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루는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시인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에 나오는 누정이다. 수루는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에 소재한 사적 제113호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 안에 소재한다. 10월 14일 통영유람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한산도로 향했다. 불과 2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들어가면서 바라본 한산만 일대는 작은 섬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다도해(多島海)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충무공의 유적지를 돌아보다.

 

관람을 할 수 있는 표를 구입한 후 출입문인 ‘한산문’을 통과하여 제승당으로 향했다. 이 곳 유적지는 선조 25년인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에서 왜선을 섬멸한 후, 선조 26년부터 30년인 1597년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던 곳이다. 두억포에는 임진왜란 때 전함인 판옥선과 척후선 등 100여척이 정박해 있었으며, 740여명의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천천히 바닷가를 거닐어 제승당으로 향한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에는 늙은 적송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두 병의 모형병사가 문을 지키고 있는 앞에는 우물이 있다. 물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울화가 치민다. 어떻게 유적지 안에, 그것도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머물 때 1,340일을 사용했다는 우물을 이렇게 쓰레기가 떠다니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계단을 올라 유적지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제승당이 보인다. 제승당은 현재의 해군작전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한 전각이다. 1593년 7월 15일부터 1597년 2월 26일(음력) 한양으로 압송을 당하기까지 3년 8개월을 이곳에 진영을 설치했다. 장군의 일기인 ‘난중일기’ 1,491일 중, 1,029일이 이곳에서 쓰였다.

 

한산만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수루

 

사실 수루는 정자가 아니다. 일종의 망루와 같은 곳이다. 장군은 늘 이곳에 올라 한산만 일대의 지형을 살피고, 시간마다 달라지는 조수의 차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곳 일대에는 유난히 많은 암초가 있다고 한다. 그 암초들까지도 일일이 헤아렸을 것이다.

 

 

 

 

 

이곳에서 오른쪽의 고동산, 왼쪽의 미륵산, 뒤쪽의 망산을 이용하여 적의 동태를 살폈다고 한다. 봉화와 고동 연 등을 이용하여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작전을 세운 곳이다. 이곳 수루에서는 한산만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수도 없이 지형을 파악하고, 그 지형에 따른 작전을 세웠기에 55척의 배를 갖고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인 ‘한산대첩’을 이루어내지 않았겠는가?

 

고증을 통해 복원한 수루가 시멘트 건물이라니

 

수루의 앞에는 설명을 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곳에는 1976년 정화사업 때 한산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현 위치에 고증을 통해 세웠다고 적혀있다. 양편으로 계단을 내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주변에는 난간을 둘러 운치를 더했으며, 수루는 팔작지붕이다.

 

 

 

 

수루 위에 올라 멀리 한산만을 바라본다. 한산만은 통영의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에 있는 만으로, 이곳은 안쪽은 넓고 입구가 좁다. 이 한산만은 수심이 낮아 소형선박들의 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크고 작은 섬들과 낮은 수심, 여기저기 만과 포구들을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전략이 한산대첩의 승리를 만들어 낸 곳이기도 하다.

 

수루를 둘러보다가 보니 무엇인가 이상하다. 칠이 벗겨진 곳에 들어난 부분이 아무래도 나무 같지가 않다. 두드려본다.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듯하다. 어이가 없다. 물론 그 당시에 는 목재를 다듬어 수루를 복원한다는 것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딴 곳도 아닌 충무공의 유적지 안에, 역사적인 전각인 수루를 시멘트로 조성을 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장군의 혼이 깃든 곳인데, 더럽게 부유물이 떠돌고 있는 우물도 그렇고, 수루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영웅은 사라지고 수루만 남았지만, 그 수루마저 사람을 슬프게 만들다니. 연신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유람선을 뱃고동이 더욱 슬프게 들린다.

사람이 집단을 이루어 살다가보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단순히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마을의 이야기는, '아주 오랜 옛날'이라는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전설 속의 실체가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증평시내에서 충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사곡리 이정표가 나온다. 이 이정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면 사곡2리 사청마을이 나온다. 마을회관을 지나면 마을 안 길가에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이 '말세를 알리는 우물'이다.

 

 

1456년에 판 사곡리의 우물 '영천(靈泉)'

 

우물에 다가가니 우물 옆 집 벽쪽에 커다랗게 '말세를 알리는 우물'이라는 돌로 만든 안내판이 걸려있다. 그 내용을 보니 우물의 깊이는 5.4m인데, 수심이 2.8m 정도 된다는 것이다. 조선 제7대 왕인 세조(1455∼1468)가 조카인 단종(1452∼1455 )을 폐하고 왕위를 빼앗은 후 나라에는 가뭄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장삼을 길게 늘어트린 한 노승이 지나다가 물이 마시고 싶어 한 집에 들려 물을 한 그릇 마실 수 없느냐고 청을 넣었다.

 

"집에 길어다 놓은 물이 없으니, 툇마루에서 좀 기다리시면 마실 물을 길어오겠습니다."

 

그릇을 들고 집을 나선 아낙네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노승이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으려니, 해질녘이 되어서야 땀을 뻘뻘 흘리며 아낙네가 돌아왔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아낙네는 물을 떠 노승에게 건넸다. 노승이 물을 마신 후 늦은 사연을 물으니, 아낙네는 20여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물을 길어왔다는 것이다.

 

 

 

노승이 잡아 준 우물터, 말세를 예고한다

 

마을에 전하는 전설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아낙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이 든 노승은 지팡이로 땅을 몇 번 쳤다.

 

"허허, 이곳 땅은 층층이 암반이로다. 초목인들 제대로 자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선인들이 터를 잘못 잡았도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이 나지 않아 지금도 마을장정들이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물이 나는 곳을 알려드리리다. 자, 여기를 어서 파시오. 겨울이면 따뜻한 물이 솟을 것이고, 여름이면 찬 물을 얻을 것이오. 여기 우물을 파기만 하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장마가 닥쳐도 물이 더 이상 늘지 않을 것이외다."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지팡이로 여기저기를 두드려보던 노승이 정해준 곳은 큰 고목이 서 있는 곳이었다. 그러고 나서 노승은 마을을 떠나기 전 한마디를 더했다는 것이다.

 

"이 곳에 우물을 파면 넘치거나 줄어들지는 않겠지만, 꼭 세 번 넘칠 날이 있을 것이오. 넘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날 것이고, 세 번째 우물이 넘치는 날에는 말세(末世)가 될 것이니 그때는 지체 없이 이 마을을 떠나시오."

 

 

말을 마친 후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고목을 베어내고 그곳을 팠는데, 노승의 말대로 맑은 물이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이 넘치면 세상에 말세가 온다는 노승의 말이 있어 주민들은 이 우물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빠져도 가라앉지 않는 영천, 벌써 두 번 넘쳐

 

이 사곡리의 우물은 사람이 물에 빠져도 가라앉지 않는다고 한다. 물을 긷다가 몇 명이 빠졌으나, 그대로 다 물에 떠 있어 생명을 건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우물 옆 안내판에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장옥분(당시 16세 부인), 연기남(13세, 소녀), 연규인(14세, 소녀), 연경세(11세, 소녀) 등 4명이다. 그러나 1947년 음력 2월 경 우물 하부 석축이 우그러들어 재공사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보릿고개에 시달려서 명샘에 고사도 못 올리고 지내던 중, 연규성씨 딸 10세 소녀가 물을 긷다가 변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용왕님의 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경악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가가호호 촛불을 밝히고 무녀를 들여 굿을 하였다.

 

이러한 우물이 벌써 두 번이 넘쳤다고 한다. 이제 한 번 더 넘치게 되면 말세라는 것이다. 첫 번째로 넘치던 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라고 한다. 어느 날 우물에 물을 길러간 한 아낙이 우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마을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 소문은 인근에도 퍼져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던 며칠 후, 왜병이 쳐들어 왔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노승의 말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정초에 우물이 처음으로 넘쳤다.

 

 

두 번째로 우물이 넘친 것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때의 일이다. 그 후 6·25 때는 우물이 지면 1m 내·외로 불어나 전쟁발생을 예고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우물을 시멘트로 바꿔 간이 상수도로 사용했으나, 마을에 액운이 잦아 원상복구를 했다고 한다. 1995년 11월에는 2 ∼ 3일간 우물이 불어났다 줄었다 하기도 했고, 마을에서는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 물을 퍼내 청소를 하는 등 관리에 정성을 쏟고 있다.

 

말세를 알려주는 우물, 벌써 500년 가까이 마을사람들이 '영천'이라고 생각하는 이 우물은 이제 두 번이 넘쳐나고, 마지막 한 번이 남았다고 한다. 우물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에도 어르신 한 분은 곁에서 떠나시지 않는다. 행여 우물에 나쁜 짓이라도 할까보아 걱정이신지. 우물을 뒤로하면서 속으로 기원을 한다. 세 번째로 넘쳐나는 일이 절대로 없었으면 좋겠다고.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을 살다가 죽음에 이르면, 많은 회상에 잠길 것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서 세상을 살았는가 정도는 정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반계서당’이다. 그곳을 오르면 절로 왜 사는가? 혹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 128-7번지. 부안에서 곰소를 항해 30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보면, 우측 산 중턱에 집이 한 채 보인다. 우동리 마을로 접어들면 길가에 '반계선생 유적지'란 이정표가 보인다. 마을로 진입해서 들어가면 '반계서당'이라는 안내판이 길에 서있다. 안내판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저 멀리 서해 끄트머리가 보이는 곳에 반계서당이 자리한다.


『반계수록』을 집필한 반계서당

지금의 집이 당시 선생이 살던 집은 아닐 것이다.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 되어있는 이 터는, 조선조 효종과 현종 때 실학자로 활동한 반계 유형원(1622-1673) 선생이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던 곳이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 한양을 떠나 여러 곳을 다니면서 학문에만 열중하던 반계선생은, 효종4년인 1653년 선조의 체취가 남아있는 이곳 우동리로 이주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평생을 야인으로 살다 세상을 하직한 반계선생. 선생은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학문의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조선후기의 수많은 실학자들이 반계선생의 학풍에 영향을 받았다. 반계서당에 몸을 의탁한 선생은 32세에서 49세까지 『반계수록』 스물여섯 권을 이곳에서 저술하셨다.




선생의 마음과 닮아 하늘 아래 걸린 반계서당

반계서당을 찾아 길을 오른다. 마을을 지나 흙길인 산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른다. 땀이나고 숨이 가빠오지만, 길이 꺾이는 곳마다 '반계서당'이라는 푯말이 있어 고맙다. 산길을 걸어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저만큼 물이 빠진 서해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저만큼 산 중턱에 반계서당이 보인다. 돌담을 쌓고 일각문을 내었다. 소나무 몇 그루가 주인 잃은 서당과 친구가 되었다.

일각문을 들어서기 전 잠시 머리를 숙인다. 선생의 발자취에 행여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문을 들어서니 일각문 앞쪽으로 샘이 보인다. 샘에는 맑은 물이 차 있어 갈증도 나던 차라, 검불만 떠 있지 않다면 한 모금 마시고 싶다. 누군가는 해골의 물도 마셨다는데, 검불 몇 가닥 떠 있다고 물을 마시지 못하는 인간이다. 하기에 이 자리에 있기가 버거운지도 모르겠다.



산 중턱에 서당을 지은 까닭을 깨우치다

서당 누마루에 앉아 땀을 닦는다. 멀리 보이는 서해가 햇볕을 받아 반짝인다. 변변한 나무도 없는 이 산 중턱에서 선생은 어떻게 그 오랜 겨울을 나신 것일까? 아마도 검불이며 삭정이를 모아다가, 겨우 방안에 온기만 들게 하셨을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사신 선생의 마음이 느껴진다.

많은 천거를 받았지만 모두 물리치고, 스스로 야인이 되어 반계서당에 오른 선생은, 52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 올라 나를 돌아본다. 과연 나는 선생의 만분지 일이라도 마음을 닮을 수가 있을까? 반계서당에 올라 선생의 마음 한 조각을 담아간다. 아마도 내가 죽은 후 누군가 나를 기억할 때, 이곳 반계서당에서 조금은 변화가 되었을 것이란 마음 하나면 족하리라.


400년이 나 된 집이 있다면, 먼저 어떻게 아직도 그런 집이 보존이 되어 있을까하고 궁금해 할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겠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집이 신라 때는 절터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또한 집안에 잇는 석물들도 신라 때의 것이 아직도 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경주시 탑동 633번지에 소재하는 중요민속자료 제34호인 ‘김호장군 고택’은 장군이 태어났다는 집이다. 이 집은 개인의 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김호장군은 임진왜란 때 부산첨사로 큰 공을 세운 분이다.


생각 밖으로 조촐한 가옥

중요민속자료라고 하면 우선은 그 규모가 상당하리란 생각을 한다. 그러나 김호장군의 고택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안채가 있고, 그 우측으로는 뒤편에 사당이 자리한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초가로 마련한 아래채가 서 있을 뿐이다. 그저 평범한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으로 마련한 가옥이다.

안채도 그리 크지가 않다. 임진왜란 당시의 첨사면 이보다는 더 큰 집에 살 것이란 생각을 하고 들어간 것이 내 한계였다. 집을 들어보는 순간 ‘참으로 조촐한 집이로구나’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큰 집일 것이란 생각을 한 나 자신이 부끄러움을 먼저 느낀다. 장군의 단아한 심성을 보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솟을대문과 안채의 부엌(가운데) 그리고 초가로 된 아래채(아래)

5칸의 안채는 마루조차 없어

안채는 솟을대문과 마주하고 있는 - 자형의 구조이다. 모두 5칸으로 구성이 된 안채는 측면도 한 칸으로 지어졌다. 서쪽부터 부엌과 방, 대청과 방으로 꾸며진 단출한 집이다. 건물은 옛 남부지방 가옥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으며, 대청에도 문을 달았다. 현재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조금은 안으로 손을 본 듯하다.

장군의 집을 찾아들어 갔을 때는, 마침 무슨 모임이라도 있는 날인가 보다. 집을 좀 촬영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들이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안채가 이렇게 단순한데 그 외에 건물이라고 특별한 것이 있을까 싶다. 부엌을 뺀 안채는 모두 4칸으로 툇간조차 달지 않았다.



안채 동편과 안방, 장독대

솟을대문은 후에 다시 복원을 하였는지, 양 옆으로는 한 칸씩을 달아냈다. 한편은 곳간으로 사용하고 한 편은 방을 드렸다. 아래채는 정면 3칸, 측면 한 칸으로 초가집이다. 두 개의 방을 드리고, 안채 쪽에 한 칸의 부엌을 달아냈다. 뒤편으로 돌아가니 음식을 준비하는 듯 분주하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 이상은 돌아다니기가 미안스럽다.


우물과 사당(아래)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물

이 집안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바로 우물이다. 아주 오래된 것 인양 고풍스럽다. 돌로 주변을 놓고, 가운데를 좁게 오므려 놓은 특이한 우물이다. 안에는 맑은 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이 집에서 원래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이 집이 신라 때의 절터였다고 하면, 저 우물의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된 것일까?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데도, 마치 비어있는 집인 듯 조용하다. 집안에 모인 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 다과를 들고 있는 듯하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니 담장이 특이하다. 돌로 만든 담장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참으로 조촐하고, 운치 있는 집을 보았다는 생각이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는데, 장군의 절제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운치가 있는 돌담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이나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낙안읍성을 보면 그 형태를 잘 알 수가 있다. 남원읍성은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처음으로 남원읍성을 축성한 것이 1,320년 전이었으니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남원읍성은 조선조인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중국식 읍성을 본 따서 네모반듯한 성으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길이는 2,5km 였으며, 높이 4m 정도로 높게 쌓아올렸다. 사방에는 문을 두었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성곽 중간 중간에 치를 내었으며, 성안에는 71개소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사적 제298호인 남원성의 성곽

옛 영화는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현재 사적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남원성은 남원시 동충동에 자리한다. 교룡산성을 돌아 내려오면 광한루원으로 가는 큰길가에 성곽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있는 남원성은 보기에도 매우 견고한 성이었을 것 같다. 1597년 성을 다시 축성 한 후, 그 해 8월에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에 연합군은 남원성에서 왜군에게 크게 패했으며, 이때 싸우다가 전사한 병사와 주민들의 무덤이 바로 만인의총이다. 그 후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현재는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남원성은 그렇게 역사의 아픔을 안은 채 이제는 찾는 이 하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직선으로 축성을 한 남원성. 당시에는 네모난 읍성이었다.

특별한 남원읍성의 구조

남원읍성의 성 모습을 만인의총에 있는 전시관 안에서 대충 둘러보고 와서인가, 성위에 올라 남아있는 성곽을 보니 그 안에 자리했던 성 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읍성 안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로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로 구성된 시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면서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다.

만인의총 전시관에 있는 남원읍성 모형. 네모난 성에 길이 바둑판처럼 반듯하다.

이러한 구성을 하고 있는 현재의 남원 시가지를 보아도, 과거 성내의 길의 구성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일부만 남아있는 성위로 오른다. 평지에 성을 쌓다보니 밖으로는 돌로 축성을 하고, 안으로는 흙으로 그 뒤를 단단히 쌓아 올렸다. 성 위로는 군사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내었는데, 성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어 당시 남원읍성이 네모반듯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간에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구성한 치가 돌출이 되어있다.




성곽에서 돌출이 된 치(맨위) 치가 돌출이 된 모습(두번째) 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성벽(3, 4) 치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치의 구조 등으로 보아 당시 남원성이 그리 쉽게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성에서 적에게 패해 만여 명의 전사자가 났다면, 그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이 간다. 지금은 그저 성을 끼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만 한가한데, 당시 이 성 위에서는 성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성내의 병사들과 백성들의, 애끓는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더욱 슬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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