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읍을 가로 질러 흐르는 동강. 그곳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영월 땅으로 유배를 간 후, 그것마저 부족해 수하들을 시켜 단종을 죽음으로 몬 수양의 슬픈 이야기가 전하는 정자가 있다. 단종이 죽고 난 뒤, 낙화암에서 동강 푸른 물로 몸을 날려 단종을 따른 시녀와 종인들의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사당이 있다.

 

그 사당 앞에 자리 잡은 정자가 동강 푸른물을 굽어보고 있는 금강정이다. 금강정은 세종 10년인 1428년 김복항이 처음으로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금강정을 찾은 날은 벌써 꽤 오래되었다. 사람들은 그 주변에서 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 금강정의 슬픈 이야기는 모르고 있는 듯하다.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해가 세조 3년인 1457년이었으니, 시녀와 종인들이 이곳에 와 동강 푸른물에 몸을 날렸을 때는, 이미 금강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마 시녀와 종인들은 단종이 머물던 동헌을 떠나, 이곳으로 와 이 금강정에서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을까? 동강을 굽어보고 있는 금강정은 대답이 없다.  

 

금강정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자삼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금강정이란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정면 네 칸의 팔작 정자

 

금강정은 이자삼이 영월 군수로 있을 때, 정자를 고쳐짓고 금강정이라 이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송시열이 숙종 10년인 1684년에 쓴 금강정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금강정은 처음으로 이 자리에 짓고 나서 벌써 60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금강정은 30cm 정도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둥근 기둥을 이용하여 정자를 지었다.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정자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머름형태의 평난간을 둘러놓았다. 화려하지 않은 금강정의 처마를 올려다보면 조금은 색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처마 밑 장식을 용이나 닭 등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금강정은 잉어를 조각한 듯하다. 아마 밑을 흐르는 동강 맑은 물을 상징이라도 하는 것인가 보다.

 

금강정은 30cm 정도의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둥근 기둥을 이용하여 정자를 지었다.

잉어를 조각해 놓은 듯하다.

 

아름다운 금강정, 세월은 슬픔도 잊어

 

현재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금강정. 그동안 수차례 보수를 하였겠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정자 뒤편에 있는 시녀와 종인들의 넋을 위하는 민충사와 함께 동강을 굽어보고 있어, 역사를 알고 나니 슬픔을 간직한 듯 보인다.

 

금강정 앞으로는 동강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조망대를 설치하였다.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니 멀리 흘러 남한강으로 이름을 바꿔 흐르는 동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모시던 임금이 사약을 받는 모습을 본 시녀와 종인들도 이렇게 동강 맑은 물을 내려다보았을까? 그 때 그들의 마음을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금강정에서 바라본 동강. 단종이 죽은 후 이곳에서 동강으로 뛰어 든 시녀와 종인들이 마음을 느껴보다.

 

 

금강정은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의 정자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난간에는 여기저기 낙서를 해 놓은 것이 보인다.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 서로의 사랑을 약속하면서 굳은 맹서라도 한 것일까? 역사의 슬픈 흔적은 그 낙서로 인해 다 지워지는 듯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을 다 잊는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은 세월이 약이라고 하는가 보다. 여기저기 쓰인 낙서를 보다가 쓴 웃음을 짓고 만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낙서.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화가 나지도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할 뿐.

 

오늘도 금강정 앞으로 흐르는 동강은 그렇게 말이 없다. 600년 전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자에 올라 동강을 굽어보며 잠시 고개를 숙인다. 이 찬 물로 뛰어들었을 시녀와 종인들이 넋이라도 위로를 할 생각으로.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슬픔을 안은 역사는 그리 계속되는 것인지. 

 

조망대 난간에 쓰인 낙서

젊은이들이 사랑을 확인한 것일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누각이 있다. 바로 영월 영흥리 시내 한복판에 있는 관풍헌의 자규루다. 이상하게 영월에 답사를 갈 때마다 비가 쏟아졌다. 자규루에 올랐을 때는 비바람이 심해 답사를 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자규루는 영월의 동헌이었던 관풍헌에 속해 있는 누각이다. 이 자규루는 원래 세종10년인 1428년에 영월군수 신숙근이 창건한 누각으로 ‘매죽루’라 불렀다고 한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청령포가 홍수를 인해 침수가 되자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단종임금은 이곳에서 생활을 할 때 이 누각에 올라 ‘자규사’와 ‘자규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달 밝은 밤에 두견새 두런거릴 때(月白夜蜀魂啾)

시름 못 잊어 누대에 머리 기대니(含愁情依樓頭)

울음소리 너무 슬퍼 나 괴롭네(爾啼悲我聞苦)

네 소리 없다면 내 시름 잊으련만(無爾聲無我愁)

세상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니(寄語世上苦榮人)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愼莫登春三月子規樓)

 

단종임금은 누각에 올라 자신의 신세를 이렇게 한탄했다. 『장릉지(莊陵誌)』에 전하는 자규사다. 단종임금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이렇게 슬픈 나날을 보냈다. 장릉지에는 또 한 수가 전한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孤身隻影碧山中)

밤이 가고 또 다시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假面夜夜眠無假)

해가 가고 또 가도 한은 끝이 없구나(窮恨年年恨不窮)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산봉우리 달빛만 흰데(聲斷曉岑殘月白)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血流春谷洛花紅)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고(天聲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내 귀만 홀로 밝은고(何奈愁人耳獨聽)

 

통한의 시다.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통했으면 이런 시를 남겼을까? 비가 쏟아지는 자규루에 올라 앞에 보이는 관풍헌을 바라다본다.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은 조선조 태조 7년에 건립이 되었다. 이곳으로 옮겨 온 단종임금은 이듬해인 세조 3년인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금부도사 왕방연을 시켜 내린 사약을 마시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관풍헌은 신라 문무왕 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매죽루였던 이 정자는 단종임금으로 인해 자규루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후 선조 38년에 큰 홍수로 인해 허물어진 것을, 정조 15년에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쏟아지는 비는 단종임금의 눈물인지. 관풍헌 앞마당에서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른다. 세상사 다 그런 것이라지만, 권력 앞에서는 숙부와 조카도 없는 것인지. 지금의 돌아가는 나라꼴을 생각하니 불현듯 자규루가 생각이 난다.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날 찾았던 자규루. 그곳에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권력의 아픔이 있었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이 앞을 흐르는 남한강 상류의 푸른 물, 그리고 그 안에 냇돌을 지나 만나게 되는 소나무 숲. 우리가 흔히 ‘청령포’라고 하는 곳이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에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이 되었다. 숙부에게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상왕이 되었던 어린 조카 단종.

조선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물론 기록에는 양위라고 되어있겠지만 말이다. 그 후 1446년 성삼문,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격하되어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상류로 오르다가 이포에서 배를 내린다. 그리고 육로로 여주의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후, 고달사지를 지나 문막,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가 되었다.

오직 뱃길만이 접근이 가능한 ‘청령포’와 ‘관음송’

청령포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다. 삼면이 남한강 물줄기가 휘돌아드는 곳이며 물살이 거센 곳이다.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접근을 할 수도 없다, 그 어느 곳으로도 밖으로 출입을 할 수가 없는 곳이다. 마치 섬과 같은 이곳 청령포에는 단종의 슬픈 역사를 지켜 본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어수정'은 현재 골프장 안에 있다. 이 어수정은 단종이 유배를 가다가 목을 축였다는 곳이다


관음송(觀音松), 이 나무는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그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와는 많이 다르다. 수령이 600여년이나 되었다는 이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30m, 가슴높이 둘레가 5.2m 정도에, 가지 길이는 동·서쪽이 22m, 남·북쪽이 19.5m 정도이다.

단종은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후 이 고달사지를 지나 여주군 북내면으로 들어선다. 이곳에는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유배길에 오른 단종이 쉬어갔다는 바위와 '노림'이라고 부르는 숲이 있다. 일설에는 단종이 흥원창까지 갔다고도 하나, 여주지역의 많은 지명에서 여주를 거쳐 갔음을 알 수 있다 

 

지상에서 1.6m 정도 되는 곳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는, 단종이 유배시절 이 갈라진 곳에 앉아 소일을 했다는 것이다. 관음이라는 말도 단종과 연관이 있다. 즉 단종의 '슬픈 유배생활을 보았으며(=觀),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音)'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소리를 들은 것일까? 아니다, 그 구슬픈 소리는 이야기가 아닌 단종의 슬픈 울음이었을 것이다.

단종 임금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무엇을 했을까? 때로는 서북의 한양을 바라보고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짓기도 했을 테고, 때로는 동쪽의 흐르는 강물을 바라다보면서 이 좁은 곳에서 나가고도 싶었을 것이다. 어린 단종임금은 아마 어디를 보나 자신의 처지가 슬퍼 울음으로 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 슬픔을 묵묵히 바라다보며 함께 한 소나무는 그 후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껍질이 검게 변했다고 한다. 그리움에 속이 타버린 단종의 마음이 전해져 나라걱정을 하는가 보다.

단종이 이 갈라진 소나무에 앉아 슬피 울었다고. 이 나무는 단종의 이야기 소리를 보고 들었다고 하여 관음송이라고 하지만, 이야기가 아닌 울음소리 였을 것이다.


임은 떠나고 세월만 남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관음송을 보기 위해, 청령포를 찾아 영월 땅에 들어설 때마다 비가 내렸다. 세 번이나 찾았지만 그 때마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청령포를 들어가질 못했다. 아마 영월이라는 곳이 단종임금의 슬픈 사연이 많은 곳이다 보니, 갈 때마다 눈물이 되었는가 보다.

네 번째 찾았을 때 비로소 관음송을 볼 수 있었다. 주변에 나무들보다 유난히 높게 자란 관음송. 가지는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갈라진 나무줄기 위에 잔가지들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굴곡이 졌다. 마치 단종임금을 위로하기 위해, 나무가 스스로 춤을 추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이곳 고도와 같은 청령포에서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단종을 위해 관음송 스스로 춤을 추지는 않았을까?



그 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연신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은 저렇게 모든 것을 다 잊고 살아가는데. 관음송 한 그루만이 그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인지. 단종을 위로하느라 추던 춤을, 오늘도 멈추지 않고 있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에 가면 단종임금이 지나갔다는 마을이 있다. 여주군 북내면에 있는 상구리와 상교리, 그리고 주암과 서원리 등이다. 1457년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봉이 되어,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여명의 호송을 받으며 유배 길에 올랐다.

1457년 6월 22일, 단종은 한양을 출발하여 일주일만인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어린 단종은 상왕이 되었다가 다시 노산군이 되어 한양을 출발해 뱃길로 한강을 거슬려 이포나루에 도착을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어린 단종은 어디로 길을 택해 영월로 향했을까?

눈물어린 길을 따라가 보다

여주군 상구리 블루헤런 골프장 안에 있는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

파사산성이 보이는 강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단종 일행은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위안골을 지나 무촌리 -옥촌리-장풍리를 거쳐 현재 골프장인 블루헤런 안에 있는 어수정에 도달했을 것이다. 어수정은 단종임금이 이곳에서 마른 목을 축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당시에야 길인들 제대로 있었을까? 겨우 사람 하나 지날만한 숲길을 헤치고 일행은 더딘 걸음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일행은 혜목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던 절로 ,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 시대에는 동봉원. 희양원과 함께 삼원의 하나로 역대 왕들이 비호를 하던 사찰이다.


어수정에서 물을 마신 단종은 안개가 자욱한 이 산을 넘어 고달사지에 도착한다.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당시는 고달사가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단종 일행이 지나갈 때 바라보지 않았을까? 그 중에는 억울한 단종의 유배길에 눈물을 훔치는 백성들도 있엇을 것이다.

고달사에서 논둑 길을 따라 걷다가보면 좁은 산길이 나온다. 산길이라야 그저 낮은 마을 뒤 언덕이다. 이 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낭나무에 도착을 한다. 서낭나무는 지금은 옆으로 쓸어져 모진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아마 당시 이곳을 지나던 단종일행의 아픔을, 아직도 다 전하지 못했음을 아쉬워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좁은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하늘이 트인 곳이 나오고, 그 낮은 고개 위에는 서낭나무가 서 있다.

서낭나무 앞에서 잠시 숨을 들이쉰다. 서낭나무에서 20여m 앞에는 예전 서낭할머니가 살던 집이 있다. 이 곳에서 논길을 따라 걷던 일행은 서원리로 향했을 것이다. 서원리는 원이 있었던 곳으로 현 서원1리를 '원골'이라 부른다. 이곳은 공무를 보러 여행 길에 나선 관리들이 묵어가던 곳이다. 지금도 서원리에는 예전 원이 있던 집터가 있고, 마을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집채만한 주추들이 있었다고 한다.
 
서원리 원골에서 하루를 묵은 단종일행은 북내면 석우리 선돌 앞을 지나 내룡리, 북내면 외룡리를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한다. 마을이름이 내룔이나 외룡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왕과 관련된 지명이고, 단종이 지나갔기 때문에 '용'이란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고목이 되어버린 서낭나무와 그 앞 들판인 점말 고래들. 그리고 원골로 넘어가는 길

고달사지부터 길을 시작해 논길을 걸어 숲으로 접어든다. 한 여름 뙤약볕에도 숲길은 시원하다. 발밑에서는 비가 온후 자라난 풀들이 밟히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런 마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나이 어린 폐왕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먼 길을 떠나 유배길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두렵고 또 두려웠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을까? 단 한 시간여를 걸어본 길도 힘이든대, 700리 길을 걸어 영월 청령포로 향한 어린 단종. 지금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 아픔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먼 세월이 가로막고 있다. 여름 무더위를 식히는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때도 이렇게 바람이 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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