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길을 나서면, 12일 혹은 23일로 길을 떠납니다. 길을 나설 때는 휴대폰의 배터리를 충분히 충전해 갖고 나가지만, 그래도 돌아오기 전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기에 여행을 나서면 휴대폰을 잘 사용하지 않는 편입니다. 괜히 배터리라도 떨어져 연락이 끊기면, 주변 사람들에게 괜한 걱정을 주기 때문이죠.

 

하지만 어제부터 오늘까지 강원도의 여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배터리 충전기를 갖고 갔기에, 수시로 충전이 가능했기 때문이죠. 저는 페이스 북 친구가 오늘까지 3,800명입니다. 인원이야 꽤 되지만 사실 그렇게 소통을 하는 분들은 많지가 않은 편입니다. 주로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페이스 북으로 날리고는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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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페이스 북의 화면입니다.

 

하루 종일 무엇을 해? 여행하면서

 

오늘은 고성에서 속초로 나와 다시 수원으로 오겠다고 생각을 하고. 고성서부터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속초에 도착해 표를 끊고 달려가 보니, 이런 세상에나. 수원버스가 막 떠나버린 것입니다. 다음 차는 거의 두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할 수없이 홍천 가는 버스표를 구해, 홍천에서 갈아탈 생각이었죠.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입니까? 차가 가는 방향이 영 이상하다 싶더니, 이 차가 한계령을 넘는다는 겁니다. 오후 두 시까지는 수원에 도착해서, 지동교에서 하는 행사 취재를 하려고 서둘렀는데 말입니다. 이 차 홍천에 도착하는 것이 오후 210분이랍니다. 다 틀렸습니다. 저희는 포기도 참 빠르게 하는 편입니다. 어차피 안 될 것이라면, 경치라도 즐겨야죠.

 

어제(19일) 밤에 횟집서 올린 내용이죠 

 

그래서 페이스 북을 이용해 내가 하는 여행을 중계하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어 페이스 북에 올리는 것이죠. 그런 재미 못 느껴보셨죠? 재미 좋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바로 소통이란 생각입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정말 큰 공부를 하나 한 것입니다. 페이스 북을 이용해 소통을 하는 방법이죠.

 

페이스 북의 소통은 함께 여행하는 것

 

오늘 제가 페이스 북 친구들에게 보여준 여행일지는, 앞으로 제가 여행을 할 때마다 다시 해보려고 합니다. 여행뿐이 아니라 내가 하루 종일 하는 것들을 공유하는 것이죠. 이렇게 페이스 북을 이용해서 소통을 하다가 보면, 재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계령을 넘으면서 보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네요.

 

이미 꽃이 지천으로 피었는데 말입니다. 그런 사진도 올리고, 가끔 지루하다 싶으면 어제(19)에 속초 횟집 수족관에서 만난 거대한 문어머리도 올렸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것들을 찍어서 소개를 하다 보니, 몇 시간의 버스 여행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더라는 것이죠.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재미있는 여행을 할 듯합니다.

 

한계령을 넘다가 올린 것이죠. 어제 횟집서 찍은 문어머리랍니다

 

간간히 올리는 정보도 유용 해

 

사실 SNS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트위터와 페이스 북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바로 사진을 찍어 올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 페이스 북의 좋은 점과 신속한 정보 전달의 묘미를 마음껏 누리면서 즐거운 여행을 한 셈입니다. 그저 한두 장 관련 사진이야 올렸지만. 이렇게 연결을 해서 중계를 하다가 보니, 그 재미 또한 만만찮다는 것이죠.

 

홍천을 출발해 고속도로에 올라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오는데, 여주분깃점서부터 강릉으로 가는 차들이 엄청 밀립니다. 이천 분깃점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것도 사진을 찍어 올리면, 그 방향으로 가는 분들에게는 참고가 될 테니까요. 모르고 닥치는 것보다, 알고 대비를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죠.

 

설악산 장수대 맞은편의 산봉우리입니다. 

 

이렇게 제가 사진을 올리고 그 소식을 전하면, 아마 몇몇 분은 저와 함께 여행을 한 셈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제가 가는 길목의 모든 사정을 하나하나 다 함께 알아가는 것이니까요. 페이스 북의 또 다른 재미,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페친 한 사람, 열 여행사 안 부럽다.”고요.

베트남 관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땀꾹이다. 땀꾹은 낮은 천연동굴과, 가고 오는 길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인 바위산이 서 있어 경치가 좋다. 다만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일은 자칫 함석으로 만들어진 배의 노를 저어야 할지도 모르니,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이 좋다.

 

땀꾹을 관람하는 배들은 작은 소형이다. 노를 저어 땀꾹으로 가는데, 적게는 2명 정도 많게는 4명 정도가 탄다. 순전히 노를 저어가야 하지만, 워낙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배를 타고 감으로 심심하지는 않다.

 

 

아치형 동굴을 지나는 재미

 

땀꾹의 상류로 가다가 보면 아치형 동굴을 몇 개 지나게 된다. 동굴 폭은 10 ~ 20m 정도이고 천정은 손을 들면 닿을 듯하다. 그 곳을 빠져나오면 다시 출발을 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인 베트남은 자연환경과 옛 모습 그대로 가직한 생활풍습,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관광자원이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가 탄 배를 젓는 아가씨는 힘이 든 것처럼 보인다. 교대로 노를 젓는다. 땀꾹으로 오가는 배위에서는 누구나 한번쯤은 노를 저어야 한다.

 

 

승려가 되기 전에는 머리를 다 못 깎아

 

돌아오는 길에 들린 사찰. 이곳에 들리니 어린 아이들이 있다. 그런데 머리가 일부분만 남아있다. 이유를 물으니 정식으로 승려가 되기까지는 머리를 이렇게 한쪽만 기른다는 것이다. 예불에 참석하는 아이들은 장난을 치기도 한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니 뛰어놀고도 싶을 것이다. 베트남을 여행하게 되면 꼭 한번 땀꾹으로 가는 작은 배에 올라 땀을 흘리며 노를 저어보기를 권한다.

 

세상은 나라마다 풍속이 다르고, 풍광이 달라 재미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유가 조금만 생기면 우리나라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가 보다. 요즈음은 며칠간 줄 연휴가 되면 공항은 그야말로 만원을 이룬다. 해외로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 때문이다. 물론 견문을 넓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난 그것과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우리나라에도 아직 기보지 못한 숱하게 많은 아름다운 곳들. 그리고 아직 돌아보려면 멀기만 한 문화재들. 내 머릿속에는 우선 그런 것들이 먼저이다. 언제나 다 돌아보게 될지 모르겠다. 아마 남은 생을 다 돌아본다고 해도, 극히 일부분일 수도 있지만.

 

지난 자료를 정리하다가 보니 땀꾹 사진과 영상이 들어있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은 야심한 밤에 재미를 주기도 한다. 혹 가보지 못한 이웃 분들을 위해 소개를 한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난 ‘세월’이라는 말보다. ‘시간’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어째 세월이라고 표현을 하면, 앞으로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그에 비해 ‘시간’이라는 단어는. 앞으로도 수많은 시간들을, 내가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다.

 

벌써 추석 연휴라고 한다. 다음 뷰에 글을 보니 추석에 대한 음식이며, 글들이 부지기수로 눈에 띤다. 추석 때도 그렇고 설 때도 그렇다. 솔직히 난 이런 글들이 보이면 썩 기분이 좋지가 않다. 늘 혼자이고, 늘 방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절집을 찾아가 우울한 기분을 달래든지, 아니면 행사를 하는 곳을 돌아친다.

 

 

 

집 나오면 개고생, 정말 그랬소

 

‘명절’, 참 좋은 말이다. 오죽하면 명절이라고 했을 것인가?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나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고 난 뒤,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내가 ‘이다’리고 하지 않고 ‘일 것이다’라고 쓴 것은, 벌써 이런 모습을 잊고 산지가 20년 가까이 되었기 때문이다.

 

살다가 보니 어쨌든 가족들과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20년 세월을 길 위에서 보냈다. 명절 때만 되면 그저 산행을 하던지, 아니면 문화재 답사를 한답시고 며칠 씩 길을 떠나고는 했다. 아마도 그런 날이 길어지다 보니, 이젠 그런 명절이라는 말에 무덤덤해 진 듯도 하다.

 

몇 해 전인가보다. 그 때도 계절이 지금쯤 되었다. 명절 전날 길을 나섰다. 그냥 방안에 쭈그리고 있는 것이 싫어서이다. 호기있게 길을 나선 것 까지는 좋았다. 잘 곳이야 돈만 주면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배가 고파 무엇을 좀 먹으려고 나갔지만, 문을 연 곳이 한 곳도 없다는 것이다.

 

하긴 명절 아침에 누가 장사를 하겠다고 문을 열 것인가? 아마 오후 6시까지인가 물로 배를 채우면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을 한다는데, 그 말이 정말 명언이다. 문제는 이렇게 명절 때마다 배를 곯은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 개고생을 벌써 20년 가까이 했지만, 아직도 개고생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니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을까 싶다.

 

 

그래도 살만하잖소?

 

엊그제인가, 지인들과 만나서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저녁이 되면 수원 지동 순대타운 안은 온통 인파로 넘치는 곳이다. 자리 하나 차지하기도 버거울 때가 있다. 더구나 명절 밑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인해 통로를 다니기도 힘들 지경이다. 밖에서 술을 마시다가 옆을 보니 무엇인가 꿈틀거린다. 비닐 안에 무엇이 들어있어서 처음에는 누가 무엇을 갖다 버린 줄로만 알았다.

 

한데 자세히 보니 비닐을 푹 뒤집어쓰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것이다. 노숙자가 추위를 피해 그렇게 비닐봉지 한 장을 머리서부터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 세상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다. 남들은 명절이라고 모두 들떠서 난리인데, 저렇게 오갈 데 없이 비닐 한 장으로 쌀쌀한 밤 날씨를 견뎌내고 있다니.

 

하긴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제가 게을러서 그렇다고. 하지만 이 분 초저녁에 그곳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미 등이 굽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연세가 70을 넘을 듯하다. 그런 어르신이 어디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편에서 들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도대체 어떤 마음이 들까?

 

비도 오는데 오늘 저녁엔 이 어르신 어디로 갈 것인지? 나가서 막걸리라도 한 잔 대접을 해야 할 듯하다. 사람 사는 것이 별거 아니잖은가? 즐거운 명절에 기분 언짢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이제 우리 주변에 쓸쓸하게 명절을 보내야 하는 이웃도 있다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 앞으로 3일간 글 발행하지 않습니다.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에서 벌어지는 올림픽이 심판들의 오심, 거기다가 일부 나라를 편드는 개 걸레같은 짓거리. 올림픽의 정신마저 잃어버린 이런 올림픽을 보면서 열 받았습니다. 물론 제가 이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당연하죠. 일부 가진넘들 빼고는 다 힘없는 백성에,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나라 아닙니까? 거기다가 우리는 허벌한 외교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 대신 열심히 하고도 아픔을 당한 선수들에게, 머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혼자 3일간 길을 걷겠습니다. 

 

 

 

하필이면 찌는 더위에 일이 많아졌다. 살다가 보면 어디 좋은 계절에만 일이 생기라는 법이 있을까? 그저 가만히 있어도 찜통인 이 복중에, 왜 그리 장거리 여행할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인지. 아마도 타고난 일복 때문인가 보다. 일복이 터진 것이야 그런 데로 괜찮다. 무료하게 세월을 사는 것 보다는 한결 바람직한 일이니까?

 

요즈음 영동고속도로는 몸살을 앓고 있다. 고속도로는 꽉꽉 막히고, 차들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움직인다. 그나마 조금씩이라고 움직이니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이 더위에 갑갑한 차 안에서 불쾌감까지 돋우는 일들은 정말 참기가 힘들다.

  

버스는 대중교통인데, 예의는 지켜야지.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면 여러 가지로 좋은 점이 많다. 우선은 경비절감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승용차를 한 대 타고 여행을 하면 기름 값이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버스야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좋다. 또한 버스를 타면 책을 보거나 신문을 보거나 아니면 아이폰으로 인터넷 접속을 하여 이것저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가 있다.

 

매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나로서는 에어컨이 시원한 버스 안에서 곧잘 잠을 청하고는 한다. 보통 2~4시간 정도의 장거리 여행을 하기 때문에, 30분 ~ 1시간 정도 잠을 잘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시간을 방해를 받을 때는 정말 불쾌하다. 물론 대중교통이라는 것이 나 혼자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교통에도 지켜야 할 예의는 있지 않을까?

 

가장 짜증을 유발하는 사람들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차를 타자마자 전화를 걸기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모른다. 그렇게 오랜 시간 전화를 해대면서 목소리는 왜 그리 크게 내는지. 아마도 자신이 인맥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여기저기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어댄다.

 

기사 양반 내 생명 맡기지 못하겠소.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는 20여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 다행히 갈 때와는 달리 전화를 거는 사람들도 없고, 시끄럽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없다. 가끔 아이 하나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빼고는, 모처럼 여유로운 여행길이란 생각이다.

 

일부러 버스를 탈 때는 표를 구입할 때 맨 앞자리를 달라고 한다.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길이 막히거나 가다가 사진을 꼭 찍을 일이 생기면, 바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자꾸 들린다. 마치 연인과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쉬지 않고 들리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한다.

 

그 소리의 범인은 바로 버스 운전기사였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한 손으로는 소형 마이크가 부착 된 줄을 잡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버스 기사 분들 중에는 ‘교통정보원’이 있다. 가다가 길이 막히거나 하면 ‘교통방송’에 곧 그 사실을 알리고는 한다. 그런 경우에는 운전석 위에 교통정보원임을 알리는 아이디카드를 부착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알 수가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교통정보를 알리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대화 내용을 보니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핸들은 한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는 소형 마이크를 잡고 연신 통화를 한다. 2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아마도 한 시간 이상은 통화를 하는 것 같다.

 

물론 사고 없이 종착지에 도착을 하기는 했지만, 오는 내내 불안하다. 저렇게 한 손으로 운전을 하다가 자칫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운 여름 날 그런 모습을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 20여명이나 되는 승객들의 안전은 무시한 체, 줄기차게 전화를 해대는 모습에서. 

나혜석, 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이름이다. 도대체 나혜석이란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 실체를 안다는 것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지 못한 사람은 힘든 일이다. 혹여 글 하나로 인해 지난 역사속의 인물에 대해 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2월 26일,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고 한다. 영하 10도를 조금 밑돈다고 하지만, 체감온도는 그보다 더 추은 듯하다. 수원박물관에서 12월 23일(금)부터 2012년 2월 26일(일) 까지 열린다는 ‘2011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인 ‘나는 나혜석이다’를 보기 위해서이다. 개막식을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지만,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조용히 나혜석을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수원박물관 특별기획 전시 '나는 나혜석이다'의 입구


수원출신의 여성해방론자 나혜석

나혜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이다. 혹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화가요 문학가이며, 민족운동가에 여성해방론자’ 라는 긴 수식어로 표현을 한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혹자는 나혜석을 ‘현대를 살아가는 개방적인 여성이라는 것에는 찬성을 하지만,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난해함’을 지닌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이번 특별전은 혼탁한 시대를 살아갔던 신여성인 나혜석이라는 인물이, 자신을 1인칭의 시점으로 되돌아보는 자리로 마련을 하였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제목이 말해주 듯,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나혜석에 대한 사고를 바꾸어 놓기 위한 자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원에서 태어났다'의 나혜석의 학창시절, 학교에서 사용했던 양금과 아코디언, 그리고 가계도


‘여자도 사람이다’

나혜석이 추구한 것은 시집살이라는 올무에 갇혀 음지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닌, 세상 밖으로 나와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살아가는 그런 여성을 추구했다. 인간으로, 그것도 당당한 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것이다.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세계여행을 1927~8년에 했다는 것은, 나혜석이 얼마나 신문물에 목말라 했는지 가늠이 간다.

결국 그러한 세계여행이나 그녀가 쓴 글들에서 치열하게 남들보다 앞장서서 세상을 살았던 나혜석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전시회에서 우리가 나혜석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단지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좀 더 진취적이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나혜석은 문학가이기도 했다. 많은 책들에 실린 니혜석의 글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나혜석이다”

나혜석 특별전은 모두 6개의 파트로 구분이 된다. 나혜석의 연보를 알아볼 수 있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 ‘나는 신여성이다’로 이어진다.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는 나혜석의 가족사진과 학창시절의 학적부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나는 신여성이다 에는 나혜석 소개영상을 준비했다.

다음으로 ‘나는 세상에 말하고 싶다’에서는 나혜석의 문학작품 및 유화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인연을 맺었다’에는 구미와 프랑스의 여행기와 교류작가 자료 등을 전시했다. 다음으로는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에서는 수원과 나혜석에 대한 자료 등을 만나볼 수가 있다.


나혜석은 유화를 그리기 전 삽화작업도 했다. 아래는 나혜석의 유화가 소개된 책들


전시실에는 나혜석이라는 존재를 알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얼마나 많은 글과 그림 등을 통해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 속에 녹아있는 수많은 꿈과 이상을 만날 수가 있다.

「조선 남자들은 참 이상합니다. 자신들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자신의 부인에게는 정조 지키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나혜석의 이혼고백장, 1934년 삼천리)」

이 한 구절의 이야기가 어쩌면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조선의 남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성들을 자신들의 아래에 두고 비하시키는 그러한 사회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온 나혜석. 그녀는 오늘 “나는 나혜석이다.”라고 절규를 하고 있다. 1896년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40세 때인 1935년 다시 수원으로 돌아 온 나혜석은 1937년 수덕사, 다솔사, 해인사 등으로 돌아다녔다.


나혜석이 그린 유화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도 한 나혜석의 흔적


10여 년 동안 절집을 돌아다니면서 나혜석은 세상에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1948년 53세의 나이로 서울 시립 자재원에서 세상을 떠난 나혜석은, 아직도 세상에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하다. 수원박물관 학예팀의 이동근의 말이다.

“나혜석에 대한 자료는 많지가 않습니다. 그 자료도 모두 뿔뿔이 흩어진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모았습니다. 오늘 이 자료가 나혜석이라는 한 여성을 재조명하기에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최린(위),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나혜석은 아픔을 당하고, 사회에서 나혜석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도 했다


「나는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지 115년. 사람들은 나를 신여성, 최초의 여성유화가, 문학가, 민족운동가, 여성해방론자라고 말한다. 나는 예술적 삶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었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충실하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며 슬프고도 노여운 시대에 살면서 나는 그림과 글을 통해 ‘나는 나혜석이다’라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특별전시 팸플릿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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