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았더니, 기사 제보를 하겠단다. 무슨 이야기냐고 물으니, 오산에 ‘마등산’이라고 있는데 그 정상 부근에 ‘선바위’라는 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바위야 산에 가면 얼마든지 있는 것인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물으니. 한 마디로 그 바위가 정말 영험하기도 하지만 그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어딜 가나 전설이야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들려주는 이야기에 솔깃해진다. 사실은 이 마등산이라는 산의 지명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마등산은 모두 5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1봉으로 가는 능선의 모양이 말의 등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은 노적산, 배꼽산, 달맞이산, 선바위산 등 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마등산의 딴 이름은 왜 붙었을까?

 

마등산이라는 명칭은 2004년 오산시 지명위원회에서, 여러 가지 전해지는 명칭 중에서 가장 적합한 명칭으로 정해놓은 이름이다. 그 외에도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산은, 당말의 뒤편 산봉우리가 마치 노적을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노적산’이라고 했다. 또한 이 산 봉우리 가운데, 마치 사람의 배꼽처럼 생긴 곳이 있다고 하여 ‘배꼽산’이라고도 불렀다.

 

‘달맞이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말 사람들이 이 산에 올라 달맞이를 했던 것에 연유한다. 이 중에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이름이 있다면, ‘선바위산’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선바위란 마등산 정상부근에 마치 돌이 선(=立)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짧은 산행에서 만난 선바위, 그 참 희한하네.

 

제보를 한 박아무개가 거주한다는 오산시 원동 721-1에 소재한 마등사를 찾았다. 이곳은 절이 아니고, ‘마등산 역말굿당’이라는 곳이다. 요즈음은 집에서 굿을 할 수가 없어, 전문적으로 이곳에 들어와 굿을 하는 곳이다. 한 편에 조성한 허궁기도터를 지나 산으로 올랐다. 몇 m 쯤 오르니, 발밑에 토종밤들이 즐비하게 떨어져 있다. 작은 토종밤들이 윤기가 흐른다. 몇 알을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시간이 벌써 5시가 다 되어 가는데, 밤을 줍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다. 산봉우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보니 무슨 초막 같은 것이 하나 보인다. 그 밑으로는 병풍처럼 둘러친 바위가 있고, 그 위로는 몇 개의 바위들이 서 있다. 말 그대로 바위들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바위들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이 바위 중 하나가 보는 방향에 따라, 참 묘하게도 남녀를 상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양성바위(=兩性岩)’라고나 할까? 이곳을 소개한 박아무개의 말마따나, 이 바위가 영성이 아주 강하다고 한 말이 이해가 된다. 한 마디로 내림을 받는 사람들이 말문이 안 트이면, 이곳 선바위에서 빌면 말문이 터진다는 것이다.

 

 

 

소금 배 세 척을 먹어치운 선바위

 

사실 이 선바위에는 지역에는 전하는 전설이 하나 있다. 아주 오래 전에 당말에는 제물포에서 소금을 떼어 와서 파는 소금장수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날도 이 소금장수가 제물포로 갔다는데, 소금장수들에게 소금을 파는 구두쇠 영감이 유독 이 소금장수에게 못되게 굴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딴 사람보다 가격도 비싸게 팔았다는 것.

 

당말에서 소금을 사러 간 이 소금장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구두쇠 영감을 골탕 먹이기로 결심하고, 구두쇠 영감이 비싼 값을 부른 것을 알고서도 그 값을 쳐주겠다고 했다는 것. 그는 구두쇠 영감에게 “내 이름은 당말에 사는 선바위요. 지금은 그렇게 큰돈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내가 소금을 싣고 돌아가서 바로 돈을 보내 드리리다”라고 했다.

 

 

구두쇠 영감은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 소금 배 세척을 내주었다. 그러나 바로 돈을 갖고 오겠다는 소금장수는 영 소식이 없었다. 구두쇠 영감은 화가 나 당말로 선바위를 찾아왔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선바위라는 소금장수의 사는 곳을 물었지만, 아무도 알지를 못했다. 다만 “저기 노적산 꼭대기에 있는 것이 바로 선바위요”라고 알려주었다는 것.

 

남을 골탕 먹이려고 했던 구두쇠영감은, 노적산 꼭대기에 소금더미처럼 생긴 바위만 바라보며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이 바위에 전하는 전설 때문인지, 이 바위들이 얼핏 바라보면 소금덩이처럼 생기기도 했다. 참 전설이란 그 안에 이런 속 깊은 뜻이 있어서 좋다. 남을 해하려고 하면, 반드시 자신이 그만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오래된 상여가 있다고.

 

선바위를 돌아보고 내려오니, 굿당의 당주인 박아무개가 산자락에 있는 상여막으로 데리고 간다. 아주 오래 된 상여가 있다는 것이다. 원래는 역말에 있던 것을, 주민들이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1970년 초에 이 상여를 손보아 사용했다는 것이다. 분리가 된 상여는 보기에도 100년은 훨씬 지났을 것 같다.

 

“이 상여를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이렇게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제대로 맞추어 한 번 사용해 보려고요.”

 

 

오산에는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상여막이다. 전화 한 통을 받고 달려간 곳에서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땀을 식히느라 차 한 잔을 마시고 돌아 나오는 내내, 그 양성바위가 눈에서 아른거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바위기운이라도 좀 받아올 것을.

흔히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고인돌은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경기도 오산시 금암동은 바위가 많아 ‘묘바위’, ‘검바위’, ‘금암’ 등으로 불렀으며, 이곳에는 모두 11기의 지석묘가 확인되었다. 그 중 9기의 고인돌은 경기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곳의 고인돌들은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고인돌에 파인 성혈, 쇠붙이로 조형한 듯해

 

고인돌 덮개돌의 윗면에는 수직으로 파인 알구멍(=성혈(性穴))이 있다. 금암동의 고인돌 중에서 2호 고인돌에도 성혈이 나 있는데, 구멍의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이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자식 낳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산시 금암동에 분포한 9기의 지정 고인돌은 금암동 일대의 야트막한 구릉지대와 논에 분포하고 있던 것을,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고인돌 중에서 덮개돌만 땅 위에 올려놓은 것을 개석식이라고 하는데, 전문가들은 금암동의 고인돌 군이 바둑판식이라고도 하지만(문화재청 설명) 이곳의 고인돌은 모두 개석식으로 보인다. 덮개돌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6m에 이른다. 각 덮개돌의 둘레에는 돌을 다듬은 흔적이 잘 남아 있다.

 

공원으로 조성한 금암동 고인돌군

 

5월 2일 찾아간 금암동 고인돌 무리. 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제일먼저 바위 위에 조성한 한 기의 고인돌이 보인다. 6호 고인돌은 바위 위에 커다란 덮개돌 하나를 올려놓은 형태이다. 화강암 계통의 장방형 돌로 조성한 덮개돌이다. 그 곳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 제5호 고인돌을 만나게 된다.

 

 

 

5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두 조각으로 깨어져 있고, 돌의 형태는 장타원방형에 가깝다. 그곳에서 고인돌 무리가 모여 있는 아래편으로 내려가면, 여러 기의 고인돌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이 중에서 경사가 완만한 비탈에 놓여있는 4호 고인돌은 덮개돌이 장방형에 가깝고, 덮개돌 남쪽과 동쪽 부분의 단면을 다듬은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공원으로 조성한 이곳 금암동의 고인돌 무리군에는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 바위가 있으며, 7기의 고인돌이 펼쳐져 있다.

 

 

 

 

사적 지정 서둘러야

 

고인돌군이 펼쳐진 곳은 정비가 잘 되어있어, 학생들이 찾아와 고인돌에 대해 알아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한편으로는 고인돌의 역사와 모양, 분포 등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설명판을 붙여놓은 구조물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운동을 하면서 걷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고인돌군이 펼쳐진 동편으로는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들은 마을을 위하는 돌이라고도 한다. 모두 9기의 개석식 고인돌이 자리를 하고 있는 오산시 금암동 고인돌군. 현재 경기도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지만, 개석식고인돌이 무리를 지어 있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사적’으로 지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를 위해 더 많은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석묘, 혹은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돌무덤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난다. 전 세계에 고인돌은 모두 6만 여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3만 여기가 우리나라에 소재한다. 고인돌은 모두 3종류가 있으며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구 유형을 갖고 구분을 짓는다.

 

탁자식이란 평평한 굄돌을 세워서 땅위에 네모꼴의 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서 탁자식으로 조성을 한 것이다. 바득판식은 땅 위에 3~6개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며, 지하의 무덤방은 돌놀, 돌덧널, 구덩 등의 형태가 있다. 개석식은 지상에는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 혹은 무지석식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오산 외심미동의 고인돌

 

오산시 외삼미동 384에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 기념물 제211호 고인돌. 이 지석묘는 숲으로 둘러싸인 구릉에 위치한 2기의 고인돌이 자리한다. 이 고인돌은 시민들의 요구에 의하여 한양대 박물관장겸 경기도 문화재 위원인 김병모 교수가 현지에서 조사를 하였다.

 

이 지석묘는 확인결과 청동기 시대 후기에 속하는 유적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이 혼재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고인돌을 ‘거북바위’ 또는 ‘장수바위’리고 부른다. 이 고인돌은 선사시대 생활상을 연구할 수 있는 문화사적 가치를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 고인돌의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크기는 260×230×90cm 정도이다.

 

 

 

굄돌이 누워있는 형태의 고인돌

 

이 고인돌은 덮개돌의 중앙을 손질하여서 마치 거북등과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덮개돌의 위에는 지름 6~7cm 정도의 성혈이 15개 정도가 있다. 이 고인돌의 특징은 바로 덮개석을 받치고 있는 굄돌이다. 일반적으로 굄돌은 사방에 세워 묘실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고인돌의 형태이다.

 

그러나 외삼미동의 고인돌은 굄돌이 처음부터 누여져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모습의 고인돌의 형태인 황구지천의 상류인 화성 병점과 수기리 유적에서도 조사가 된 바 있다. 굄돌을 세우지 않고 누운 채로 그냥 사용하였다는 것은 고인돌의 처음의 이른 형태였을 것으로도 생각한다. 이 고인돌의 남쪽 옆에는 개석식 고인돌의 덮개석으로 보이는 넓적한 돌이 놓여있다.

 

 

 

고인돌을 찾아 거리를 방황하다.

 

오산시 외삼미동에 있는 고인돌을 찾아 길을 나섰다. 요즈음은 멀리 장거리 답사를 나가지 못하는 편이라, 시간이 날 때마다 주변을 다니면서 답사를 하는 편이다. 외삼미동 안으로 들어가 북오산IC 입구로 가다보니 외삼미동 고인돌이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런데 거리는 적혀있지 않고 앞으로 가라는 화살표만이 보인다.

 

그리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 다음에 안내판이 나올 것이란 생각을 하고 갔지만, 화성 동탄 끝까지 갔는데도 어느 곳에도 고인돌 안내판이 보이지가 않는다. 오산시 문화체육과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우측으로 굴다리가 있다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고인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들어가는 입구에도 안내판이 없고, 굴다리 안에는 또다시 좌측으로 굴다리가 있는데도 안내판이 없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굴다리 안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 안내판이란 초행길인 사람들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달랑 길가에 하나 서 있는 안내판. 화살표 하나로 문화재 안내를 다 했다는 생각을 한, 담당부서의 무책임한 처사에 울화가 치민다.

 

들어가는 입구에 안내판 하나만 더 설치를 했다면, 20km정도를 더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는데 말이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를 찾아다닌다. 내 고장의 자랑거리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 162번지 일대에 소재한, 사적 제140호인 독산성과 '세마대지(洗馬臺址)'. 이곳은 몇 번이고 가본 곳이다. 이곳을 자주 찾는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산 위로 올라가면 주변을 훤히 볼 수가 있어, 가슴이 후련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국민학교(우리 때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불렀다)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린 권율장군의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선조 26년인 1593년, 권율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 여명을 이끌고 독산성에 주둔하여, 가토가 이끄는 왜군 수만 명을 격퇴시킨 곳이기도 하다.

 

 

쌀로 말을 씻긴 세마대

 

산성에 오르면 보적사라는 절이 있다. 그 절 뒤편에 지금은 정자가 서 있다. 정자에는 '세마대'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 세마대에 전하는 전설이 바로 국민학교를 다닐 때,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었다.

 

1593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권율 장군이 이끄는 병사 2만 여명이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이 이 벌거숭이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 보내 조롱하였다. 그러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를 산 위로 끌어 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본 왜군은 멀리서 보니, 그 모습이 꼭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기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산성 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오판하고 퇴각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렇게 흰말과 쌀로 왜군을 속여 물리친 곳이 세마대이다. 사적 제140호는 독산성과 함께 말을 씻긴 장소라는 세마대지를 지정하고 있다.

 

도성을 지키는 요충지인 독산성

 

독산성을 언제 쌓았는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쌓은 성을,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중요한 거점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독산성은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성으로, 용인의 석성산성이나 광주의 남한산성 등과 연계하여 도성을 에워싸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조 27년인 1594년에는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1595년에는 성벽의 돌출된 치에 포루의 시설이 갖추어졌다. 1597년 2월에는 왜병의 조총을 방어하기 위하여, 평평한 집을 성벽 안에 짓고, 거기에 성의 아래로 향한 창문을 시설하였으며, 석차와 포차를 배치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인 1602년에도, 당시 부사 변응성이 성을 다시 보수하였다.

 

그 후 정조 16년인 1792년에도 성을 보수하였으며, 정조 20년인 1796년에는 수원읍성인 화성을 축조할 때 함께 개축하여 성을 단단히 하였다. 이렇게 독산성을 보수하고 단단히 쌓은 것은, 도성을 지키는 길목에 있는 군사적인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봄바람을 맞으며 독산성을 걷다

 

독산성의 둘레는 3240m이다. 성에는 문이 4개이고 암문이 있다. 정조 당시에 성을 개축할 때는 성의 둘레가 1800보였으며, 성벽은 외면이 장방형이나 방형이 되도록 다듬은 석재를 이용했다. 성벽은 안으로 약간의 기울기가 있도록 쌓아 매우 견고하게 축조가 되었다.

 

성안에 자리한 보적사에서 시작해 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황사가 심하게 낀 날이라고 하지만, 모처럼 맞은 따듯한 휴일이라 그런지, 성곽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세마대를 거쳐 동쪽으로 성벽을 밟고 걸어본다. 단단하게 쌓은 성벽에 돌출된 치가 보인다. 아마도 저 곳에 포루를 설치하고, 밀려드는 왜적을 향해 포를 쏘았을 것이다.

 

 

 

산성 주변을 모두 잡목을 제거하여 성벽이 훤히 보이도록 하였다. 3월의 봄바람이 시원하게 땀을 식힌다. 문지였을 것 같은 곳에는 성벽이 유난히 단단해 보인다. 뒷짐을 지고 걸어보는 독산성. 성벽 틈에 아래로 꺼진 곳, 그곳에 암문이 자리하고 있다. 적의 배후를 기습적으로 공격을 하거나, 적이 모르게 군수물자를 옮기기 위해 만든 문이다.

 

가파른 산비탈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아마도 저 곳에 수만 명의 가토가 이끄는 왜병들이 주둔을 했을 것이다. 독산성의 위치만으로도 오르기 힘든 곳이거늘, 거기다가 이렇게 견고한 성이 자리하고 있었다니. 왜병들도 이 성을 공략하기란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한 시간 남짓 돌아본 독산성. 옛날 옛적 교과서에서 배운 전설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며, 산자락에 걸린 성을 뒤로한다.

동해안에는 수 많은 해수욕장이 있다. 이제 이 지리한 장마가 끝나고나면 불볕더위가 시작이 된다고 한다. 그 더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역시 피서를 가는 일이고, 그 피서에는 바닷가가 제격이다. 많은 해수욕장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족이나 연인과 더불어 조용히 쉬고 싶을 때는 어찌해야 할까?

그저 물 속을 들락거린다면 그것도 별 재미가 없다. 느낄 수 있고, 좀 더 색다른 재미가 있는 곳. 동해안의 많은 해수욕장 중에서 비교적 사람들이 붐비지 않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을 돌아본다. 단 강원도 고성, 속초, 양양의 헤수욕장 중에서. 물론 몸짱이신 분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신 곳에서 몸매 자랑을 하셔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몇 곳을 소개한다.   

조개가 발을 물어요. 천진해수욕장



고성군 토성면에 위치한 천진해수욕장. 해안선을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형성이 된 천진해수욕장은 연이어 봉포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은 물 속에 들어가 발로 조개를 잡을 수 있는 곳. 주변에는 경동대학이 있어 원룸시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해안선을 따라 주변 해수욕장으로 이동을 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바위와 맑은 물이 일품인 아야진 해수욕장



아야진해수욕장은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아야진할 해변도로를 따라가다가 북쪽 끝에 위치한 곳으로 물 속 바위와 맑은 물이 어우러진 조용한 곳이다. 주변에는 관동팔경 중 한 곳인 청간정이 자리하고 있어 두루두루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징어 맨손잡기가 즐거운 장사해수욕장



속초시 장사항 인근에 자리한 장사해수욕장. 해수욕장으로서는 그리 좋은 곳은 아니다. 바로 옆에 항이 있고, 바닷가로는 많은 횟집들이 즐비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색다른 재미가 있는 곳이다. 바로 맨손 오징어잡기이다. 아이들과 아른들이 함께 맨손으로 오징어를 잡아, 그 자리에서 회로 먹을 수 있는 곳. 운이 좋으면 20만원을 홋가하는 녀석도 잡을 수가 있다. 바로 인근에는 나무도 조용한 등대해수욕장이 자리한다.

싱싱한 회가 즐거운 외옹치 해수욕장



속초해수욕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러나 외옹치 해수욕장은 속초 해수욕장과 연결이 되어있으면서도 조용한 곳이다. 두 해수욕장이 해안 산책로로 연결이 되어있다. 외옹치 해수욕장은 2005년에 처음으로 문을 연 곳이며, 주변에는 외옹치항과 대포항이 자리하고 있어, 싱싱한 해산물을 즐길 수도 있는 곳이다.

마을 인심이 후덕한 양양 정암 해수욕장




정암 해수욕장은 7번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어, 해수욕장으로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또한 주차장이 따로 없어 주차도 국도변에 해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물치항과 설악 해수욕장이 인근에 있어 조용하게 가족이나 연인끼리 찾아 쉬기에는 제격이다. 주변에는 호텔과 모텔 숙박시설이 있어 숙박을 하기에는 편리한 점이 있다. 음식점은 마을부녀회에서 운영을 하기 때문에 깨끗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선사유적지가 있는 오산해수욕장



양양 오산해수욕장은 내수면 연구소와 선사유적지 등이 잇는 곳이다. 이곳은 연인이나 가족들이 찾기에 적당한 곳이며, 아이들과 함께 주변에 있는 오산리 선사유적지 등을 돌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양양 남대천 연어축제 때는 현장 체험 코스로도 이용을 하고 있다.

파도타기가 즐거운 기사문(3,8) 해수욕장



7번 국도를 따라 속초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3, 8 휴게소가 나온다. 그 안 마을에 자리한 이 해수욕장은 기사문 해수욕장이지만, 3. 8 해수욕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주변에 숙박시설이 많아 가족들이 함께하기에 좋다. 또한 운이 좋으면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써핑을 하는 모습도 볼 수가 있기도 하다.

송림 야영지가 즐거운 연곡해수욕장



가족들이 즐겨 찾는 곳 중 한 곳은 바로 양양에 위치한 연곡해수욕장이다. 이곳은 해수욕장과 물려있는 송림이 아름답다. 피서에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은 그리 많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맑은 바다다 있어 좋고, 수영을 마치고 나면 우거진 송림 사이에 텐트를 치고 산림욕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