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위천 가에는 용암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위천을 지나다가 만난 용암정을 찾아 들어가는 길은, 좁은 다리를 지나 농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만 한다. 얼핏 보면 길이 없는 듯 보이지만, 빙 돌아 들어가는 길이 있다. 처음에는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해, 그냥 지나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자가 냇가에 서 있고, 분위기 역시 괜찮다. 저런 정자라면 십중팔구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정자이다. 지나던 길을 되돌려 안으로 들어가니, 용암정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경남문화재자료 제253호라고 한다. 용암정은 순조 1년인 1801년에 용암 임석형이 위천 가에 처음으로 지었으니, 올해로 210년이 된 정자이다.



사방을 돌아보면 다른 정자가

1864년에 보수 공사를 했다는 용암정은 고색이 찬연한 정자이다. 정자 위에는 방을 한 칸 들이고, 아궁이를 두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정자에는 용암정, 반선헌, 청원문, 황학란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있다. 아마도 풍류를 아는 용암 선생이 사방을 둘러 걸 맞는 이름을 지은 듯하다.

이 정자는 지붕의 끝이 날렵하게 치켜 올려져, 마치 한 마리 새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듯하다. 누마루 아래의 기둥은 둥근 기둥을 썼으며, 누마루 위에 세운 기둥은 원형으로 다듬어 놓고, 마루방의 기둥은 사각으로 조성하였다. 난간은 간단하게 나무를 듬성듬성 대어, 시원한 느낌이 들게 조성을 하였다.



위천을 보고 시심을 불러일으키다

정자의 뒤편으로는 기암과 어우러진 위천 맑은 물이 흐른다. 누마루 한편에 마련한 한 칸의 방을 중앙에 두고 문을 내었다. 정자 안에 또 하나의 정자가 자리를 잡은 듯한 느낌이다. 격자문으로 짠 문틀 안에 작은 문짝을 달아, 방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을 높인 것도 이 정자의 색다른 멋이다.

정자에는 몇 개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정자의 이름을 적은 편액이다. 나무 판에 커다란 글씨로 양각을 한 용암정과, 반선헌 등의 글씨가 제각각 달라 글을 쓴 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용암정에 오른 뭇 사람들이 이렇게 편액의 글씨를 적어 기념을 하였나 보다.




사방에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을 내어 처마 끝을 받치고 있는데, 이는 정자가 지어진 한참 뒤에 세운 듯하다. 이 용암정도 정자를 오르는 계단을 통나무로 찍어내어, 발을 디딜 수 있게 만들었다. 투박한 그 모습에 호화롭지 않은 정자의 모습이, 오히려 기품을 잊지 않은 선비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선생이 용암정에 오른 사연

용암 임석형 선생은 출사를 하지 않았다. 은진사람으로 자는 원경, 호는 용암이다. 함안에 살았으며, 영조 27년인 1751년에 태어나, 순조 16년인 18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용암정을 짓고 나서 16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16년이란 세월을 용암 선생은 이 용암정에 머물며, 이곳을 찾는 많은 시인묵객들과 교류를 한 것이다.



31책의 용암유집이 전하며, 그의 묘갈은 유만식이 찬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공의 초연한 취미와 락()은 만년의 용암정에서 볼 수 있다. 영호남 선비들이 여기를 지나면서 모두가 원학주인이라 그를 칭송하였다. 탁월한 기량과 의민한 재주를 갖고도 출사하지 못했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정자의 주인인 용암 임석형 선생. 위천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이곳에 시심을 띠워 보냈던 것일까? 1211일의 찬바람이 용암정으로 몰려온다. 위천 맑은 물이 잔 파문을 일으킨다. 선생이 계셨더라면 시 한 편을 지필묵을 갈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지 않았을까? 그 모습이 그리운 용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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