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느림보타운 거북시장 음식한마당‘. 거북시장은 수원에서도 그 역사가 가장 오랜 전통시장 중 한 곳이다. 예전 거북시장 인근에는 영화역과 객사가 있었다. 이곳은 장영외영 군사들이 묵는 곳이었고, 더구나 정조의 능행차 때도 이곳 영화역 앞을 지났다. 또한 한양으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장안문을 벗어나 이곳을 거쳐야만 했던 곳이다.

 

이 시장 일대는 영화역에 있는 말들을 키우는 마방이었다고 한다. 18세기 우리나라의 상권의 형성은 개성과 수원, 안성을 잇는 ‘의주로(義州路)’가 바로 삼남대로 중 한곳이었다. 개성상인인 ‘송상’, 수원의 ‘깍정이’, 그리고 안성의 유기상인 ‘마춤이’ 등이 그것이다. 수원의 상거래 중심지는 당연히 거대한 마방이 있는 영화역(현재의 영화동사무소 인근)이었을 것으로 본다.

 

 

 

땅 주인의 별명으로 지어진 이름 거북시장

 

정조대왕은 당시 화성인근에 6개소의 장시를 개설하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중 한곳이 바로 거북시장이다. 거북시장은 수원상권의 발원지였으며, 정조의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역이 500여 평 규모에 말을 키웠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상당히 번화한 장시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거북시장에는 200여개의 점포들이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거북시장은 수원의 재래시장 중에서도 그 넓이로 친다면 1~2위 안에 들어갈 정도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 곳에 집단으로 형성되기보다는, 여러 길과 골목 등으로 형성되어 있다. 거북시장 상인회 차한규(남, 59세) 회장은

 

“이곳의 시장 이름이 예전에는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거북시장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30~40년 정도인데, 이곳 일대의 땅이 모두 한 사람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별명이 ‘거북이’였는데, 시장 이름을 그 별명으로 부르게 된 것이죠” 라고 한다.

 

 

 

밤늦은 음식문화제 현장을 돌아보다.

 

원래 제2회 거북시장 음식문화제는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열렸다. 지역의 상인들이 시장 중심의 도로 양편에 부스를 설치하고, 중앙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축제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음식을 팔았다. 하필이면 행사 날과 e-수원뉴스 시민가자들의 전주, 충무를 돌아보는 워크숍 일정이 같아, 할 수 없이 막판에 시장을 찾을 수밖에.

 

전주와 충무를 거쳐 수원에 도착한 시간이 14일 오후 6시 30분경. 시민기자들과 헤어져 거북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중심가에 도로는 사람들로 들어차 있고,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로 인해 그야말로 거북시장 일대가 온통 시끌벅적하다. 거기다가 시간이 배가 고파오는 때라, 음식냄새로 인해 시장 끼가 더 돈다.

 

행사장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자리에 앉았다. 이런 좋은 곳에 와서 그냥 돌아간다는 것은, 그도 실례라는 생각에서이다. 축제는 함께 즐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누적된 피로와 속이 허한데, 술을 한 잔 마시면 탈이라도 날 것 같아 따끈한 국물이 있는 홍합탕과 안주를 시켜놓고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 본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작은 행복을 느끼는가 보다. 가끔 이렇게 지인들과 한 자리에 앉아 술을 한 잔씩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소중하단 생각이다.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아는 분들이 들려 인사를 하고는 한다.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그렇게 거북시장의 음식한마당은 밤이 깊어가는 데도 열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3일 동안 장사를 했다는 상인회의 한 분은

 

“정말 피곤합니다. 새벽부터 준비를 해서 밤 10시가 넘도록 서서 손님들을 맞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것을 3일씩이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노동입니까?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좋기는 하지만, 내 년 부터는 이틀 정도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기도.

 

파장동에서 왔다는 어느 여성은

 

“이렇게 시장 길에 앉아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즐겁죠. 물론 준비를 하는 집행부나 음식을 파시는 분들은 힘이 드시겠지만, 이렇게 다양한 음식을 싼 가격으로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이런 행사가 여기저기 많이 좀 열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다.

 

수원 영화동에 조성 된 느림보타운 거북시장 음식한마당. 그 축제에서 점점 깊어가는 10월의 밤을 즐긴다. 그래서 축제는 계속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가 보다.

“우리 장안거북시장은 정조대왕의 화성 축성 시, 처음으로 시장을 개장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벌써 2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시장이죠. 당시 지금의 거북시장은 모두 영화역에 있던 마방(말을 키우고 관리하던 옛 장소) 이었다고 합니다.”

 

거북시장 상인회 차한규(남, 59세) 회장의 설명이다. 9월 12일 오후에 찾아간 거북시장. 수원에 장시를 열고 있는 22곳의 재래시장 중에서, 넓이로 따지자면 1~2위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현재 거북시장에는 200여개의 점포가 사방으로 뻗은 길에서 손님들을 맞고 있다.

 

 

“처음에 이 시장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거북시장이란 명칭을 사용 한 것은 40~50년 정도입니다. 당시 이곳이 거의 한 사람의 땅이었는데, 그 분의 별명이 거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북시장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죠”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상권을 자랑하던 곳

 

18세기 우리나라의 싱권의 형성은 개성과 수원, 안성을 잇는 ‘의주로(義州路)’가 바로 삼남대로였다. 개성상인인 ‘송상’, 수원의 ‘깍정이’, 그리고 안성의 유기상인 ‘마춤이’ 등이 그것이다. 수원의 상거래 중심지는 당연히 거대한 마방이 있는 영화역(현재의 영화동사무소 인근)이었을 것으로 본다.

 

정조대왕은 당시 화성인근에 6개소의 장시를 개설하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중 한곳이 바로 거북시장이다. 거북시장은 수원상권의 발원지였으며, 정조의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역이 500여평 규모에 말을 쳤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상당히 번화한 장시였음을 알 수 있다.

 

 

예전 우리나라에는 ‘역원(驛院)’이 있었다. 역은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말을 바꾸어 타는 곳이고, 원은 공무를 보는 관리들이 묵는 곳이다. 영화역은 당연히 말을 관리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영화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말을 관리를 했을까? 장안문 앞에 있는 영화역에서는 단연히 정조의 능행차에 필요한 말들 수백 마리를 관리를 했을 것이다. 현재 거북시장 인근이 모두 마방이었다는 것을 보아도 그 규모를 알 수가 있다.

 

52칸이나 되는 영화역과 역마산, 마장산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당시 영화역은 찰방역이었는데 이를 군제에 포함시키고, 북성(화성의 북쪽)의 척후장을 겸직하게 하였다. 한데서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정조 20년인 1796년 8월 1일에 정조는 수원부 유수 조심태에게 지시를 한다. 북문 밖에 역관을 설치하고자 하나 재력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화성성역의궤>에 보이는 영화역의 규모는 정당 및 삼문이 있는데 모두 남향이며, 내아는 모두 52칸이라고 했다. 지금도 영화초등학교의 뒷산을 마장산, 또는 역마산이라고 한다. 이 곳에 말을 놓아먹이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변화를 시도하는 거북시장

 

장안문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은 ‘새 수막거리’였다. 여정에 지친 행인들이 국밥 한 그릇에 텁텁한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곳이다. 장안문을 벗어나 이 거리에 들어서면, 웃음 띤 주모의 얼굴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지나쳤을 것이고, 그런 행인을 상대로 한 장시도 상당했을 것이다.

 

“저희 거북시장이 1980~90년대 까지는 그래도 상당히 번화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희 시장은 특성이 없는 재래시장으로 변하고 말았죠. 저희들도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관광버스가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거리 정비를 할 생각입니다. 전신주 지중화사업, 간판정리 등의 예산도 확보되었습니다. 현재 용역을 마치고 11월이면 공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거북시장 차한규 상인회장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북시장의 옛 영화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새 수막거리’라는 이름은 날마다 술집이 새로 생겨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더구나 정조 당시에는 장안문 밖에 장용외영의 훈련장이 있었다고 하니, 그 때의 번화한 거리는 새삼 가늠할 수가 있다.

 

수막거리 형성이 거북시장을 살리는 길

 

차한규 회장과 인터뷰를 마치고 시장 길을 돌아본다. 현재 거북시장은 여기저기 온통 먹거리 집들만이 즐비하다. 재래시장의 특성상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특화된 것이 있어야 하는데 비해, 거북시장은 그런 것이 눈에 띠질 않는다. 꼭 이곳을 찾지 않아도 어디서나 쉽게 찾아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옛 수막거리를 돌아본다. 과거 분내 풍기고, 웃음을 팔던 주모들이 있던 곳. 치미자락을 위로 끌어 잡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뭇 남정네들의 마음을 녹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은 그런 특화된 거리가 필요할 때이다. 장안문을 나서 현 수성중학교까지 길에 뻗어 있었다던 새 수막거리. 그 거리가 새삼 그리운 까닭이기도 하다.

 

영화역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거북시장 상인회. 아마도 그 꿈이 머지않아 이루어지고, 분내 나는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수막거리를 감도는 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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