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함성소리와 박수소리가 수원체육관 안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의 얼굴도 홍조를 띠고 있다. 1200만 경기도민과 115만 수원시민의 숙원인 ‘수원 KT 프로야구단 창단’ 이 하루 빨리 실현되기를 염원하는,  ‘수원 시민 서포터즈 창단대회’가 23일 오후2시 수원종합운동장 내 수원체육관에서 열렸다.

 

체육관 안에는 4,0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수원시민만이 아니라, 31개 경기도 각 시군에서 모여든 야구인들까지, 그들의 염원은 오직 하나였다. 내달 KBO에서 결정할, 프로야구 10구단의 유치를 수원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고함이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체육관 안은 서포터즈 창단을 위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환호로 시작한 서포터즈 입단식

 

이날 수원체육관 실내에는 경기도 각 시군에서 참가한 야구선수단과 시민 서포터즈, 수원시민 등 4천 여 명이 프로야구 10구단 수원유치에 힘을 보태기 위한, ‘수원 시민 서포터즈’ 창단에 참여해 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날 행사는 1부에서 경기도 초. 중. 고. 대학. 사회인 야구 선수단의 ‘수원 시민 서포터즈’ 입단식에 이어 결의문 낭독 등 프로야구 10구단 수원유치 궐기대회로 시작이 되었다.  

 

2부에서는 걸그릅인 스피카가 무대에 올라 후끈한 무대를 마련하였다. 스피카는 양지원, 김보아, 박주현, 박나래, 김보형 등 5명이 모인 걸그룹이다. 스피카는 ‘러시안 룰렛’으로 정식 데뷔 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참여를 한 4천 여 명의 시민들은 걸그룹 스피카가 노래를 할 때마다, 함께 박수를 치며 체육관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기도.

 

 

스피커의 공연에 이어 치어리더들의 특별출연 등으로 이어진 행사 전에는 임창렬 전 경기지사의 축사와 염태영 수원시장의 환영사, 그리고 지역 국회의원과 수원시의회 노영관 의장 등의 축사로 이어졌다. 2부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염태영 수원시장 등의 시구 레이스도 펼쳐져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웅변대회를 방불케 한 분위기

 

축사와 환영사를 하는 참석자들은 흡사 웅변대회를 연상케 할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10구단은 모든 여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수원으로 유치를 해야 한다면서, 교통의 중심지 그리고 KT와 같은 기업과 함께하는 수원이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환영사에 나선 염태영 수원시장은 “경기도는 인구가 1200만이나 되며 수원도 인구가 120만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지역을 연고로 한 프로야구단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프로스포츠는 단순히 운동이 아니라 산업이며 비즈니스이다. 얻어가는 지역안배보다는 노력을 하는 지역 발전이 먼저이다. 프로야구 10구단의 유치는 년 간 1,400억의 수익 을 낼 수 있는 효과가 있으며, 1,400명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이러한 10구단의 유치는 반드시 수원이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수원

 

현재 경기도는 70여개의 전국의 20%에 달하는 초·중·고 야구팀이 있고, 1,600여개의 사회인 야구팀에 속한 4만여 명의 야구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실질적인 ‘야구 메카’이다. 특히, 경기도의 수부 도시인 수원은 편리한 교통 여건과, 수원을 비롯해 성남, 용인, 화성, 안산, 안양, 평택, 안성, 의왕 등 인근 예비 관객 수요가 600만 명이상이 잠재되어 있다.

 

이러한 주변의 도시에서 한 시간 이내로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은, 프로야구단이 들어서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최적지로 평가가 되고 있다. 프로야구는 흥행이 목적이다. 수원은 경부선, 영동선, 서해안 고속도로와 제2경인, 서울외곽순환선 등 수도권을 통과하는 모든 고속도로들이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서울, 인천 등과 함께 지하철 시리즈 대비가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프로야구단 운영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수원에 10구단을 유치해야 한다는 서포터즈 창단식은, 2시간 여 동안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목이 얼얼하도록 함성을 질렀다는 한 시민은 “10구단 유치는 반드시 우리 수원으로 와야 합니다. 그동안 수원시민들의 열망이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민들의 95%가 찬성을 하고 있습니다. 경기도민 모두가 기대를 하고 있는데, 10구단이 딴 곳으로 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한다.

 

염태영 수원시장이 말춤을 춘 사연

 

2부 행사 도중 무대에서는 깜짝 쇼가 열렸다. 염태영 수원시장이 4개구 구청장들과 함께 무대 위에서 말춤을 춘 것이다. 이날 말춤은 12월 19일에 대선 투표율이 75%가 넘으면 시민들이 원하는 것을 이벤트로 하겠다고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많은 제시를 했는데 그 중에서 프리허그와 말춤을 산보이겠다고 약속을 한 것.

 

 

19일 오후 6시 수원시 최종 투표율은 76.08%에 달했다. 염태영 수원시장이 페이스북과 트위타에 올린 글대로, 꼼짝없이 말춤을 추고 프리허그를 해야만 했다. 원래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 등, 세 곳의 시장들이 약속을 했다. 투표율이 높을 경우 춤 경연대회를 열 수도 있었으나, 아쉽게도 서울과 성남시장은 투표율을 77%로 잡았기 때문에, 두 곳은 77%에 미치지 못해 합동 ‘말춤공연’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무산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염태영 수원시장은 약속대로 서포터즈 창단식 무대에서 말춤을 선보인 것이다.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인 서기586년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였다. 신라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고려에 패망한 뒤, 경순왕의 첫째 딸인 덕주공주가 이곳에 들어와,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불(보물406호)을 조성했다.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덕주공주가 일생을 마친 뒤로, 산 이름은 월악산으로 절 이름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주사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찾을 수 있다. 「덕주사는 월악산 밑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절을 창건했으므로 덕주사로 이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충주 산수조에 의하면「동으로 45리에 있어 청풍 경계를 이룬다. 상, 하덕주사가 있다.」 고 하여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라 하고, 이곳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지금의 덕주사를 예전에는 하덕주사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덕주사가 있는 곳을 ‘절골’이리 불렀다.

 

예전에는 하덕주사라 불렸던 현재의 덕주사를 절골이라 했고, 상덕주사인 마애불사지는 윗절이라 했다. 현 덕주사의 경내에는 남근석 3기가 서있다. 절 안에 이렇게 많은 남근석이 서 있는 곳은 매우 흐ㅟ귀한 현상이다. 그런데 왜 적주사에는 남아를 낳기를 기원한다는 남근석이 서 있는 것일까?

 

덕주사는 남아선호 신앙이 깃든 곳이다. 서쪽 언덕 산 밑에는 네 기의 부도와 장대석이 있다. 6.25 때 불탄 뒤로 1963년에 지암화상이 5칸인 법당을 중창하였으며, 1985년 성주화상이 현재의 법당을 다시 중창하였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고려시대에 조성 된 약사여래입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월악산은 명산 중 명산

 

산 정상을 ‘영봉’이라고 부르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밖에 없다. 그만큼 월악산은 명산으로 꼽힌다. 월악산을 수산리 쪽에서 바라보면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과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하기에 월악산은 여산신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소산에는 모두 산신이 있는데, 영험한 산인 지리산, 계룡산, 월악산 등이 여산신이다.

 

 

산의 명칭에 ‘악(岳)’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산은 ‘큰산’이요, 음기가 강한 산이라고 한다. 그러한 음기를 누르는 것이 바로 남근석이다. 덕주사 경내에 남근석이 많은 까닭은 바로 그런 음기를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한 음기가 강한 곳에 남근석을 세우고, 그곳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덕주사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이 음기를 누르는 남근석에 정성을 들여 득남을 기원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였을까? 덕주사 경내에 있는 남근석을 바라보면서 혹 이 남근석에는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이 남근석에 치성을 드려 많은 여인들이 아들을 낳아 강한 신라를 기대한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모셔온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충북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약사여래입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다. 대좌는 따로 만들었으며, 두발을 윗면에 조각하고 몸체를 얹었다. 옛 정금사 터라고 전하는 곳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명산 중 명산이라는 월악산에 자리하고 있는 덕주사. 그 경내에서 볼 수 있는 남근석들. 지금도 그 남근석에 비손을 하는 부인들이 상당수가 있다고 한다. 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덕주공주의 염원이 이루어지려는지. 속모를 새 한 마리 울며 날아간다.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를 들어가다가 그 입구에 보면 좌측에 작은 전각이 하나 서 있다. 얼핏 보기에도 꽤 오래됨직한 이 전각 안에는 돌미륵이 한 기 서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을 주민들의 말로는 천지가 개벽할 당시부터 있었다고 한다. 천지개벽이란 말에 조금은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금산사의 개산대제를 보기 위해 들어가는 길에 미륵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다년 간 듯, 여러 개의 촛불들이 커져있다. 그리고 지나는 행인 한 사람이 절을 하더니 돌미륵에 손을 대고 한참이나 기도를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상당히 효험을 보았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금산사 입구에 있는 할머니당과 안에 모셔진 돌미륵입상

‘예전에는 이곳이 바다였지’

마을에 사시는 분들에게 미륵당에 대해 물어보아도 잘 모르시겠다는 이야기다. 하기에 이곳이 상업지역이 되다보니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기 때문인가 보다. 올해 연세가 79세가 되셨다는 토착민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미륵당을 마을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르세요?”
“그냥 돌할머니라고 불러”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세요?”
“잘 모르지 내가 어릴 적에도 있었고, 그 이전 할아버지 때도 보았다고 하니 상당히 오래 묵은 것은 알지”
“그런데 왜 할머니라고 하세요?”
“그러니까 저 할머니가 뱃사공이라는 거야. 내가 보기엔 할아버지 같은데. 뱃사공이 바다에 나가서 죽었는데, 그 넋이 저 돌이라는 거지”
“할머니가 뱃사공 노릇을 했나요?”
“나도 그것이 이상해. 남자도 아닌 여자가 뱃사공을 했다는 것이. 그래도 어른들이 그렇게 불렀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그냥 흘러 온 이야기로 할머니이고, 예전에 뱃사공이었다는 것이다. 금산리 금산마을은 얼마 전까지도 땅을 파면 땅속에서 배가 썩은 나무 조각들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이 바다였기 때문이란다.

“돌미륵이 정말 영험합니다.”

한 칸으로 마련된 전각의 창호로 안에 켜놓은 촛불의 불빛이 흘러나온다. 문을 열고 보니 한 분이 열심히 절을 하고 난 후, 미륵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고 있다. 사진을 찍기도 죄스러워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다가 물어보았다.

“이곳에 자주 오시나요?”
“아닙니다. 저는 처음인데요. 소문을 들어보면 이 돌할머니가 상당히 영험하다고 해서요”
“무엇을 빌고 계시던데...”
“예, 아픈 사람이 있어서 얼른 낫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미숙한 솜씨를 보이고 있어,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가 1m 80cm 정도 되는 돌미륵의 머리는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목 부분에 새로 얻은 머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시멘으로 발라놓은 흔적이 있다. 오른 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렸다. 법의는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께서부터 주름이 잡혀있다. 그러나 왼손으로 옷을 잡아 올린 듯, 허리 아래쪽에서는 주름이 -자로 표현이 되었다.

아래는 바닥에 시멘으로 발라놓아 자세히 알 수가 없어, 발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전체적인 조각의 형태로 볼 때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생김새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빌고 갔으면, 그것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었을 텐데.

석불입상 앞에 켜 놓은 촛불.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있다.

많은 곳에 마을에서 섬기는 미륵이 있다. 미륵골, 미륵당, 부처울, 부처골 등의 지명이 있는 곳이 바로 돌미륵들이 서 있었던 곳이다. 후천세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상향이라는 돌미륵. 어쩌면 금산마을의 미륵 역시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표현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타고 있는 수많은 촛불들이 있어 마음 한편이 따스해 지는 것도, 나 역시 이상향을 기다리기 때문인가 보다.

삼년산성, 3년간이란 시간을 들여쌓았다는 석축 산성이다. 신라 자비 마립간 13년인 470년에 처음으로 축조를 하였으니, 성을 쌓은 지가 무려 1,540년이 지났다. 그 뒤 소지 마립간 8년에 아찬 실죽이 일선군의 장정 3천명을 동원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으므로, 삼년산성이라 불렀다고 했다.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 일대에 소재한 이 삼년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 삼년산성은 5세기 후반 신라의 석축 산성을 쌓는 기술을 연구하는데 있어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신라 초의 석축산성, 그 대단한 성 쌓기

이 삼년산성은 신라가 서북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소중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성의 총 길이는 1,680m 정도이고,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 등이 남아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토기조각과 유물이 발견이 되어, 이 성이 오래도록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삼국통일을 하기 위한 전쟁시에는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였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이 성을 공략하다가 크게 패전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삼년산성은 견고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성의 높이는 최고 22m에 달할 정도로 지형을 이용해 높게 쌓았다. 성벽위의 폭은 8~10m에 이르며, 동서남북 4개소에 문지와 건물터가 남아있다.





빗길에서 삼년산성을 걷다

비가 뿌린다. 그치려니 생각했던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를 않는다. 성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들어섰다. 사적 제23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삼년산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순간 그저 입을 벌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보아오던 그런 석축산성이 아니다. 마치 서구의 한 웅장한 고성을 방불케 하는 그런 성이다.




엇갈려 쌓기를 한 삼년산성과 서문의 문을 달아냈던 자리(아래사진 2장)

성이 터진 곳이 서문지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서문의 기둥과 문을 달아내었던 흔적이 있다. 그 오랜 세월 수많은 전화를 겪었을 삼년산성이다. 새롭게 복원을 한 성벽은 그저 놀라울 정도이다. 납작한 돌을 이용해 쌓은 성벽은 한 줄은 가로쌓기를 하였고 한 줄은 세로쌓기를 하여, 서로가 엇물려 튼튼하게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삼년산성은 남쪽과 북쪽은 성을 안과 밖을 모두 쌓아올려 철옹성을 만들어놓았다.

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걸어본다. 비는 계속 뿌려대지만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다, 수많은 산성을 보아왔지만, 삼년산성과 같은 성은 처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북치성을 비켜두고 보은사를 지난다. 성안에 쌓은 성벽의 높이가 이렇게 높다니. 당시 이 성을 무슨 목적으로 쌓은 것일까?




삼년산성을 보고 그 위용에 놀라다
 
북동치성 터를 지나 성벽을 따라 걷는다. 여기저기 허물어진 성벽으로 인해 위험하기도 하다. 조금만 건드려도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저만큼 성벽의 무너진 틈으로 돌출이 된 치성이 보인다. 남동치성 쪽으로 돌아가니 허물어진 성벽들이 산비탈에 덮고 있다. 무너진 곳의 성벽을 보니, 일반 성과는 달리 안에도 돌을 엇갈려 쌓기를 하였다.

잠시 멎었던 비가 다시 오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이미 천여m를 걸었는데, 뒤돌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사진을 찍느라 한 시간 남짓 걸어 다시 서문지 쪽으로 향한다. 복원이 된 이곳의 성벽을 바라보니, 그 장엄함이 눈에 보인다. 서문지 가까운 곳에 낸 치성은 둥근 원형에 가깝다. 치성 위로 오르니, 성벽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1시간 여를 조금 더 걸려 삼년산성을 돌아보았다. 비는 어느새 그치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비와 땀으로 젖은 옷이 차갑게 느껴진다. 서문지 안 암벽에는 암각화가 보인다. ‘아미지’라 쓴 이 글은 김생의 글씨라고 한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는 삼년산성. 그 장엄한 산성의 모습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열망을 읽어낸다.




복원을 한 서문지 부근 성벽. 그 높이도 높지만 성 쌓는 방식이 특이하다. 치 위에 오르면 성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성을 범접 할 수가 없다.

서문지 안쪽에는 암각서가 보인다. '아미지'라고 쓴 글씨는 김생의 필적이라 한다.


소중한 문화재 중에서 가장 그 가치가 뛰어나서 지정을 하는 국보, 이 국보와 국보가 만나면 그 아름다움이 과연 배가가 될까? 아마 이렇게 국보와 국보가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국보의 숫자도 적으려니와, 야외에서 한 자리에 두 점의 국보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구례 화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가,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는 3천여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화엄사 경내에 세워진 국보 각황전과 국보 석등

자장율사로 인해 신라 때 절로 알려져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신, 사사자 삼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각황전 뒤편에 세웠다. 원효대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를 거쳐 원효, 의상 등의 스님들이 화엄사에 중창을 하였으므로, 화엄사가 신라시대 절이라고 하는가보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국보 제67호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조선 숙종 28년인 1702년에, 이층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전각의 명칭을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국보 각황전, 밖에서 보면 2층의 전각이지만, 안으로는 퉁층으로 꾸며져 있다.

각황전 앞에 감히 서질 못하다.

각황전 앞에 서면 사람이 압도당한다.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의 기단석 위에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전각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각황전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되어있으며, 세분의 여래불과 네 분의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일까? 쉬지 않고 예를 올리는 여인에게.

밖에서 보면 이층인 전각으로 꾸며졌으나, 안을 보면 단층이다. 워낙 전각의 규모가 크다보니 중간에 기둥을 세워 받쳐놓았다. 그 안의 공포의 장식 등이 화려하다. 각황전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각황전 동편 출입구 앞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다. 누군가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예불을 올린다. 걷기도 더운 날에 저리 온 마음을 다한다면, 여래불과 보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듯하다.

최대의 석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였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이라고도 부른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를 하였다. 통일신라 때인 헌안왕 4년인 860년에서, 경문왕 13년인 873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팔각의 지대석 위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배가 불룩한 장고 모양의 기둥을 세웠다. 이런 배가 부른 기둥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형태이다.



국보 석등은 아름답다. 기단석과 중간의 장고형 기둥

배가 부른 기둥 위로는 돋을새김을 한 연꽃무늬를 조각한, 위 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팔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큼직한 창을 뚫어 놓았다. 팔각의 지붕돌은 귀꽃이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며,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석등과 국보 각황전. 이 두 점의 국보가 만들어내는 정경은 말로 형용하기가 힘들다. 어디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려나. 해가 짧아진 오후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쉽게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모습에 취했음이다. 저녁나절 국보와 국보가 만나며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쉽게 만나지 못할 멋진 모습이다.


화사석에는 네 곳의 창을 내고, 머리 위에는 귀꽃이 아름다운 머릿돌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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