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옥천리 479번지 작은 사랑이라는 집골목에는, 당간지주 하나가 서있다. 원래 당간지주는 두 개가 한 쌍이지만, 이곳 당간지주는 한 개만이 외롭게 서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나머지 한 개는 일제강점기에, 당시 일인 경찰서장이 당간지주 중 한 짝을 양평읍 양근리 소재 갈산으로 옮겨, 자기네의 황국신민서사를 새겨 세웠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갈산 일대를 찾아보았으나, 아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일본으로 가면서 가져갔다고도 이야기들을 한다.

 

아직도 길에 눈이 많이 쌓여있어 미끄럽다. 앙평군의 사나사를 찾아보고, 옥천면에 들려 문화재의 위치를 확인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두 개의 당간지주가 서 있어야 하는데, 영 찾을 길이 없다. 마침 지나는 마을 분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신다. 원래는 옥천리 논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당간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그런데 당간을 보는 순간 참으로 어이가 없다. 당간은 현재 양평군 향토유적 재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런데 안내판 앞에 개를 매어 놓아 안내판이 가려졌다. 안내판 전체를 읽을 수가 없다. 더구나 하나 남은 당간에는 눈이 밑 부분의 원공까지 덮어버렸다. 길을 치우면서 당간에 눈을 쌓아놓은 것이다. 눈을 치우고 나서 원공을 찍으려는데, 묶어놓은 개가 허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이래서야 어디 문화재 답사를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현재 하나뿐인 당간지주도 원래의 간대와 기단은 소멸이 되었단다. 최근에는 시멘트와 석축으로 보수를 해 놓았다고 하는데, 눈이 쌓여 확인할 수가 없다. 옥천리의 당간지주는 높이가 305cm, 폭 50cm, 두께 36cm 정도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곳 옥천리와 인근 용천리에 신라 말과 고려 초에 대원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대로라면 이 당간지주는 신라말 고려초에 세운 가치 있는 문화재라는 것이다.

 

▲ 안내판 개집을 당간과 문화재 안내판 사이에 놓아 안내판을 읽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 안내판 개집을 당간과 문화재 안내판 사이에 놓아 안내판을 읽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소홀한 문화재관리 마음 아파

 

문화재 안내판과 당간지주 사이에 놓인 개집, 그리고 치운 눈을 가득 쌓아올린 당간. 참으로 어이가 없다. 한 개의 당간을 잃어버린 것도 마음이 아픈데, 꼭 이렇게 문화재 옆에다가 개까지 묶어놓아야만 했을까? 새삼 우리 문화재의 현실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문화재이거나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런 소중한 문화재를 이렇게 홀대하고 있다니. 세상 어느 나라가 이렇게 자신들의 문화재를 함부로 방치하고 있는지, 아마 아무데도 이렇게 방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 원공 당간지주의 가운데 뜷려있는 원공. 당간을 고정시키는데 쓰인다.

▲ 개와 당간 당간의 안내판에는 게집을 놓고, 눈은 당간지주에 쌓아 놓았다.

 

치운 눈을 쌓아놓아, 당간의 지주부분은 확인조차 할 수가 없다. 문화재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딴 곳과는 달리 이곳의 눈부터 치워야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갖다가 쌓아올린 모습.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뒤떨어진 것일까? 추운 날 서둘러 나선 답사 길에서 마음만 아파 돌아온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1, 8)

 

봉황정, 봉황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정자가 서 있는 밑으로는 물이 흐른다. 저 멀리 내 건너 보이는 사람들은 그 물에 발을 담구고 앉아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님 두 사람이 주변 시선에 정신을 뺏기지 않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까? 봉화정에서 내려다보는 냇가에는 손 장난을 치는 연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봉황정은 용문면 소재지에서 44번 도로를 따라 횡성군 방향으로 3.5㎞ 지난 오른쪽 길가에 서 있다.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 물이 맑고 주변 경치가 아름답다. 봉황이 춤을 추는 형상이라고 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어 봉황정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다. 일반 정자와는 달리 담이 처져있고, 계단을 따라 위로 오르면 정자가 서 있다. 대문 입구에는 일붕 서경보 큰 스님의 통일을 염원하는 시비가 한편에 서 있다.

 


계단을 오르면 정자 안편에는 람휘정이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그리고 밑으로 흐르는 내 흑천 쪽으로 정자를 돌아가면 구성대라는 또 하나의 현판이 걸려있다. 한 정자에 세 개의 이름을 붙인 봉화정.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기야 한 정자에 네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 정자도 있다.'九成'은 태평성대가 아홉 번 이루니 봉황이 와서 춤추는 형상을 뜻하고, '覽輝(남휘)'는 봉황이 천리 길을 날아가다 덕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내려앉았다는 뜻을 지닌 말이라고 한다.

 

봉황정이 처음 건립된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에 이조참의 양응청과 의해 건립되었다. 그 후 정조 14년인 1791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으나, 철종 1년(1850)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다시 1967년에 남원양씨 종중에서 옛 규모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봉황정은 당대의 시인묵객들이 시와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지평에 은거하였던 이식, 명시인 유희경, 김창흡, 이중하 등이 봉황정에 올라 봉황정의 아름다움을 글로 남겼다. '봉황정'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암긴 사람들은 이항복, 유희경, 김창흡의 시가 전한다.  봉황정은 팔작지붕에 겹처마 건물로서 내부에는 누마루를 놓았다. 규모는 정ㆍ측면 각각 3칸으로 정방형이다. 정자 안에는 '봉황대남휘정중수기'부터 최근에 만든 시문현판까지 모두 7개의 글을 적은 게판이 걸려있다.

 

  
▲ 현판 정자 안에는 람휘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시 한 수 적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선조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잊고 산지 오래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도 '아름답다'라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의 날들이 참 바보같다는 생각이다. 누군가 이 봉황정에 올라 스스로를 시인이라 했다면, 글 한 수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속 좁은 사람도 정자에 오르면 저 아래 흐르는 광탄에 세속에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버릴 수 있을텐데, 그저 덧없는 세월만 탓한들 무엇하리. 오늘 이 봉황정에 올라 엣 선인들의 마음을 읽어본다.  (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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