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를 만나다가 보면, 목이 잘린 석불들이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석불의 목이 잘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조 유생들에 의한 훼파와 더불어, 일제의 석불의 목 훼손이 극성을 떨었다. 근자에 들어서는 종교적인 이질감에 의한 훼손도 합해져, 여기저기 목이 잘린 석불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자리한 원주시립박물관 뒤편 길가에 보면 석불좌상 두 기가 나란히 있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일제 때 남산 추월대로 이전하였다가, 1962년 5월에 강원감영과 포정루 쪽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그 후 현재의 위치인 시립박물관 뒤편으로 옮겼다. 이 두 기의 불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져 새로 보수를 하였다. 새로 보수를 한 머리 부분이 조금은 걸맞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요즈음 말로하면 두 기의 목이 잘린 석불의 위에 새로 맞춰 올린 두상은 훈남에 속한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현재 남아 있는 몸체와 대좌만으로도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고려초기의 뛰어난 석불좌상

 

두 기의 석불좌상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단정한 체구의 세련된 형태, 법의는 통견에 평행 옷주름 등이 신라 말의 석불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서, 적어도 고려 초기의 수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얼굴 부분이 사라져서 그 뛰어난 모습의 전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위와 같은 모습으로 조각이 된 석불좌상. 이 석불도 머리가 잘려나간 것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

 

수인은 깨어진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상태로 보아, 지권인임이 분명하다. 두 기의 석불좌상은 같은 지권인을 하고 있는데, 두 기가 다 비로자나불 석불좌상으로 추정된다. 손이 깨어진 것조차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법의는 양 어깨로 흘러내려 주름이 잡혀있으며, 가슴에는 내의에 나비매듭을 엮었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여 오른발을 젖혀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이다. 법의가 무릎까지 덮고 있는데, 주름을 넣어 아름답게 표현을 하였다. 머리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두 기의 석불좌상이 앉아있는 대좌 역시 뛰어나다.

 

수인은 지권인을 한 모습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다

 

뛰어난 고려시대의 대좌를 보다.

 

이 두기의 석불좌상을 올려놓은 대좌는 두 기가 모두 사단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정면을 보고 우측에 있는 석불좌상의 대좌는 하단에는 팔각으로 조형을 해,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동물들을 부조로 조각하였다. 이단은 팔각으로 조성을 하고 조각을 했으며, 삼단 역시 팔각으로 해 천인상을 조각하였다.

 

대좌는 모두 4단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맨 위 사단은 원형으로 조성하고 꽃과 받침을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방의 장인이 아닌 중앙에서 활동하는 있는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좌측에 있는 석불좌상 역시 같은 형태로 대좌를 조성했는데, 이단에는 가지를 문양으로 넣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곳도 천인상을 새겼는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맨 위단에는 꽃을 새기고 넓은 잎을 새겨 넣은 것이 다르다.

 

 

우측 석불좌상의 대좌에 있는 천인상(위)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아래)

 

이런 형태로 닮은꼴로 조성이 된 두 기의 석불좌상이, 삼존불 좌상 가운데 양편에 있는 협시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고려 초기의 석불좌상. 비록 머리가 없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남은 부분만으로도 훌륭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이 두기의 석불좌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일괄 지정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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