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은 옛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낙안읍성이 있다. 낙안면은 백제시대에 분차 또는 분사군이었으며,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 때는 분령군이라 불렀다. 고려 때에 들어서 낙안 또는 양악으로 칭하여 나주에 속해 있으면서, 1172년인 고려 명종 2년 에 감무를 두고 그 후에 지주사가 되어 군으로 승격되었다.

 

1515년인 조선조 중종 10년에는 고을에 불륜한 일이 일어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75년인 선조 8년에 복구되어 낙안군이라 하였다. 1908년인 융희 2년에 낙안군이 폐지됨에 따라 읍내면이라 칭하여 순천군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4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내서면 20개리와 동상면의 교촌, 이동일부와 보성군 고상면의 지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낙안면이라 칭했다.

 

금전산에 금둔사가 있었다

 

순천시 낙안면 상송리 산2-1에 소재하고 있는 금둔사. 현재의 금둔사는 과거 이곳에 있던 금둔사와는 별개의 사찰이다. 이 금둔사 일주문을 들어서 절 경내를 행하다가 우측 산 밑에 보면 보물 제945호인 순천 금둔사지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낙안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약 2km 떨어진 금전산의 무너진 절터에 자리하고 있는 탑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전산에 금둔사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절터를 금둔사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는 조그마한 사찰이 지어져 금둔사의 명맥을 잇고 있다. 낙안읍성을 돌아보고 난 뒤 찾아간 금둔사지. 옛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이 이 곳이 예전 금전산 금둔사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돋을새김한 팔부중상이 압권

 

금둔사지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양우주와 가운데 기둥 모양인 탱주를 본떠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기둥과 8부중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다.

 

 

특히 1층 몸돌의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을, 양 옆면에는 불상을 향하여 다과를 공양하는 공양보살상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밑면의 받침이 5단씩이고, 처마는 평평한 편이다. 낙수면은 완만하게 경사가 지다가 끄트머리 네 귀퉁이에서 힘차게 치켜 올려져 있다.

 

이 금둔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갖추고 있어,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1층 몸돌에 공양상이 새겨져 있는 점은 특이한 예이며, 각 부의 비례도 좋고 조각수법이 세련된 석탑이다. 탑의 뒤편에는 절개지 연의 앞에 석불입상이 서 있는데, 이들은 서로 연관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엣 금둔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동국여지승람에 소개가 되어있다는 금전산의 금둔사. 지금 절이 들어서 있는 금둔사의 모습이나. 석불입상과 삼층석탑의 자리 등으로 보아서 옛 금둔사도 큰 절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만한 가람이 들어서기에는 장소가 협소한 듯하다. 하지만 석불입상이나 석탑의 형태로 보면 이곳에도 제대로 일탑 일가람 형식의 절은 있었을 것 같다.

 

세월이라는 시간 속에서 사라져 버린 수많은 문화재를 갖고 있는 절터들. 전국을 돌면서 만난 수많은 사지들은 늘 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마도 그 많은 절들이 보존만 되었다고 해도, 지금보다는 더 많은 문화재들을 만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금둔사지를 돌아보고 뒤돌아 내려오면서 내내 속이 편치가 않다.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가끔 볼멘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기야 내가 문화재 담당자가 아니니, 그런 소릴 들었다고 무엇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일이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소중한 가를 이야기하다가 보면, 실실 울화가 치밀 때도 있다. 막무가내로 돌덩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열을 올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681번지에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인 장남리 삼층석탑이 소재한다. 인제에서 홍천으로 오다가 보면 군계를 벗어난 고개에서 조금 내려와, 삼층석탑의 사진을 곁들인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안내판을 보고 찾아들어간 장남리 삼층석탑. 그러나 몇 번을 이리저리 돌아서 겨우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땅 꼭 그렇게 차지하고 있어야 하나요?”

 

장남리로 들어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물어본다. 어디로 이렇게 가면 있다는 삼층석탑. 길에서 보인다고 하는데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몇 번을 그 앞으로 지나쳤으면서도 볼 수가 없었다. 탑은 작고 그 앞에 나무 한 그루가 풍성하니 탑을 막고 있어, 길에서 보인다는 탑은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한 사람이 곁으로 와 이야기를 한다.

 

저 탑을 치울 수 없어요?”

탑을 치우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탑이냐고 어디 탑 같지도 않은데 땅만 잔뜩 차지하고 있잖아요.”

, 그래도 소중한 우리 문화재이니까요

그래도 꼭 그렇게 넓은 땅을 사용도 못하게 만들어야만 하나요?”

아마도 이곳이 옛날 절터라 보존을 해야 하나 보네요. 그리고 문화재는 보물이 되었건,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탑이 되었건 다 소중한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보호철책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면서도 영 기분이 찝찝하다. 물론 땅 주인이야 문화재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땅을 넓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다.

 

나 그래도 문화재야

 

전국을 다니면서 국보와 보물 등으로 지정이 된 수많은 석탑들을 보았다. 그 중에는 정말로 그 아름다움에 눈물이라도 날 것만 같은 것들도 보았다. 그런가하면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도, 이런 문화재도 있구나 할 정도로 초라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화재는 다 그 나름대로 그 시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남리 삼층석탑은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탑의 각 부재들을 수습하여 쌓아 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탑의 높이는 전체가 1.3m 정도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맨땅 위에 막돌과 기다란 돌 2개를 깔아 바닥돌을 삼고, 그 위에 아래층 기단, 위층 기단, 탑신의 1층 몸돌과 지붕돌 3개를 차례로 올려놓았다.

 

기단부 이하의 석재들도 제짝이 맞지를 않아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을 새겼으며, 일층 몸돌에는 양편에 양우주를 조각하였다. 두툼한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위로 치켜져 올라갔으며, 지붕돌의 밑면에는 2단의 받침을 두었다. 고려시대 후기 석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장남리 삼층석탑. 비록 특별한 것도 없고, 제대로 부재가 맞지를 않아 볼품없는 모습이긴 하지만, 그래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석탑이다.

 

 

문화재를 답사할 때마다 종종 마음이 아픈 것은, 이런 문화재라고 하여서 푸대접을 받는 일이다. 그러나 장남리 삼층석탑은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고, 넓은 대지에 보호철책을 만들어 놓아 그나마 위안이 된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온전히 제대로의 대접을 받으려는지.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비바람이 거세다. 장마철에 답사를 떠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좋은 기회를 맞았다면 그보다 더한 날이라고 해도, 망설일 이유가 없다. 7월 14일(토), 아침 일찍 출발을 하여 도착한 남해 보리암. 가는 내내 비가 뿌려댄다. 버스에서 내려 셔틀버스로 옮겨타고, 다시 걸어 올라가는 보리암의 여정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카메라가 젖지 않게 하기위해 거기다만 신경을 쓰다가 보니, 옷은 이미 속까지 축축하게 젖어온다. 질척이는 길을 걸어 도착한 보리암은, 자욱한 해무 속에서 신비로운 모습으로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어디라고 들릴 사이에 없이 전각 앞을 지나, 바닷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삼층석탑으로 향했다.

 

 

전설과는 거리가 먼 삼층석탑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보리암 경내에 서 있는 경남유형문화재 제74호인 ‘보리암전 삼층석탑’. 이 탑은 보리암 종각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닷가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다. 크지 않은 이 삼층석탑은 비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석탑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3년인 683년에 원효가 금산에 처음으로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락국의 수로왕비인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을 이용하여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허태후가 가져 온 부처님의 사리를 이곳에 안치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도 전한다.

 

 장맛비 속에서 남해  보리암으로 오르는 사람들(위)과 비와 해무에 쌓인 보리암(아래)

 

하지만 이러한 전설은 실제와는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삼층석탑은 파사석이 아닌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의 조형을 보면 고려 초기의 형태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전설과는 차이가 난다.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크지 않은 석탑

 

장맛비가 쏟아지는 데도,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석불입상 앞에는 그 비를 맞으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석탑 옆 바위에는 이름들을 새겨 놓았다. 저 바위와 같이 오랜 시간 잘 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였을까? 어디를 가나 저렇게 돌에 새긴 이름들을 본다는 것이 이젠 씁쓸하기만 하다.

 

 

삼층석탑 주변의 바위(위)와 경남 유형문화재 제74호인 '보리암전 삼층석탑(아래)

 

보리암 전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에 비해, 그 크기가 크지 않은 편이다. 석탑에는 특별한 조각이나 그런 것들이 없이 그저 평범한 모습이다. 커다란 돌 하나로 기단을 놓고, 그 위에 면석을 놓았다. 면석에는 양편에 모서리기둥인 우주를 새겨놓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각 층의 몸돌에도 양 우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의 받침은 4단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처마는 약간 경사가 지게 하여 자연스럽게 처리를 하였다. 상륜부에는 보주가 남아있으며, 고려 초기의 석탑의 유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천년 세월 남해를 바라보고 금산 보리암의 비보석탑으로 지켜 온 고려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보리암 삼층석탑

 

쏟아지는 장맛비 속에서 자욱한 해무에 쌓인 보리암전 삼층석탑.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서 남해를 바라다보면서, 이곳을 들리는 수많은 참배객들의 기원을 얼마나 들어준 것일까? 그래도 그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어 고맙다. 이 탑 하나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빗길에 달려온 나그네를 맞는 삼층석탑. 비보석탑인 이 삼층석탑에 고개를 조아리고, 내 주변의 모든 나쁜 기운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절을 지었다는 만복사지. 이 만복사지 안으로 들어가면 동편에 높다랗게 서 있는 5층 석탑이 보인다. 그 옆으로는 석불을 모신 전각이 있어, 5층 석탑을 찾기가 수월하다. 보물 제3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만복사지 5층 석탑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일반 석탑과는 다른 형태로 꾸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기저기 널린 석탑의 부재들을 한 곳에 쌓아 놓은 듯하기도 하다.

원래 만복사에는 절터 중앙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 때 많은 건물지와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5층 석탑은 현재 4층까지만 남아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몸돌을 괴기 위한 네모난 돌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하층 기단부는 2단으로 얇게 조성을 했으며, 그 위에 우주를 새긴 커다란 돌을 올린 상층 기단부가 자리하고 있다. 몸돌은 1층이 대단히 높고, 2층 이상은 약 3분의 1로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인 우주를 조각하였고, 지붕돌은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 있다. 이러한 형태는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보아도 일반적인 석탑과는 무엇인가 다르다. 석탑을 몇 번을 돌면서 무엇이 이 석탑의 특이한 점인가를 찾아본다. 바로 저것 때문이다.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하나씩 끼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네모난 돌로 인해 석탑의 모형이 일반적인 5층 석탑과는 판이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런 형태는 당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하지만,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몸돌 삼층에 특이한 형태의 감실이 있다. 만복사지 5층 석탑은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5층 석탑의 또 다른 특징은 3층 몸돌의 사방에 작은 소물을 모셔놓았던 감실이 있다는 점이다. 감실의 경우 이렇게 탑의 상부에 두는 경우가 잦지 않아, 이러한 감실 하나에서도 만복사지 5층 석탑의 특이함을 엿볼 수가 있다.




이 감실은 그다지 크지가 않다. 3층의 몸돌 자체가 그리 큰 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3층 몸돌의 사방에 겨우 소불 하나가 들어갈 만한 감실을 내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 이곳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사리함을 지키기 위한 소불을 모시느라 조성한 감실로 보인다.

많은 문화재들. 그 나름의 특징과 멋을 자랑하는 문화재야 말로, 우리가 이 시대에 온전히 보존해야 할 문화자산이다. 만덕사지를 찾아 또 하나의 특이한 보물을 발견했다는 것과, 조금은 그 특징에 대해 알았다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땀을 흘리며 걷는 답사 길은, 늘 기대에 차 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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