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부석사(浮石寺). 우리는 흔히 부석사라고 하면 경상북도 영주시에 소재한 부석사를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서산 부석사도 영주 부석사와 같이 한자로도 사찰명이 일치한다. 서산 부석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 한 절로 전해진다.

 

부석시 일원은 도비산의 강무지로 알려져 있다. 강무지란 임금이 직접 참여하여 군사훈련을 한 곳임을 말한다. 조선조 제3대 태종이 14162163남인 충령대군(후 세종)과 함께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이곳에서 사냥몰이를 하였다. 임금이 직접 참여한 이러한 군사훈련을 강무(講武)’라 칭한다.

 

훈련이 끝난 후 태종과 충령은 해미현에서 숙박을 한다. 원래 이 강무일정은 28일에 서산에 도착하였으나, 비가 내리는 바람에 210일까지 서산에서 머물고, 11일에 태안 순성에 이르러 15일까지 굴포의 개착상황과 여러 곳을 거쳐 도비산에서 강무를 연 것이다. 태종이 이곳을 강무지로 택한 곳은 도비산 일원이 왜구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이다.

 

 

큰 돌이 허공에 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부석(浮石)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4년인 650년에 복흥사라는 절에 의상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의상은 큰 뜻을 품고 당으로 가서 지엄법사 밑에서 공부를 했다. 의상이 있던 지장사 아랫마을에는 젊고 예쁜 <선묘낭자>가 살고 있었는데, 이 낭자가 의상스님에게 반하고 만 것. 그래서 문무왕 1년인 661년에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려하자, 선묘낭자는 자신의 마음을 의상에게 밝혔다. 하지만 의상은 스님이기 때문에 허락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의상이 배를 타고 떠나려하자 선묘낭자는 스님의 복색을 하고 의상을 따라가 평생 시종을 들 것이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그도 물리치자 선묘낭자는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 뒤 선묘낭자는 용이 되어 의상을 따라 해동 조선으로 나왔다고 한다. 의상은 자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묘낭자를 위해, 절을 세워주기로 하고 절터를 찾던 중 서산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도비산 중턱에 절을 짓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이 심하게 반대를 했다. 마을 사람들이 반대를 하는 것도 무릅쓰고 절을 계속 짓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절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그 때 큰 바위 하나가 허공에 둥둥 떠 오더니 공중에서 큰 소리가 났다. “너희들이 절 짓는 것을 방해한다면 이 큰 바위로 너희들의 머리를 다 부수어놓겠다. 지금 당장 물러가라고 꾸짖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 달아나버렸다.

 

이렇게 허공에서 소리를 친 것은 바로 선묘낭자의 화신인 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이 절 이름은 도비산 부석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부석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이다. 결국 이 부석사는 큰 바위가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시민기자들이 찾아간 부석사

 

23일 일정으로 떠난 e수원뉴스 시민기자 워크숍. 그 첫날인 828일 서산 해미읍성을 거쳐 간월암의 풍광을 만난 후 찾아간 부석사. 지난 해 11월 이곳을 들려간 후 10개월 만에 다시 찾은 부석사이다. 이곳은 들릴 때마다 마음이 아픈 곳이다. 이 부석사에 봉안이 되어있던 700년 전인 고려 충숙왕 때 부석사에 봉안했던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전문 절도단에 의해 일본에서 다시 우리나라로 반입이 되었다.

 

이 절도단은 자신들이 도적이 아닌 애국자이기 때문에 범법자로 재판을 받을 것이 아니라 국민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한 아픔이 있는 절 부석사를 찾은 시민기자들. 경내를 다니면서 사진촬영을 하고 꼼꼼히 기록을 하기도 했지만, 과연 이 부석사에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는지는 알고는 있는 것일까?

 

 

선묘낭자의 모습을 담아 모셔놓은 선묘각에 들려 삼배를 올린 후 다시 새롭게 조성한 마애불상 앞으로 다가선다. 저 밑에 보이는 마을길을 달리는 차들이 조그마한 장난감만 같다. 마애불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여정의 무사함을 기원한다. 그리고 의상스님을 사모해 애틋한 사연만 남기고 용이 되었다는 선묘낭자가 다시는 그런 아픔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전해본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을 떠났다. 매년 10월 수원화성문화제가 끝난 다음에 실행하던 워크숍이 올해는 8월 말에 실행에 들어갔다. 애초 30명 정도가 워크숍에 참가 할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 인원이 선정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출발 하루 전날에 갈 수가 없다고 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28일 오전 830분에 시청 인근에 모인 시민기자들은, 9시경에 출발을 하여 제일 먼저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적 제116호인 해미읍성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의 순방지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교황이 이곳을 순방한 것은 해미읍성이 성지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해미읍성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해미로 옮기기로 하면서,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부터 세종 3년인 1421년까지 축성, 충청도의 전군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이다.

 

천주교의 순교지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해

 

해미읍성 순교의 아픔은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다.

첫째는 수령 3백년 경의 회화나무 한 그루이다. 이 나무는 현재 기념물 제172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1790년부터 1880년에 이르기까지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 동쪽으로 뻗어난 가지에 철사 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을 한 현장이다.

 

 

오래 전 해미읍성을 찾았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옥사. 천주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옥사는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 작업 뒤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1935년에 간행 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옥사는 내옥과 외옥이 있었으며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 옥사가 구분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리개질을 했던 돌다리

 

자리개란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방법이다. 짚으로 만든 굵은 줄인 자리개로 곡식 단을 묶어서 타작하는 것이다. 즉 곡식 단을 굵게 묵어서 어깨 위로 올렸다가 힘차게 내리쳐 단에 묶인 곡식들을 기구에 내리쳐 낱알을 털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해미읍성 서문밖에 이런 자리개돌이 있다.

 

 

그런데 이 자리개돌은 자리개질로 사람들을 죽이던 순교의 형장이다. 서문 밖 수구위에 놓여있던 돌다리로 이 돌다리위에서 자리개질로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이 자리개 돌은 서문 밖 순교지에 보관중이던 것을, 생매장 순교 성지인 여숫골로 옮겨 보관하고 있고 현재 볼 수 았는 자리개 돌은 모조품이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 첫발로 내딛은 해미읍성. 교황의 방문지이기도 했던 해미읍성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순교지를 돌아보고 있는 사람들. 옥사 안을 돌아보던 한 관람객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마디 한다.

 

 

이곳이 교황님이 다녀가신 곳이란다. 옛날에 이 성 안에서 많은 분들이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거든. 저 옥사에 칼을 쓰고 있는 사람들처럼 저렇게 고통을 받다가 죽은 것이지. 그런 많은 분들의 순교가 있어 우리가 편하게 종교의 자유를 갖는 것이란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23일의 워크숍 일정 중 가장 먼저 만난 해미읍성과 순교지. 그 안엔 '왜 교황이 굳이 이곳을 찾아왔을까'라는 해답이 있다.

 

e수원뉴스의 시민기자들이 23일로 속초와 고성 지역으로 워크숍을 다녀왔다. 23일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나한테는 12일이 된 셈이다. 워크숍 날짜가 년 초에 미리 날을 잡아 놓은 행사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밤늦게 속초서부터 수원까지 택시로 이동을 해야 하는 난리를 겪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마지막 날은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원의 행사를 대충 접고 다시 주말의 막히는 고속도로의 답답함을 이겨내며 속초로 달려갔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 모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23일의 마지막 여정을 인제 백담사로 정했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님의 침묵을 탈고 하신 곳이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오래도록 칩거를 한 곳이기도 하다.

 

 

중광스님을 만난 지 벌써 세월이

 

사실 내가 백담사를 찾은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1999년인가 속초에 한 8개월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당시 이런저런 골치 아픈 일이 싫어, 영랑호 곁에 있는 사찰에 소나무 숲에 있는 방 한 칸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에 걸레스님이라고 하는 중광스님이 백담사에 머물고 계셨다.

 

중광스님은 백담사 회주이신 오현스님이 거처를 백담사 한편에 거처를 마련해 주어, 그곳에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계셨다. 이 중광스님이 7월 백중 때인가, 내가 묵고 있는 속초 절을 찾아오신 것이다. 당시는 스님들만 보면 무엇인가 답답한 속이라도 이야기를 하면, 한 마디로 해결이 된 듯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이다. 그런데 그런 기대를 깨버린 것이 바로 걸레스님인 중광스님이셨다.

 

 

거기 처사, 가서 막걸리 한 통 받아와라

 

처사란 절에서 부르는 남자신도를 말한다. 신도 중에서 수계를 받으면 거사라 칭하고, 수계를 받지 않으면 처사라고 부른다. 당연히 나는 처사도 안 되는 처지였다. 절에 묵으면서도 불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한테 말씀하셨나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냐?”

 

이쯤 되면 슬그머니 부아가 오른다. 스님이라고 해서 언제 보았다고, 술을 사오라는 것도 좋지만 거기다가 반말이다. 사실 중광스님은 총각 때 서울 종로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지만, 세월이 흘러 나도 나이가 들었으니 기억도 못하실 것은 뻔한 일이다. 그래도 젊은 혈기에 은근에 부아가 치민다.

 

 

스님이 술을 드세요?”

야 이놈아 술이 아니고 곡차를 사오란 것이야

금방 막걸리 한 통 받아오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곡차야. 쌀로 만들었으니 그것이 차지 무슨 술이냐?”

 

그림이라도 받아 둘 것을...

 

지금 같으면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다. 중광스님의 별난 행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세상을 자연인으로 살아가신 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그 때는 왜 그리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머뭇거리는 나에게 스님이 다시 이야기를 한다.

 

왜 막걸리 살 돈이 없냐?”

막걸리 값이야 있죠.”

이놈아 그럼 얼른 가서 사와라. 내 술값은 나중에 그림으로 그려서 쳐줄 테니까.”

 

 백담사에서 만난 다람쥐와 멧돼지. 다람쥐는 가까이 다가서도 도망을 가지 않고 먹을 것만 먹고 있었다.

이 멧돼지는 이름이 해탈이란다. 매일 이곳에 와서 사람들이 주는 것을 먹고 산다고...

 


참 세상에 나처럼 어리석은 인간도 없을 듯하다. 당시는 중광스님의 그림이 그리 값나가는 것인 줄을 모르고 있었으니. 그리고 다음해인가 스님은 백담사를 떠나셨다. 얼마 후에 스님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입적을 하셨다는 소리를 풍문으로 들었다.

 

백담사를 찾았던 사람들은 만해 스님이나 전 전 대통령으로 기억을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백담사는 중광스님과의 인연으로 생각을 한다. 10일 오전에 들린 백담사. 그곳에서 걸레스님인 중광스님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돌아보았지만, 무심한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만이 바스락거리며 절을 찾은 사람들을 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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