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기 좋은 곳 수원. 휴먼시티 수원은 우리나라에서 문화지수가 가장 높은 도시이다. 수원은 어딜 가나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쌈지공원 등 곳곳에 작은 공원이 있는가하면, 수원도심을 흐르는 수원천을 비롯하여 황구지천, 원천리천, 서호천 등 4대 하천이 흐르고 있다. 수원의 주산인 광교산을 비롯하여 도심 한 복판에 솟은 팔달산, 숙지산과 여기산 등도 있다.

 

걷기 좋은 광교저수지 수변 길과 세 곳의 저수지인 광교호수공원 산책로 등 수원은 물과 연관된 아름다운 길들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더욱 화성을 끼고 한 바퀴 돌아보는 길은 만나는 곳마다 풍광이 달라 옛 시간 속으로 들어온 듯하다. 곳곳에 자리한 쌈지공원도 수원을 찾아온 사람들이 피곤한 다리를 쉴 수 있는 곳이다.

 

 

수원박물관 안에 마련한 다양한 쉼터

 

수원시 영통구 창룡대로 265에 소재한 수원박물관에는 특별기획전 등이 열리고 있다. 현재는 시인 50명과 화가와 서예가 등이 함께하는 , , 50인전이 특별기획전시실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수원박물관이 여름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한다. 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도 있지만,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수원박물관 주차장을 지나 전시실로 향하는 양편에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대나무의 특성상 이렇게 도심 한 가운데서 자라기가 쉽지가 않다고 하지만, 양편에 심어 놓은 대나무들이 실하게 잘 자라 바람에 바스락이는 소리를 내면 절로 더위가 가시고는 한다.

 

거기다가 작은 연못이며 분수, 그리고 쉼터며 정자들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정자는 동락당이라고 하며 아무리 날이 더워도 이곳에 앉아 있으면 금방 땀이 식는다. 곁에 있는 북카페인 여민동락 앞에도 쉼터가 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는 독특한 조형으로 된 화분과 함께 차 한 잔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대나무 숲을 건너면 사무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이 곳 측면으로 물이 고인 연못이 있고 시원하게 물소리를 내며 솟는 작은 분수와 양편으로 조형된 두꺼비 석조물의 입에서 흐르고 있는 물줄기가 더위를 가시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충뷴한 공간

 

요즈음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며칠 전 소나기와 함께 내린 우박으로 인해 포털 사이트 검색어에 수원우박이 상위에 올라있기도 했다. 이렇게 계절을 잊은 듯한 날씨로 인해 올 여름은 유난히 더울 것이라고 한다. 이제 6월 중순인데도 날씨는 예전 복중의 기온이니 올 더위는 감당이 안될 듯하다.

 

11일 오후 수원박물관을 찾았다. 간간히 전시회를 둘러보고 나온 사람들이 건물 1층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하긴 한 낮 불볕더위에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감당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올 해는 더위에 지칠 때 이곳으로 피서를 와야겠어요. 박물관이 지대가 높아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하지만, 대나무 숲이며 물소리까지 들려 이만한 피서지도 없을 것 같아요. 더구나 전시도 돌아보고 쉴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네요.”

전시회를 돌아보기 위해 왔다는 한 시민의 말처럼 피서를 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곳도 그리 흔치 않을 것 같다. 수원박물관의 한 관계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은근히 자랑을 한다.

 

인근에 경기대학교가 있어서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오후가 되면 이곳으로 올라옵니다. 학생들이 이곳에 와서 도시락도 먹기도 하고 앉아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죠. 꽤 많은 학생들이 이곳을 이용을 합니다. 저녁이 되면 곁에 있는 경기외국어고 학생들도 이곳에 찾아와 쉬고는 하죠. 올 여름 피서는 먼 곳으로 고생하고 갈 것 없이 우리 수원박물관으로 찾아오세요. 아이들에게 교육도 되고 어른들은 기획전을 돌아보고, 이보다 좋은 피서지가 어디 있겠어요.”

 

지난 45일 오전 11, 22만 명의 팔달구민들의 숙원사업이던 신청사가 완공을 하고 낙성연을 가졌다. 그동안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세를 들러 살던 팔달구가, 새롭게 청사를 마련하고 낙성연을 베푸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낙성연이란 조선시대 국가가 새로운 궁궐의 건축이나 새로운 관아가 생길 경우 마련한 잔치를 말한다. 정조대왕은 17941월부터 17969월까지 화성을 축조했다. 화성의 축성 공사를 마친 한 달 뒤인 17961016, 화성 행궁 낙남헌에서 백성들과 함께 성대한 낙성연을 베풀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환경적인 청사

 

낙성연을 가진 팔달구 신청사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연면적 12628.11로 단순한 관공서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주변에는 충분한 녹지공간을 확보하고 전시공간과 북카페, 소통의 공간과 저탄소 녹색환경의 수도 수원에 걸 맞는 태양광 발전, 옥상녹화, 자연환기시스템 등을 갖추고 있다.

 

신청사 1층에는 종합민원과, 세무과, 기업은행, 당직실, 어린이집이 자리를 잡고 있고, 2층에는 구청장실을 비롯해 행정지원과, 안전주민자치과, 건설과, 건축과, 정보화교육장 및 의원실이 자리하고 있다. 3층에는 대회의실을 비롯해 사회복지과 경제교통과 환경위생과 교통상황실과 휴게실, 매점, 식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아이들이 천국이 된 팔달구청

 

이제 팔달구청이 개청을 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다. 그런 팔달구청이 아이들의 명소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11일 오후 찾아간 팔달구청. 화성박물관과 팔달구청 청사 앞에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모여 있다.

 

저희들은 화성탐방을 왔어요. 행궁을 돌아보고 이곳으로 왔는데 아이들이 쉴 공간이 충분해서 이곳으로 들어와 준비해 온 점심을 먹고 있는 중예요. 주변에 꽃도 아름답게 피어있고, 연못이며 정자 등이 있어 아이들이 사진을 찍느라 난리예요. 구청 청사가 이렇게 좋은 곳이 있다는 것이 정말 부럽네요.”

 

안성에서 아이들을 인솔해 왔다는 선생님의 말이다. 말마따나 청사 주변을 돌아보니 거의 200여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다. 팔달구청 청사 앞에는 잘 꾸며진 꽃밭이 있다. 그리고 정자도 있어 쉼터가 되고 있다. 과거 화장실 앞으로 흐르던 냇물을 청사 옆으로 돌려 연못으로 꾸며 놓았다. 그 연못도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공간이다.

 

 

여기저기 아이들이 놀만한 최적의 장소

 

청사 한편으로는 운동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그곳 역시 아이들이 점령을 했다. 대여섯 명의 꼬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비켜주지를 않는다. 청사 우측에는 어린이 집이 자리한다. 그 앞 놀이터에도 역시 어린이들이 모여 있다. 주변에 사는 아이들인 듯하다. 팔달구청 청사 주위이 온통 아이들뿐이다.

 

우리 팔달구청이 좋긴 좋은 모양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찾아오는 청사가 어디 있겠어요. 더구나 화성박물관이 곁에 있고 가까운 곳에 행궁이 자리하고 있으니, 자연 넓은 쉴 공간이 있는 이곳으로 아이들이 모여드는 것이죠. 모처럼 휴일이라 운동을 하러 왔는데 아이들에게 양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수동에 살고 계시다는 어르신은 자리를 빼앗겼지만 기분이 좋다고 하시면서 웃으신다. 새롭게 아이들의 천국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팔달구청. 수원의 또 하나의 명소가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충남 청양군 화성면 산당로 393-42(화암리 222)에 소재한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31호인 ‘청양 임동일가옥’. 19세기 말 송암 임용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연못 조성 시 소나무를 심었는데, 소나무가 옆으로 누운 듯 자라서 ‘와송정(臥松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7월 14일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와송정.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로 조성이 되어, 전체적으로는 ㄷ”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며,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다. 이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우진각 지붕으로 된 문간채가 끼워져 있다. 임동일 가옥은 안채와 문간채를 제외한 사랑채만을 답사하였다.

 

 

큰 정자 형태로 구성한 사랑채

 

임동일 가옥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바로 코앞이 보이지 않도록 쏟아지는 장대비로 인해, 좁은 시골 길을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가다가 다시 마을 안으로 한참을 가서야 만나게 된 임동일 가옥의 사랑채인 와송정.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동일 가옥의 고택 입구 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랑채는, 정면 7칸 중 우측 2칸에 고택 앞을 조망할 수 있도록 높게 누마루를 올려놓았다. 사방이 훤히 트인 누마루는 그야말로 정자의 운치를 마음껏 느낄 수 있도록 조성했다. 누마루 위에 앉아있으면, 앞으로 펼쳐진 연못과 숲, 그리고 주변 경치까지 구경을 할 수 있다.

 

 

누마루 옆으로는 2칸의 사랑방을 들였고, 사랑방 옆에는 다시 1칸의 마루방을 들였는데, 이들 앞에는 반 칸씩의 툇마루가 달려있다. 사랑채 좌측면에 있는 하인들이 거처하던 방 좌단은 중도리와 종량사이에 45도 방향으로 ‘강다리’라고 부르는 독특한 부재를 걸쳐 결구하여 추녀를 받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는 규모가 크고 전통 목조건축 양식상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주변으로는 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도록 조성해

 

사랑채인 와송정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의 물은 산에서 흐르는 물을 수로를 통해 연못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를 ‘와송정’이라고 부른 것은 이 사랑채가 정자의 기능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와송정 마르에 앉아 앞을 내다본다. 구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를 덩이식물이 타고 오른다.

 

 

지금은 앞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지만, 예전 이 사랑채를 지을 때만 해도 앞에 산 경치가 일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집을 지은 역사는 길지 않으나 어느 곳 한 곳도 흐트러짐이 없어 보인다. 이 집을 지은 주인의 섬세함이 그대로 배어있는 정자식 사랑채이다.

 

주인의 심성을 알 수 있는 사랑채

 

누마루에 올라본다. 그야말로 시야가 트여져 정자에 앉은 느낌 그대로이다. 이 사랑채를 지은 송암 임용주는 아랫사람들까지도 생각한 마음 씀씀이가 보인다. 바로 하인들이 사용하는 방 밖에 있는 반 칸의 툇마루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툇마루는 일자형의 마루바닥을 깔지만, 와송정의 하인 방 앞에 놓은 툇마루도 누마루로 깔았다.

 

 

장대비를 뚫고 찾아간 임동일 가옥의 사랑체인 와송정. 기둥을 세운 초석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사랑방에서 올림 누마루를 내다볼 수 있도록 작은 문을 하나 내어놓았다. 아마 이 작은 문으로 바람이라도 받아들인 것일까? 닫혀져 있는 방문을 열 수가 없어 아쉬움이 컸지만, 그래도 모처럼 찾아본 고택 답사였기에, 장대비도 막을 수가 없었나 보다. 와송정을 뒤로하고 돌아서려는데, 또 다시 장대비가 쏟아진다.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동문을 지나 조금 위편 좌측으로 정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 정자를 ‘지수당’이라고 하며,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지수당은 삼면이 연못으로 되어 있어, ㄷ 자형의 연못이 정자를 둘러쌓고 있는 형태이다.

 

이 지수당이 서 있는 연못 위쪽에는 또 하나의 연못이 있다. 중앙에 인공섬을 만들어 놓은 이 연못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또 하나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있다. 이 지수당은 조선조 현종 13년인 1672년, 부윤 이세화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

 

남한산성은 지형이 서쪽이 높다. 그래서 성안의 모든 물은 동문인 좌익문 옆에 있는 수문으로 흘러 동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광주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동쪽에 아름다운 계곡이 형성이 되어 있는 것도, 이렇게 동쪽으로 물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지수당의 위편에 있는 연못에서 지수당 앞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도, 지수당이 서 있는 ㄷ 자형태의 연못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수당의 연못은 땅을 깊이 파고 축대를 쌓아 조성을 하였다.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한편에 정자를 지은 특이한 형태이다. 한 겨울에 찾는 정자의 모습은 어떠할까? 눈이 온 다음 날 찾아간 지수당 주변에는 눈이 쌓여있다. 연못의 물은 얼어붙었고, 정자 안 누마루에도 한편에 눈이 쌓여 있다.

 

 

지수당 동편입구 쪽에는 커다란 비가 서 있다. 부윤 이세화의 송덕비라고 한다. 정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남한산성이고, 정자가 평지에 자리하다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정자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정자 주변으로만 돌아보아도 지수당을 느끼기에는 어렵지가 않다.

 

눈 쌓인 지수당, 또 다른 멋이

 

지수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이 되었던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해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지수당은 그렇게 화려한 정자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남한산성 내에 상권이 형성되지 않고, 주변에 세 개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면 그 모습은 사뭇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자는 연못의 한 면을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그 위에 낮은 기단을 놓고 정자를 세웠다. 정자 주변에는 낮은 난간을 두르고, 동, 남, 북쪽으로는 댓돌을 놓고 입구를 내었다. 주초석은 네모난 돌을 사용했으며,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집으로 마련을 한 지수당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가 있다.

 

멀리 떨어져 지수당을 바라본다. 아마도 주변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 당시 지수당을 바라다보았다면, 그 누구라서 글 한 수 적지 않았을까? 그저 평범한 정자이긴 하지만, 당시를 돌이켜보면 꽤나 운치 있는 정자였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더구나 군영이 있는 산성 안에 이런 정자가 있었다면, 그 정자가 군사들에게 주는 감흥은 색다른 것이었지 않았을까?

 

 

부윤 이세화는 멋을 아시는 분이었을 것이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남한산성의 치욕이 채 가시기도 전인, 30여년이 지난 후에 이런 정자를 지었다는 것도 의미가 깊다. 아마도 이런 지수당을 건립을 한 것도, 그런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눈길을 걸어본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밟히는 눈의 감촉이 좋다. 정자는 사시사철 색다른 맛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한 겨울에도 정자를 찾아 나서기도 하지만.

남성들만의 공간인 사랑채와 외별당

99칸 양반집은 독립된 전각만 해도 9동이나 된다. 그 독립된 건물들이 대지의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나름대로의 특성에 맞게 건물이 지어졌다. 현재는 한국민속촌 안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이 많은 건물들이 수원 팔달산을 배경으로 남아있었다고 하면 장관이었을 것이다.

2월 18일 답사를 한 한국민속촌. 사진을 촬영하면서 양반집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만도, 아마 족히 한 시간은 더 걸린 듯하다. 솟을대문을 들어가 우측으로 바라보면 바깥사랑채와 줄행랑이 이어진 곳이 있다. 그곳에 문이 있으며, 그 문을 나서면 사랑채가 있고, 담장을 사이로 외별당이 있다.

사랑채

바깥사랑채 뒤편

교육과 생활을 위한 사회적 공간


사랑채는 ㄱ 자형이다. 9칸 정도의 큰 공간을 마현한 사랑채는 집안의 가장이 사용하는 곳이다. 이곳은 바깥사랑이 손님들이 묵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면, 사랑채는 집 주인이 기거를 하면서 자녀들의 교육을 시키는 곳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이곳은 남자의 사회적 공간이다.

99칸 집의 사랑채는 큰 대청을 사이에 두고 사랑방인 큰 방과 건넌방이 있다. 큰 방 아래는 복도를 통해 마루방으로 된 서고가 있으며, 옆에는 상노가 거처하는 작은 온돌방이 한 칸 마련되어 있다.

너른 대청과 마루방을 둔 사랑채

건넌방 끝에도 마루방을 두고 있다

일각문을 통해 대문을 거치지 않고도 출입이 가능했던 사랑채

이 사랑채의 특징은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은 맞배지붕이다. 큰 방인 사랑방은 주인이 사용하지만, 건넌방은 자녀들 중 남자아이들이 이곳에 묵으면서 학습을 하던 곳이다. 건너방 옆으로는 넓은 마루방이 또 마련되어 있다. 일반적인 반가의 사랑채보다 그 규모가 더 크기 때문에, 6,25 한국전쟁 뒤에는 이 사랑채를 검찰청으로 사용을 하기도 했다.

풍류를 즐기던 외별당

아마 이 99칸의 남창동 양반집에서 가장 멋스러운 건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외별당이 될 것이다. 외별당은 남자들의 공간이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통해 담장 너머로 있는 외별당은 안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풍류를 즐기던 곳 외별당

외별당 앞에는 무정과 연못 등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세운 외별당은 양반집 안에서 가장 멋지게 구성이 되었다 

외별당은 ㄱ 자형의 마루 중심의 건물이며, 온돌방과 대청, 누마루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외별당은 한편에 작은 방 4개를 꾸며놓고, 대청과 누마루를 드렸다. 이 집에 이렇게 작은 방이 많거나 대청을 넓게 둔 것은, 특별한 손님을 맞이하거나 모임, 풍류 등을 즐기던 곳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외별당은 주인의 사회활동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날렵하게 처마가 솟아오른 팔작지붕도 아름답지만, 외별당 앞에는 누정과 연못을 두어 온치를 더했다. 누마루는 장초석을 밑에 놓고 올려 지었으며, 남은 면은 기단을 높이 쌓아올려 외별당을 지었다. 외별당은 또 다른 특별함이 있다. 바로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돌계단을 놓아 어느 곳에서나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풍류를 즐기다가 쉽게 건물의 밖으로 이동을 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팔작지붕의 날렵한 처마 끝이 아름답다

풍류를 즐기던 외별당은 사방에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별한 남성들만의 공간인 외별당. 독립적인 공간으로 가장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곳이다. 수원 남창동 팔달산 밑에서는 한 때 이 외별당에서 흘러나오는 풍류소리가, 팔달산을 울리지나 않았을까? 괜스레 외별당 주위를 맴돌면서 별별 생각을 다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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