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산126-1에 소재한 각화사는 신라 때 최초로 건립이 된 절이다. 현재 각화사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인 ‘화사 각화사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이 부도는 각화사에 놓여 있는 비받침돌로, 고려 전기 문신인 좌간의대부 김심언이 세웠던 ‘통진대사비(通眞大師碑)’의 일부로 전하고 있다.

 

비 받침인 각화사 귀부는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는 약간 파손되긴 하였으나 거의 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등 무늬는 6각형이 전면에 덥혀 있고, 그 안에 ‘王’자와 ‘佛’자를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었다. 대체로 조각의 수법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효대사가 창건 한 각화사

 

각화사는 신라 신문왕 6년인 68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전해지고 있다. 그 뒤 고려 예종 때 계응이 중건하였으며, 1926년에 달현이 중수하였다. 영주-봉화-울진으로 이어지는 36번 국도의 봉화 동쪽 방향 21km 지점인 춘양삼거리에서, 998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약 9km 정도를 가면 각화사 입구가 나온다. 각화사는 이 입구에서 2km쯤 올라가면 된다.

 

각화사는 원래 춘양고교 교정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사찰의 명칭도 남화사였다고 한다. 이 절을 새로 옮겨 지으면서 각화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각화사에는 한때 800여명의 승려가 거주하였으며, 국내 3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혔다. 각화사는 조선시대에는 태백산 사고의 수호사찰이었다. 태백산 사고는 선조 39년인 1606년에 지어져, 1913년까지 약 300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왔다.

 

 

균형미를 잃어 안타까워

 

현재 각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의 말사이다. 이 각화사 절 입구 오른족애 놓인 비 받침돌이다. 이 각화사 귀부는 대체적으로 고려 전기의 정교하고도 웅대한 조각솜씨를 이어받고 있으나, 몸통에 비해 머리가 작은 감이 든다. 한 마디로 균형미가 갖춰지지 않은 고려 때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각화사 귀부는 소중한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이 귀부에 비의 몸돌과 머릿돌을 새로이 만들어 그 위에 세워놓았다. 오히려 그렇게 후에 제작해 올린 비문과 머릿돌로 인해 중요한 문화재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까 보아 걱정스럽다. 각화사 귀부는 폭은 190cm에 높이는 92cm이다.

 

30년 세월 만나본 문화재, 하지만 난 아직 초보자

 

문화재를 답사하기 시작한 지 벌써 30년 가까운 세월이다. 그간 숱하게 많은 문화재를 만났고, 그 문화재에 대한 기사를 썼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문화재에 대해서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아마 이제 겨우 발걸음을 땐 초보에 불과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문화재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내가 문화재 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깨달아 전국을 다니면서 만난 문화재들이다. 혼자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워, 많은 사람들과 공유를 하겠다고 쓰기 시작한 기사가 꽤나 쌓였다. 그러나 아직 돌아볼 문화재가 너무 많다는 것을 느낀다. 한 마디로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한 가지 원이 있다면, 이제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문화재를 찾아보고 글을 쓰는 데만 전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마음이 아플 뿐이다. 소중한 우리문화재에 대한 소개와 땀을 흘리며 찾아보기. 정말 누군가 이 일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장안사는 수려한 불광산 도시자연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장안사 대웅전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7호로서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원효대사가 척판암과 함께 창건하여 쌍계사라 했는데, 신라 애장왕 때인 809년에 장안사라 고쳤다 한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에 병화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인조 8년인 1631년에 의월대사가 다시 중창하였고 1941년 각현스님이 중수하였다. 1987년 종각을 새로 세우고 요사를 중창하고 단장하였다. 사천왕이 버티고 있는 대문을 지나, 정면에 석가여래삼존불과 후불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는 대웅전이 있고 왼쪽에는 응진전, 오른쪽에 명부전이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바로 앞에는 인도 등지에서 3차례에 걸쳐 들여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7기를 모시고 있는 3층 석탑과, 뒤편으로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싼 산신각이 있다.


눈을 부라린 사천왕이 객을 맞이해


장안사 입구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간다. 절문 앞에는 각종 석불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달마대사를 커다랗게 조성을 해 놓은 것이다. 불광산 장안사라 쓴 현판이 걸린 문루 아래에는 사천왕이 양각이 되어 눈을 부라리고 있다. 사악한 잡귀들을 물리친다니 저런 표정이 딱 어울릴듯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석탑과 그 뒤로 대웅전이 보인다. 절집 안은 오밀조밀하니 좁은 공간에 누각들이 정리가 되어 있다. 대웅전 좌편 명부전 뒤에는 극락전이 있는데 극락전 안에는 와불이 모셔져 있고. 이 와불 역시 부처님의 사라가 복장이 되어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장전이나 명부전, 혹은 극락전에 주불이 지장보살님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와불은 부처님의 열반 당시 모습이라고 하여 일부 국가에서는 와불을 모신 곳이 바로 명부전이 되기도 한단다.

 

 


척판구중의 전설은 곳곳에 전해

 

장안사를 돌아보고 나서 좀 더 위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가면 척판암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척판암은 원효사대가 수도생활 도중 천안통으로 중국 종남산 운제사 대웅전이 무너지는 것을 알고, 소반을 던져 대웅전에 있던 1천 여 명의 중국승려를 구했다는 전설에서 척판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냥 소반을 던진 것일까? 어릴 적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 들렸을 때 스님 한분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바로 척판암에 계시던 원효대사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번 만행 길에 깨달았으니 벌써 40년이 훌쩍 지난 뒤라 감개가 무량하다.


스님의 말씀은 원효대사가 천안통을 열어보니 운제사 대웅전이 곧 무너질 것 같은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는 지라, 얼른 널판 하나를 주워 그곳에 「척판구중(擲板求衆)」이라고 적어 던졌는데 종남산 운제사 스님이 하늘을 보니 커다란 널판 하나가 빙글빙글 돌고 있는지라 그것을 보고 나서 스님들에게 얼른 나와서 저것 좀 보라고 소리를 쳤단다.

 

 


대웅전에 있던 스님들이 모두 달려나와 그 판자를 보는 순간 대웅전이 무너지고, 그 판자도 땅에 떨어졌는데 판자에는 척판구중이라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즉 ‘판자를 던져 무리를 구한다.’라는·말이다.


이번 만행 길은 동해안의 정자 탐방을 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결국은 척판암을 눈앞에 두고도 오르지를 못했다. 언제가 그곳을 올라 원효스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얻어가기를 바랄 수밖에. 그것이 바람따라 길을 걷는 나그네의 발길이라면, 언젠가는 꼭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에 소재한 삼막사. 삼막사의 내력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5호인 ‘삼막사사적비’에 보면, 신라 문무왕 17년인 577년에 원효, 의상, 윤필 등이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성산’이라는 명칭도 이때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사적비는 조선조에 세워진 것이지만, 그만큼 삼막사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사찰이라는 것이다.

 

비문에는 신라의 원효(617-686)등이 창건하고 도선국사(827-898)가 중건하여 ‘관음사’라고 개칭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 후 고려 태조가 중수하여 삼막사라 하였고, 여말 선초에는 나옹, 무학 등의 고승이 오래 머물면서 선풍을 드날린 고찰이라는 것이다. 그 뒤 조선 태조 때 왕명으로 중수되었다는 등의 사실이 적혀있다.

 

 

사적비를 지나 오른 산신각

 

사적비는 삼막사 경내를 들어서면 좌측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 위쪽에 자리한다. 이 사적비를 지나면 바위를 직접 깎아서 조성한 돌계단이 있다. 삼막사 인근은 바위가 많은 곳으로, 삼막사에는 남녀근석과 마애불 등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든다.

 

사적비를 촬영하고 있는데, 여러 사람이 곁을 지나 위로 올라간다. 그 위편에는 전각이 보이지를 않는데, 바위에 대고 수없이 절을 한다. 도대체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저렇게 산 쪽을 향해서 절을 하는 것일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 보았다.

 

밑에 산신각이란 이정표는 있는데 정작 위편에 전각이 보이지를 않아 의아해했는데, 계단 위를 올라서는 순간 그 모든 의문이 풀렸다. 바로 바위를 안으로 깊이 파내고 그 곳에 산신을 새겨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는 전각은 바로 이렇게 바위에 산신각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기분 좋은 답사

 

삼막사 입구 주차장에서 삼막사까지 올라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날 오른다고 생각을 하면, 처음부터 한숨부터 나온다. 그런 가파른 오르막길을 물도 없이 한 시간 넘게 걸어 올라가보지 않은 사람은, 그 답사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올라가 만난 절 삼막사. 전통사찰인 삼막사에는 몇 점의 문화재가 있기도 하지만, 그동안 여러 해 찾아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올 들어 가장 기온이 높다는 날 올랐으니, ‘땀이 비 오듯 한다.’는 말을 실감한 답사 길이다.

 

그렇게 찾아 올라간 삼막사. 저 멀리 까마득하게 마을이 보인다. 거의 산 정상부에 절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계곡 밑에서 치밀어 오르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살 것만 같다. 시원한 물을 한 대접 마시고 올라가 만난 사적비와 산신각이다.

 

 

 

이 산신각 명물 되겠네.

 

삼막사 바위암벽 산신각은 바위면을 안으로 네모나게 깊게 파 들어가, 그 안에 산신과 호랑이 동자상 등을 돋을새김 하였다. 양 편에는 기둥을 새겨 놓았으며, 바위를 보고 우측 위편에는 구름을 새겨 놓았다. 처음에는 산신이 타고 앉은 호랑이를 보고 한참이나 속으로 웃었다. 산신님이 들었으면 노했을 듯도 하다.

 

 

 

호랑이가 어딘지 모르게 옛 만화에 나오는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앙편에 새겨 놓은 동자상도 조금은 어색하다. 아마도 지금은 기계를 갖고 조형을 했을 텐데, 일부러 옛 분위기를 만드느라 민화에 나오는 모습으로 조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몇 사람인가가 또 올라와 절을 한다. 이 더위에 그늘도 없는 곳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치성을 드려서 덕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살기 팍팍한 세상에 그래도 이런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도 행복이다.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이 산신각에도 이야기가 생겨날 것이고, 그 후에는 명물이 될 것이다. 계곡을 따라 올라 온 바람 한 점이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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