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그대로 이용해 집을 짓는다는 것은, 요즈음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건축방법이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범하지 않고 건물을 지음으로써,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방법을 택했다.

 

언젠가 어느 지인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다. “환경, 환경하고 말들만 하고 입으로만 떠들 줄 알았지 과연 그런 사람들 정말 환경을 얼마나 생각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어느 나라에서는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차를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하더라. 차에서 배출되는 유독가스를 줄이려고 불편을 감수하는 그 정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이 정말 환경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바위가 그대로 기단이 되다

 

예전에는 자동차가 없었으니 매연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처럼 기반공사를 한다고 마구 파헤치지도 않았다. 암벽을 깨내고 그것을 이용해 축대를 쌓거나, 자연석을 옮겨 정원석을 만드는 과시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집을 지을 때는 지반이 단단한 바위 위라면 오히려 고마워했고, 흙이 단단하지 않으면 <지경다지기>라고 하는 작업방법을 통해서 땅을 단단하게 다져나갔다.

 

지경다지기란 커다란 돌이나 굵은 나무를 이용해 줄을 여러 가닥 묶어 그 줄을 잡아채 하늘 높이 올랐다가 떨어지면서 땅을 다져나가는 방법이다. 물론 거기에는 서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 한사람이 북을 치면서 선창을 하면, 줄을 잡은 사람들이 뒷소리를 받아가며 일을 하는 멋까지 곁들인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자연과 친화적인 삶을 영위했던 것이 바로 우리네 선조들의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입으로 환경을 떠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환경을 지키고, 자연과 하나로 동화되면서 살아오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자연친화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 바로 보물 제213호인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오십천 가 벼랑 위에 세워진 관동 제일루라는 죽서루이다.

   

'이 건물은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이상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죽서루에 대한 설명 첫 부분이다 

 

 

자연암석을 그대로 기반으로 사용한 죽서루는 관동제일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자연을 최대한 이용한 뛰어난 건축기법

 

죽서루는 절벽 위 암반을 기초석으로 이용해 건물을 지었다. 누 아래의 17개의 기둥 중에서 아홉 개는 자연적인 바위를 그대로 이용을 했다. 하기에 그 기둥의 길이가 다 다르다. 나머지 여덟 개의 기둥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처름 죽서루를 보는 사람들은 왜 기둥이 그렇게 길이가 다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친환경적인 건물을 지었다는 놀라운 점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죽서루는 자연주의 전통 건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관동제일루>라 하여도 이의를 달수가 없다.

 

규모는 앞면 7, 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운데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 칸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편에 기둥은 그 배열이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죽서루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1662)에 부사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1711)에 부사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이 밖에도 숙종, 정조, 율곡 이이선생 등 많은 분들의 시가 누각 안에 걸려 있다.

 

죽서루 아래로 흐르는 오십천

 

죽서루, 그 보존상태도 관동 제일

 

고성부터 강원도 7번 국도 남쪽인 삼척까지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찾아 본 많은 정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보존상태를 자랑하는 것도 역시 죽서루였다. 죽서루는 누각 주변 선사암각화와 신라 30대 문무왕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다가 어느 날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고 하는 용문바위 등을 포함해 담장을 둘러놓았다.

 

 

용이 지나갔다고 전하는 바위의 구멍

 

죽서루 경내는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어 보는 이들의 기분도 좋아진다. 여기저기 심어놓은 대가 바람에 나부끼며 잎이 부딪쳐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죽서루 밑을 흐르는 오십천, 그리고 암석 위에 자연스럽게 키 재기를 하고 있는 누각의 기둥, 이 모두가 관동제일루 죽서루의 멋을 더하고 있었다. 지금은 양양 하조대나 강릉 경포대보다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하지만 이것은 죽서루가 바닷가가 아닌 내륙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서루는 관동제일이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밧츨 언제 갈려 하나니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쯤은 암기를 한 기억들도 있을 남구만의 시 ‘동창이 밝았느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약천 남구만선생은 조선 후기(1629(인조 7)~1711(숙종 37))의 문신이다.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남구만의 본관은 의령이며 자는 운로, 호는 약천 또는 미재로 불렀다.


유배지에서 지은 ‘동창이...’

후일 영의정까지 지낸 남구만은 1684년 남인의 기사환국으로 강원도 강릉(현재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부근에 있는 심곡동으로 약천동이라고도 한다)에 서 1년 정도 유배생활을 하였다. 동창이 밝았느냐는 약천마을의 농촌 정경을 보고 지은 시조라고하나,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짙은 시조라고도 한다.

남구만선생이 이 마을로 유배를 왔을 때 ‘약천(藥泉)’이라는 샘물이 있어 자신의 호를 약천이라 짓고, 마을에 심일서당을 개설하여 마을사람들에게 1년 정도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동창이 밝았느냐’는 바로 이 심일서당에서 지은 시조라고 한다. 심일서당은 200년 넘게 지속되어 오다가, 1900년대 들어 이 고장의 학자 김남용과 여운형 등이 운영을 하였으며, 1927년 명진소년회사건(明進少年會事件)으로 일제에 의하여 폐쇄 당하였다.



‘약천팔경’에 마음이 설레이다.

동해 망상해수욕장으로 가다가보면 망상역 못 미쳐 우측에 <약천문화마을>이란 입간판이 보인다. 길에서 조금 들어가긴 하지만 그 마을에 ‘약천정(藥泉亭)’이란 정자가 있다고 하니 들어갈 수밖에. 안으로 들어가니 마을어구에 마을 유래에 대한 설명을 해 놓았는데 바로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가 이 마을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약천마을에는 팔경이 있다. 죽전의 맑은 바람, 약천 샘물가의 버드나무, 초구의 목동이 부는 피리소리, 마평 들에서 들리는 농악소리, 노봉에서 보이는 고깃배 불, 한나루에 들어오는 어선의 풍경, 향로봉에 뜨는 아침 해, 승지동의 저녁밥 짓는 연기 등 약천팔경이 있다고 하니 마음이 설렌다.

마을 안에는 이곳저곳 이정표와 안내문이 있어 여기저기 찾기가 쉽다. 정자에 오르기 전 먼저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나름대로 약천팔경의 한부분이라도 느껴보고 싶어서다. 그러나 어디 팔경이라는 것이 잠시 돌아본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을 괜히 조바심을 낸 것 같아 오히려 송구스럽다. 마을 한복판에는 누각이 있다. 이정표를 따라 마을 진입로 우측에 자리한 송림 안에 위치한 약천정을 찾는다.



솔바람소리의 풍취가 좋은 약천정

‘약천정(藥泉亭)’.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노송 사이에 한낮의 햇볕이 따사로웠는지, 인적 없는 약천정은 그렇게 졸듯 고요함 속에 있다가 나그네를 반기는듯하다. 약천정 뒤로 몇 그루 오죽(烏竹)이 있어 바람에 흔들리고, 정자 안에는 떨어진 솔잎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 오히려 정겹다.

돌길로 깨끗하게 잘 정돈이 된 오르는 계단만큼이나 약천정도 그렇게 다소곳이 마을 동산 노송 숲속에 자리를 하고 있다. 노송에서 이따금 떨어지는 솔잎과 ‘툭’하고 소리를 내는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이 모든 것이 약천 남구만선생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아니었을까? 아마 옛 선인들이 정자와 누각을 짓고 그 곳에 올라 시를 읊으며 한세상을 산 것도 이런 풍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약천정을 뒤로하고 마을길로 내려오면 마을안쪽에 그 유명한 약천(藥泉)이 있다. 샘이라고 하여서 조금씩 솟아나는 물을 생각하다가 정작 물소리를 내며 물줄기를 내뿜는 약천을 보니 조금은 의아스럽다. 대리석으로 잘 정돈이 된 약천은 옛날 남쪽의 어느 선비가 몸에 병을 얻어 각처에 돌아다니며 물 좋은 곳을 찾다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몸이 다 나았으며, 후일 조정에 나아가 큰 벼슬을 하였다하여 약천이라고 했단다.

약천사 앞에는 커다란 돌에 동창이 밝았느냐를 적은 시조비가 서 있다. 이 약천사는 남구만 선생이 귀향생활을 하는 동안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오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아 떠난 후 약천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약천정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한쪽만 터놓고 돌담을 쌓은 곳이 있다. 앞에 금줄이 서려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에서 제를 지내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약천정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는 제장이란다. 매년 음력 11월에 길일을 택해 당산제를 지낸다고 하니 그때 다시 한 번 이 마을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약천마을은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문인 약천 남구만선생의 시조 한편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리고 송림 사이에서 단아한 자태를 지니고 말없이 나그네를 맞는 약천정도 오늘 그 모습 그대로 긴 세월 또 다른 발길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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