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화성을 돌아보기를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다. 길이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찬바람이 많이 불어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렇게 화성을 돌 때 딴 곳보다 더 춥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수원천과 방화수류정의 용연과 같은 물이 있기에 조금의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하만 그보다 더한 이유는 바로 바람을 막아 줄 건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옛날보다 겨울이 많이 춥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화성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보면, 봄부터 가을까지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과거 장용영의 군사들이 화성을 지키기 위해 순례를 돌고, 초소 등에 머물고 있었을 당시는 지금보다 몇 갑절은 더 추웠을 것이다.

 

 

몸에 밴 정조대왕의 백성 사랑

 

이번 19일에 대선이 있다. 가끔 휴대폰에 낯모르는 번호가 뜬다. 그리고는 이번 대선에서 누굴 찍겠느냐고 물어온다. 또한 주변의 지인들과 자리를 함께하면, 으레 묻는 것이 이번에 누굴 찍을 것이냐고 묻는다. 내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다. ‘정조스타일’이 답이다. 정조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두말 않고 찍겠다고 한다.

 

사실 어려서 부친인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보아야했던 정조로서는,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 폭군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근본이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 임금이었다. 화성을 축성 할 때만 보더라도 임금을 꼬박꼬박 지불을 한 것은 물론,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축성을 하는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과 제중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내가 항상 ‘정조스타일’을 찍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정조는 막대한 국고를 소비하는 화성을 축성하면서도, 인건비가 미쳐 지급이 되지 않으면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다.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정조는 그런 연유를 듣고 과감히 결정을 내린다. 바로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기존의 성을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면 그만큼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정조는 국고가 더 들어가는 것보다 백성들의 불편함을 더 생각한 것이다.

 

동북공심돈(위)과 문을 들어서 우측에 마련한 온돌방

 

겨울철 화성에서 만나는 정조의 마음

 

12월 5일 수원에는 3시간 여 만에 10cm가 넘는 눈이 쌓였다. 27년 만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한다. 믈론 12월 초에 이렇게 왔다는 뜻이다. 다음 날 일부러 화성을 걸었다. 눈이 온 다음날은 칼바람이 불었다. 옷깃으로 파고드는 바람으로 인해,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이렇게 추운 겨울, 눈이 내리고 난 뒤 일부러 화성을 돌아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바로 이 겨울에 화성에서 정조의 마음을 읽고 싶어서이다. 겨울이라고 해서 화성에 무슨 정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반문을 한다. 하지만 화성의 일부라도 돌아본다면, 그곳에서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아낼 수가 있다.

 

화성에는 많은 구조물들이 있다. 그 구조물 안에 바로 정조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을 만날 수가 있다. 소라각이라고 하는 동북공심돈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온돌방이 보인다. 밑에는 아궁이까지 있는 온돌방이다. 아무리 추워도 이곳을 들어가면 추위를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다.

 

봉돈(위)과 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마련한 온돌방

 

그곳에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창룡문을 지나 구조물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걷는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어온다. 하지만 정조의 따듯한 마음을 읽어서인가, 처음보다 한결 걸음도 가벼워지고 추위도 덜 느끼게 된다. 봉돈 안으로 들어서 본다. 좌측에는 무기고가 있고, 우측에는 역시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47,000명 정도의 장용영 군사들이 화성에 주둔을 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들 모두가 성을 지킨 것은 아니다. 아마도 각 시설물마다 적은 인원들이 주야 교대로 성을 지켰을 것이다. 그들이 눈과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곳곳에 그런 시설물들이 있다. 남수문 쪽으로 가다가 만나게 되는 동남각루, 그 아래에도 온돌방이 있다. 크지 않아 많은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겨울철 몇 명 정도의 군사들이 들어가 몸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다.

 

동남각루와 그 밑에 마련한 온돌방. 화성에는 구조물 곳곳에 온돌방이 있어 군사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온돌방이 화성의 구조물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여름철이면 시원한 포루 등의 마루를 이용해 더위를 피할 수 있고, 겨울이면 온돌방을 이용해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마련한 화성. 그 하나만으로도 정조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 바로 이런 점이 우리가 ‘정조스타일’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혜경궁홍씨(사도세자가 의황제가 된 후 혜경궁홍씨도 의황후가 되었다)의 묘인 융릉에 전배하기 위하여 행행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이다.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유수)가 집무하는 부아(관청)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왕권강화 정책의 상징인 화성행궁

현재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화성행궁은, 그 일부만이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화성행궁은 화성축조가 완공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576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 되었다. 화성행궁은 화성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화성행궁 이외에도 한양의 궁궐에서 현륭원에 이르는 원행의 노정에도, 왕의 주필하는 행궁이 건립되었다. 즉, 초기의 '과천로' 때는 과천행궁과 사근참행궁을 건립하였고, 정조 18년 '시흥로'가 새로 개척됨에 따라, 이 해 시흥행궁 114칸과 안양행궁, 이듬해인 정조 19년인 1795년에는 안산행궁 등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들 과천이나 시흥, 안양과 안산, 사근참 등 속읍에 건축된 행궁은, 원행의 노정에 잠시 쉬어가는 주필소에 불과했다. 또 그 규모와 활용면에서도 화성행궁과의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화성행궁을 돌아보다

화성행궁에는 현재 어떠한 건물이 있으며, 그 전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현재 복원이 된 행궁은 정조 당시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그 행궁의 곳곳을 돌아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냥 구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각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가고자 한다.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정조 19년인 1795년에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이 때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정조 18년인 1789년 8월 19일 상량하고, 9월 25일 완공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가 된 봉수당은, 1997년에 복원 되었다.

내포사에 오르다

이 봉수당 뒤로는 팔달산이다. 팔달산으로 오르는 곳에 작은 1평 남짓한 전각이 한 채 서 있다. 그저 행궁을 돌아보는 사람들도 이곳은 눈여겨보지를 않는다. 내포사(內鋪舍), 이 작은 전각은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에 알리는 신호를 하는 곳이다. 화성에 포루(鋪樓)가 있다면, 행궁 안에는 포사(鋪舍)가 있다.



화성 안에는 원래 서남포사, 증포사, 내포사 등 세 곳에 포사가 있었다. 이 내포사는 화성 행궁의 뒤편 높은 곳에 자리를 하고 있다. 화성 행궁 밖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받아, 깃발을 흔들거나 목어를 쳐서 방어태세를 갖출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내포사 역시 일제에 의해 파괴가 되었던 것을 2006년에 복원을 하였다.

소나무 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내포사. 행궁 쪽으로 목어를 걸어두었다. 목어를 건 반 칸은 개방이 되었으며, 그 뒤편으로 작은 온돌방이 있다. 사시사철 이곳에서 경계를 서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궁은 화성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 빠른 신호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행궁 바로 뒤편에 자리를 한 듯하다.



작은 건물 하나가 얼마나 큰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내포사 위로 오르면 소나무 사이로 행궁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화성 행궁을 돌아보는 걸음을 이 내포사로부터 시작을 한다. 2012년 1월 29일,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졌다. 바람이 부는 날 찾아간 행궁의 뒤편 내포사를 아이폰으로 촬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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