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90-4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옛 한계사 터. 한계령 중턱의 장수대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사지에는 보물 제1275호인 한계사지 ‘남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 다. 앞으로는 한계천이 흐르고, 뒤로는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이 한계사는, 만해 한용운이 지은 책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원년인 647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약 17세기 말까지는 절의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다. 현재 이 한계사지에는 건물의 주춧돌과 석수, 불좌대 등이 남아 있고, 삼층석탑 2기와 불상, 석등 등 많은 석조물이 있다.


떨어져 있는 남북 탑, 쌍탑으로도 추정해

한계사지에는 두 기의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두 기의 탑을 쌍탑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두 삼층석탑이 비슷한 시기에 삼층석탑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남 삼층석탑은 금당터 앞에 서있는데, 받침대 역할을 하는 이층의 기단을 두고 있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 당시의 전형적인 신라탑 형식으로 조성이 되었다. 처음으로 이 탑을 보는 사람들도 ‘참 반듯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아래층 기단에는 한 면에 3개씩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그저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형태의 탑으로, 그 가운데서도 기품을 느끼게 하는 탑이다.




지붕돌에는 풍경을 단 흔적이 있어

위층 기단은 네 모서리와 각 면의 중앙에 기둥을 본떠 새겼다. 양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돋을새김 한 것이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1, 2층은 5단으로, 3층은 4단으로 줄어져 있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끝부분에 이르러 살짝 들려 있어 밋밋함을 벗어나고 있다. 상륜부의 장식은 다 없어졌으니, 최근에 둥근 돌을 하나 복원하여 얹어놓았다.

이 남 삼층석탑은 9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계사지를 정리할 때 낡은 산장 옆에 옮겨져 있던 것을, 원래의 자리를 찾아 복원한 것이다. 탑은 파손되었던 부분을 복원하면서, 일부를 너무 모나게 다듬어서인가, 원래의 석재들과 잘 맞지 않는다. 서북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북 삼층석탑과 비교하면, 기단에 새긴 조각의 모양이나 지붕돌받침수가 서로 달라 석탑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붕돌의 끝 모서리 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씩 보인다. 아마 풍경을 매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크기 등으로 보아 무게가 나가는 풍탁을 매단 것 같지는 않다. 오랜 세월 한계사지를 지켜 온 남 삼층석탑. 그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옛 선조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답사를 하면서 늘 궁금하게 느끼는 것은, 이렇게 많은 석탑과 석불을 만든 장인들의 마음이다. 무슨 마음을 갖고 이렇게 힘든 작업을 한 것일까? 물론 지금도 석불이나 석탑을 조성한다. 하지만 그 당시와 지금의 작업방법은 전혀 다르다. 망치 하나와 정만을 갖고 조성했을 당시의 장인들. 아마 이렇게 석탑이나 석불, 그 외에 많은 문화재를 보고 감동을 받는 것은, 그러한 장인정신의 마음을 읽기 때문이나 아닐는지.



한계령을 오르다 만난 한계사지 남 삼층석탑에서 그 해답을 얻어 보고도 싶지만, 아직은 그럴만큼 농익지 않은 문화재 답사길이다.


금산사는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600년대 창건되어, 신라 혜공왕 2년인 776년에 진표율사가 다시 고쳐 세우면서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는 고려 935년에는 후백제의 신검이 아버지인 견훤을 유폐시켰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금산사 경내에는 보물 제22호로 지정이 된 ‘노주’가 있다.

이 금산사에 있는 석조물은 그 이름을 노주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처럼도 보인다. 이 석조물은 석등과 대좌, 불탑의 부분을 모아 놓은 듯하다.


석등롱일까? 노주일까? 아리송한 형태

이 노주라 명칭을 붙인 석조물은 대적광전 오른쪽 앞에 있는 석련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노주가 본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 노주는 미륵전 정중에 있었는데, 1922년에 대장전의 이전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노주는 『금산사지(金山寺誌)』에는 ‘석등롱(石燈籠)’이라는 설명되어 있다.

이 서책을 보면 노주와 석등롱은 별개의 것이라고 한다. 노주는 불전의 정면 양우에 서 있는 2개의 번간(속칭 갯대)으로써 탑상찰간의 전명이다. 탑상찰간은 ‘구륜지간’이라 하여 줄여서 윤간이라고도 하고 ‘노반지주(露盤之柱)’라 하여 노주라고도 약칭하였다. 구륜이란 불탑 꼭대기의 수연 바로 밑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아홉 층의 원륜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석등롱은 노주의 상대물로써 미륵전의 불상에 공양하던 것이며, 그러한 이유로 속칭 ‘광명대’라고도 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현재 노주라고 하는 석조물은 제 형태를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상과 복련의 조각이 일품

이 석조물은 땅 위에 지대석인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상, 중, 하로 나누어 받침돌을 순서대로 얹어놓았다. 지대석은 4각형으로써 하나의 석재에 2단으로 조각되었는데, 아랫단의 1변의 길이는 121㎝이다. 각 단의 높이는 아랫단이 13㎝, 위단이 9㎝ 정도이다. 하대석은 위의 모서리 부분을 약간 둥글게 다듬어 16변의 복연을 조각하였고, 각 면의 수직 부분에는 2개의 안상을 선각해 놓았다.



이런 조각의 형태로 볼 때 이 석조물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나, 그 여러 가지 조각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중대석에는 특별한 문양 없이 다만 우주만을 양각해 놓았다. 1변의 길이는 50㎝이며, 높이는 55㎝이다. 상대석에는 16변의 커다란 앙연이 조각되어 있다. 1변의 길이는 94㎝이고, 높이는 37㎝이다.

제일 위에 얹혀 있는 석조물도 하나의 석재로 되어 있으며, 그 형태는 탑의 상륜부에 올리는 보륜과 흡사하다. 이 석조물은 한쪽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상륜부에 놓인 보주만 없으면 방형의 대좌와 흡사한 형태의 금산사 노주. 과연 그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처음 그 형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도 있는 그 형태가, 오늘 발길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돌로 만든 석불대좌. 그 위에는 석불좌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을 것이다.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감탄을 불러 올 수 있다면, 그 위에 좌상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최고의 석조 예술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위치한 고달사지. 그 고달사지 높지 않은 축대위에 자리한 석불대좌는, 그야말로 대단한 작품이었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사각으로 구성되었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사각 대좌뿐이 아니라, 그 어떤 대좌보다도 뛰어난 수작이다.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장방형의 석재를 상, 중, 하대 3중으로 겹쳐 놓았다. 이른바 방형대좌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석불대좌이다. 보물 제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3단으로 꾸며진 방형의 석불대좌

대좌의 상대에는 앙련을 조각하였는데, 그 형태가 시원하다. 뚜렷한 조각솜씨는 당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 고달사지는 나라에서 관리를 하는 사찰이었던 점을 보아도, 이 석불대좌를 조각한 공인은 최고의 기능을 갖춘 석공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중대는 사면을 돌아가면서 큼직한 안상을 하나씩 조각하였다. 음각으로 새긴 안상은 바라만 보아도 명쾌하다. 하대는 상대와 같은 연꽃을 앙련으로 새겨 넣고, 그 아래에는 작은 안상을 한 면에 4개씩 새겨 넣었다. 상하의 조각을 앙련으로 마무리를 해, 방형의 사각형에 중첩과 안상, 연꽃을 교체하여 뛰어난 조화를 엿볼 수가 있다.



보면 볼수록 빠져들어

설을 지내고 난 다음날인 2월 4일. 눈길을 걸어 찾아간 고달사지에는 인적이 없다. 정초이기도 하지만, 황량한 이곳을 정초부터 찾아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한적한 고달사지를 둘러본다. 저만큼 석조며 귀부와 이수, 그리고 낯선 석조각들이 보인다. 그 고달사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석불대좌. 낮은 축대 한편으로는 돌계단이 보인다.

그 돌계단을 올라 석불대좌 주변을 돌아보면 잘 다듬은 초석들이 보인다. 아마도 이곳이 금당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본다. 이 석불대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석불은, 아마도 이 고달사의 주불이었을 것이다. 대좌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아본다.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대좌 위에 사라진 석불을 그려보다

석불대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다. 그 장대석의 크기도 예사롭지가 않다. 고달사지 안에서도 가장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기둥을 세웠던 초석이 가지런히 자리를 하고 있다. 그 중앙에 석불대좌가 놓여있는 것이다. 대좌를 앉힌 기단석은 원래는 커다란 바위를 네모나게 조형을 한 것 같다. 반이 금이 가 있으나, 동서가 갈라진 곳이 다르다. 그리고 그 위에 일석으로 하대를 조성했다. 네모나게 층을 만들고, 사방에는 네 개의 안상을 음각했다. 그 위를 덮고 있는 앙련이 부드러움을 느낄 만큼 정교하다.

중대는 상대와 하대에 비해 좁게 만들었다. 각 면에 하나씩의 커다란 안상을 음각하였는데, 그저 밋밋한 그 안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맨 위 상대는 일석으로 조성하였는데, 아래는 앙련을 위에는 꽃잎을 조각하였다. 상대의 위는 석불이 앉았던 자리이다. 그저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도대체 이 방형의 거대 석불대좌 위에 올려 졌던 석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무리 그림을 그려보려고 하지만, 딱히 그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있고, 좁고 길게 찢어진 눈에,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다. 어깨에 걸친 법의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을 테고, 발은 편안하게 가부좌를 틀지 않았을까?

세상의 모든 고통을 받는 중생들에게, 그 미소로 아픔을 가시게 해주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수작인 석불대좌 위에, 조악한 작품이 올라앉았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바람에 밀려 고달사지를 떠나면서 내내 뒤를 돌아다본다. 석불대좌 위에 금방이라도 석불이 나타나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할 것만 같다.

 

절 입구에 가면 당간지주란 석주를 볼 수 있다. 당간지주란 절 입구에 세워놓는 것으로, 절에서 행사를 할 때나 각종 의식을 펼칠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것이다. 이 당을 달기 위한 기둥이 바로 당간지주이다. 당간지주는 ‘철당간’이나 ‘돌당간’으로 구분이 된다. 하지만 철당간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이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기 위해서는, 양편에서 깃발을 달아 놓을 수 있는 버팀목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당간지주이다.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는 연못 위편에 두 개의 당간지주가 동 서로 나란히 서 있다. 두 개의 당간지주는 그 형태가 같은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제작이 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지 남쪽에 자리한 당간지주

 

서로 약 90m의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당간지주. 그 형태나 크기 등을 보아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마치 쌍둥이 같은 모습이다. 하층 기단부는 부서진 채 땅속에 있다고 하며, 그 위로는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원래 서 있던 자리에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앞에 절을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당간은 두 개의 석주가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에는 당간을 단 대를 고정시킬 때 사용한 구멍이 나 있다. 구멍은 아래위로 뚫는게 보편적인 형태이며, 지주 전체를 관통하는 경우와 얇게 뚫는 경우가 있다. 미륵사지의 당간지주는 세 개의 구멍을 뚫었으며, 관통을 하지 않고 지주의 중간쯤까지만 뚫려있다.




맨위는 당간지주 상단에 뚫은 구멍. 아래편에 당간석을고정시키기 위한 구멍과(가운데) 당간석을 받치는 받침돌(아래)
 

맨 위에 있는 구멍은 당간의 상단에 보이는데 직사각형이다. 그리고 아래편의 두 개의 구멍은 둥글게 뚫어놓았다. 이 구멍에 막대 같은 것으로 끼워 깃대를 세우고 묶어 놓는 것이다.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당간은 단아하다. 많은 장식을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 당간의 멋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제작된 당간

 

이 두 개의 당간은 조성 시기나 형태가 같기 때문에, 하나의 당간을 설명한다 해도 다를 바가 없다. 당간의 기단부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지주의 양편 바깥쪽에는 둘레를 따라 외연선을 둘러놓았다. 외부의 중앙에도 역시 한 줄의 선을 주변을 깎아서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지주의 맨 위는 둥근 타원형으로 조성해 부드러움을 더했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모서리부분을 돌출시켰다. 맨 아래는 받침돌

이 두 지주는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현재 이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모양의 예로는 경북 영주시의  소수서원 경내 입구에 자리한 숙수사지 당간지주와, 보물 제255호인 부석사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그 양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사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내놓지 않은 아름다움

높이 약 4m의 당간지주. 지대석 위로 양편에 당간을 새운 중앙에는 당간대를 세울 수 있도록 받침석을 마련하였다. 받침석은 높이가 30cm 정도 되는 네모난 돌로, 그 옆에 붙여 당간지주를 세우는 것이다. 중앙에는 홈을 만들어 덩을 다는 대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을 할 수 있다.


당간을 다는 당간석을 꽂게 만든 받침돌(위)과 당을 다는 당간석(아래)

대의 받침돌은 양편에 네 줄을 내렸으며, 맨 위는 조금 밖으로 돌출이 되게 하였다. 이런 돌 하나에도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미륵사지 당간은 화려하지가 않다. 그러나 형태 등에서 뛰어난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가 있다. 연못에서 바라다보는 우측 당간지주의 옆에는 둥글게 깎은 돌이 서 있다. 당간석이라는 돌이다. 이 당간석을 당간지주의 중앙에 있는 홈에 끼워 새우는 것인데, 잘라져 아랫부분 일부만 남아있다.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 두 개의 당간이 동서로 서 있는 모습에서, 과거 미륵사의 위용을 엿본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아름다움이 있어 더욱 좋다. 2011년 1월 25일 오후, 천년 세월 그렇게 서 있는 당간지주의 멋에 취한다.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에 소재한 함양중학교 교정에는 딴 곳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있다. 바로 본관 현관 문 옆에 커다란 석불좌상이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대좌를 합한 높이가 4m가 넘으면, 앉아있는 석불좌상의 높이만 해도 2.45m가 넘는 거대한 고려시대의 석불이다.

이 석불좌상이 어떻게 해서 이 학교 교정에 와 있는지. 원래 이 석조여래좌상은 청룡사 터나 용산사 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12월 11일, 하루 만에 전북 남원과 경남의 거창, 함양을 돌아보았다. 정발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함양중학교 교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을 시간이다.


조각난 석불좌상.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보물 제376호인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불상 뒤편에 세우는 광배가 없어지고, 오른팔과 얼굴, 무릎과 대좌 등 일부가 잘려나간 상태이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거기다가 머리 부분도 깨어져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 모습으로 보아 강건한 형태의 석불좌상임을 알 수가 있다.

오른손도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나가 원래의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땅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대좌의 경우도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사각형으로 조성된 대좌는 측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싱대, 한 번에 두 개씩 눈모양인 안상을 새긴 중대, 두텁게 새긴 겹 연화문을 돌린 하대로 구성되어 진다.




고려시대 석불의 장중함이 그대로

많이 훼손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 크기나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불좌상의 장중함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크기도 대단하지만, 석조불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크고 강건한 형상의 이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코와 입의 모습들을 볼 때, 함양 덕전리의 마애여래입상과 그 형상이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입가에는 알듯 모를 듯 엷은 미소를 띠우고 있는데, 표정은 전체적으로 온화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두텁게 새긴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다. 석불좌상을 몇 번을 돌면서 나름 상상을 해본다. 만일 온전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그 장중함이 대단하였을 것이란 생각이다.




대좌만으로도 사람을 반하게 하다

양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을 돌아보면서 옛 선인들의 뛰어난 작품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장비도 변변치 않았을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큰 돌을 하나하나 조각을 하여, 작품을 만든 것일까? 대좌 하나만 보아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맨 밑에 놓인 하대는 두텁게 조각한 연화문을 사방에 둘렀다. 일부가 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안상을 두 개 씩 조각한 중대는 온전한 모습이다. 상대는 밑에는 이단의 층을 만들고 위는 평평하게 다듬어 석조여래좌상을 올려놓게 하였다.

한편이 뭉텅 잘려나갔지만,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상대는, 고려 석조미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다. 해가 지는 학교 교정에서 만난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좌상. 그 웅장한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발길을 붙들기에 충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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