게 투각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목조여래좌상은 고개를 앞으로 숙인 모습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봄기운이 느껴지는 쌍계사 다시 돌아보고 싶어

 

절은 그 그곳에 있다. 산이 있어 산에 오르듯 절이 그곳에 있어 절을 찾는다. 문화재 답사를 하기 위한 순례지만 절을 찾아가면 꼭 한 가지 서원을 하고 다닌다. 하다보면 한 가지가 넘을 수도 있지만, 우리 주변의 모든 아픈 사람들. 그것이 몸이 되었던지 마음이 되었던지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가시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날도 여래좌상 앞에 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서원한 것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가진 자들의 끝없는 욕심 속에서 민초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 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서원한 것이다. 봄이 오는 길녘에서 찾아간 대부도 쌍계사. 그리고 극락전에 좌정하고 있는 마애여래부처님.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소식이 전하는 날 다시 한 번 찾아가고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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