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송상동 188에 소재한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가 되었다. 그 후 조선조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조선전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왕이나 왕실의 무덤을 수호하고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이 간혹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하지만 조선후기에 와서 사림세력이 국권을 흔들면서 왕실에서의 사찰건립이 쉽지 않았다. 용주사를 마지막으로 하여 조선왕조에서의 왕실의 원찰은 더 이상 세워지지 못했으며, 이처럼 사회적 여건이 좋지 못하던 시대에 거대한 왕실의 원찰이 세워지게 되었던 연유는 정조의 지극한 효성 때문이다.

 

 

현륭원을 수호하던 용주사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였다다. 용주사는 창건이후 지금까지 가람의 구조가 크게 변모되지 않고, 창건당시의 상량문을 비롯하여 발원문등 용주사의 창건과 관련된 문헌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용주사 매표소를 지나 경내로 들어가다가 보면 홍살문이 보인다. 원래 사찰에는 홍살문을 세우지 않지만, 이곳은 현륭원을 지키는 사도세자의 원찰이기 때문에 홍살문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홍살문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효행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효행박물관 앞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용주사에는 두 기의 오층석탑이 있다. 사람들은 간혹 천보루 앞에 서 있는 높이 4m의 오층석탑을 유형문화재로 잘못 알고 소개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이 된 오층석탑은 높이 4.5m의 이 화강암으로 조성한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위패형 제액을 마련한 특이한 오층석탑

 

효행박물관 앞에 서 있는 이 오층석탑은 간략화 된 기단부와, 탑신부의 탑신석과 옥개석 등의 양식과 치석 수법을 볼 때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석탑의 기단부 면석부에 위패형 제액을 마련한 점은 드문 예에 속한다. 이 오층석탑은 딴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오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과는 차이가 난다. 오층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상륜부를 하나의 돌로 조성한 점이나, 처마가 수직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일석으로 조성한 것은 여느 탑과 다름이 없으나 1층 몸돌에는 문비가 새겨져 있다. 1. 2. 3층의 머릿돌의 옥개받침은 4단이나, 4층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일 밑에는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하대석을 놓았다. 지대석에는 사방에 귀꽃모양의 인상을 3구씩 새겨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린 기단면석에는 위패형의 사각을 모각하였다. 부분적으로 훼손이 된 곳은 있지만, 고려시대의 석탑 중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로 조성하였다.

 

용주사를 찾아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된 오층석탑. 그 탑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세상의 온갖 추악한 무리들을 벌하시고, 선한 사람들이 제발 마음 편하게 사는 날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홍양사터라고 전하는 홍천 물걸리 사지.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보물 5점이 옛 절터를 지키고 있다. 19674월에 이 절터를 발굴하면서, 출토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 고려시대 철불 파편 4, 철쇄 파편 2, 암막새 4, 수키와 조각 6, 암키와 조각 6점 등이 발굴되었다.

 

또한 청자 조각 4, 토기 조각 5, 조선시대 백자 조각 7점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1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42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543호 대좌, 보물 제544호 대좌 및 광배, 그리고 보물 제545호인 삼층석탑이 옛 절터에 보존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물걸리 사지는, 신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이곳은 사지 앞에 대승사라는 절이 들어서 관리를 하고 있다.

 

통일신라 말의 석조여래좌상

 

이 물걸리 사지 동편에 마련한 전각. 그 안에는 4기의 보물이 보관되어 있다. 그 중 보물 제541호로 지정이 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얼굴은 마멸이 심해 세세한 표현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전체적은 형태의 모습에서 이 여래좌상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이 되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다.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 묶음인 육계가 펑퍼짐하게 솟아있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치고 있고, 가슴에는 띠 모양의 매듭을 단정하게 묶은 것이 보인다. 어깨는 둥글지만 두텁고 투박하게 보인다.

 

 

광배가 사라져버린 이 석조여래입상은 상체는 8세기 불상에 비해 평판적이고 왜소한 편이다. 그런 표현을 하다가 보니, 당당한 양감이 사라져버린 모습이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하여 무릎 위에 올렸다. 이런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부처가 깨달음에 이른 순간을 상징한다. 이러한 수인으로 보아 이 석조여래좌상은 석가모니 부처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얼굴은 마모가 심해 자세히는 알 수가 없으나, 눈과 코, 입이 적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얼굴모습은 통일신라 후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통일신라 전기에 비해 양감면에서 뒤처지고 있다.

 

 

여러 마리의 팔부중상과 가릉빈가로도 부족했소?

 

불상이 앉아있는 불대좌는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다. 오랜 세월 풍상에 씻기면서 조금은 마모가 되기도 했지만, 문양 등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가 있다. 이 불대좌는 상, , 하대로 구분되어 있다. 8각형으로 조성된 하대에는 각 면마다 무늬가 있고, 향로와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가릉빈가와 향로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부조로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아랫돌에는 커다란 앙화의 끝에 귀꽃을 새겨 넣어 멋을 더했다. 그리고 8각의 각 면에는 팔부중상을 돋을 새김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팔부중상의 흔적은 많이 마모가 되어, 정확한 표정이나 행동등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다.

 

 

상대에는 활짝 핀 모양의 여러 장의 연꽃무늬를 겹쳐 새겨져 있다. 마모로 인해 신체표현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둥근 얼굴에 눈, , 입이 작고 신체가 두텁고 투박한 점과, 불대좌에 많은 장식을 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 이후의 전형적인 석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작품이다.

 

가릉빈가와 팔부대중, 그리고 향로와 연꽃 등. 비록 섬세한 표현은 아니라고 해도, 많은 문양 등을 이용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 아마도 광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화불과 넝쿨문양 등을 조각했을 것이다. 사라진 한 부분이 상당히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문화재란 처음 모습 그대로를 만날 대 가장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가끔 볼멘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기야 내가 문화재 담당자가 아니니, 그런 소릴 들었다고 무엇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일이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소중한 가를 이야기하다가 보면, 실실 울화가 치밀 때도 있다. 막무가내로 돌덩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열을 올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681번지에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인 장남리 삼층석탑이 소재한다. 인제에서 홍천으로 오다가 보면 군계를 벗어난 고개에서 조금 내려와, 삼층석탑의 사진을 곁들인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안내판을 보고 찾아들어간 장남리 삼층석탑. 그러나 몇 번을 이리저리 돌아서 겨우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땅 꼭 그렇게 차지하고 있어야 하나요?”

 

장남리로 들어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물어본다. 어디로 이렇게 가면 있다는 삼층석탑. 길에서 보인다고 하는데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몇 번을 그 앞으로 지나쳤으면서도 볼 수가 없었다. 탑은 작고 그 앞에 나무 한 그루가 풍성하니 탑을 막고 있어, 길에서 보인다는 탑은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한 사람이 곁으로 와 이야기를 한다.

 

저 탑을 치울 수 없어요?”

탑을 치우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탑이냐고 어디 탑 같지도 않은데 땅만 잔뜩 차지하고 있잖아요.”

, 그래도 소중한 우리 문화재이니까요

그래도 꼭 그렇게 넓은 땅을 사용도 못하게 만들어야만 하나요?”

아마도 이곳이 옛날 절터라 보존을 해야 하나 보네요. 그리고 문화재는 보물이 되었건,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탑이 되었건 다 소중한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보호철책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면서도 영 기분이 찝찝하다. 물론 땅 주인이야 문화재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땅을 넓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다.

 

나 그래도 문화재야

 

전국을 다니면서 국보와 보물 등으로 지정이 된 수많은 석탑들을 보았다. 그 중에는 정말로 그 아름다움에 눈물이라도 날 것만 같은 것들도 보았다. 그런가하면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도, 이런 문화재도 있구나 할 정도로 초라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화재는 다 그 나름대로 그 시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남리 삼층석탑은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탑의 각 부재들을 수습하여 쌓아 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탑의 높이는 전체가 1.3m 정도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맨땅 위에 막돌과 기다란 돌 2개를 깔아 바닥돌을 삼고, 그 위에 아래층 기단, 위층 기단, 탑신의 1층 몸돌과 지붕돌 3개를 차례로 올려놓았다.

 

기단부 이하의 석재들도 제짝이 맞지를 않아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을 새겼으며, 일층 몸돌에는 양편에 양우주를 조각하였다. 두툼한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위로 치켜져 올라갔으며, 지붕돌의 밑면에는 2단의 받침을 두었다. 고려시대 후기 석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장남리 삼층석탑. 비록 특별한 것도 없고, 제대로 부재가 맞지를 않아 볼품없는 모습이긴 하지만, 그래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석탑이다.

 

 

문화재를 답사할 때마다 종종 마음이 아픈 것은, 이런 문화재라고 하여서 푸대접을 받는 일이다. 그러나 장남리 삼층석탑은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고, 넓은 대지에 보호철책을 만들어 놓아 그나마 위안이 된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온전히 제대로의 대접을 받으려는지.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사람은 가끔 이상한 생각을 한다. 그것도 아주 해괴한 생각 말이다. 아마도 찜통더위가 계속되면서, 하도 햇볕에 싸돌아다니니 머리에 이상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지. 그 절터 한 복판에 장방형의 석조물 한기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보물 제8호인 ‘고달사지 석조대좌’이다.

 

난 이곳을 들릴 때마다 이 석조대좌 위에 올라앉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위에 올라가 하늘에 흐르는 구름만 바라보아도 바로 부처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가끔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해대는 것도, 무료한 답사를 즐겁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찜통더위를 잊으려면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석조대좌 하나만으로 보물이 되다니

 

이 석조대좌는 현재 정리가 된 고달사지의 중앙에 자리를 하고 있다. 이렇게 석좌가 있었다는 것은, 이곳에 석불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석좌가 놓인 곳이 대웅전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간 쌍사자 석등이 놓여있던 자리가 그 남쪽이었기 때문이다.

 

장방형으로 조성된 이 석불대좌는 모두 3단으로 구성이 되었다. 위에 올렸던 불상은 사라졌지만, 이 석불대좌 하나만으로도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훌륭한 작품이다. 아마도 이 위에 있던 석불 역시, 석조대좌로 가늠해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석불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고려 초기의 역작인 석조대좌, 정말 대단하다

 

방형대좌로 조성이 된 이 석불대좌는 고려 초기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일반적인 석불좌처럼 화려하게 조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네모난 대좌는 큼직한 앙련과 안상을 새겨놓았다. 단순하지만 조화를 이루는 형태는, 당시 이 고달사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이 받침돌은 상중하의 3단으로 조성하였는데,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다. 윗면은 불상이 놓여 있던 곳으로 평평하니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또한 중간돌에는 한 면에 꽉 차게 안상을 새겨놓았으며, 아래받침돌에도 작은 안상을 4구씩 새겨 놓았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방형의 종첩과 연꽃과 안상을 교차적으로 조각하여, 밋밋함을 느낄 수 없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승탑과 동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여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같은 고달사지 내에 소재한 국보 제4호인 여주 고달사지 승탑의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게 조성이 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대좌의 축조시기가 승탑과 같은 고려 초기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으로 나타난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달사지 석조대좌. 불상을 올려놓았던 이 석조대좌가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8월 4일의 찜통더위에 찾아간 고달사지. 그곳에서 만난 석조대좌로 인해 무한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힘든 답사길의 새로운 즐거움이다.

천흥사는 고려 태조 4년인 921에 창건되었다가, 조선시대에 폐사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천흥사지는 충남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일대를 말한다. 이곳에는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을 옮겨 보관이 되고 있는, 국보 제280호인 천흥사지 동종과 아울러 천흥사지에 남아있는 보물 제99호 당간지주와 보물 제354호인 천흥사지 오층석탑이 있다.

 

이 국보인 천흥사지 동종 위패형 명문에 양각이 되어있는 "聖居山天興寺鐘銘 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이라는 문구로 보아, 고려 현종 원년인 1010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명문가운데 '통화(統和)는 중국 요의 연호로 고려 현종 원년에 해당한다. 이 당간지주와 오층석탑도 범종과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 올해가 벌써 햇수로 1000년이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년 지난 고려 초의 당간지주

 

당간지주란 절에서 각종 의식을 행할 때 악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당간(幢)'이라는 깃대를 세우는 지주를 말한다. 당이란 부처의 공덕을 표시하는 마귀를 내쫒는 깃발이다. 이 당을 깃대에 매달고 양편에 석물이나 철물로 조성된 지주를 세우게 되는데, 이를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천흥사지 당간지주는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당간지주보다, 상당히 정형화된 미를 나타내고 있다. 당간지주를 고이는 기단의 이층부에 새긴 안상 등이 우수하다. 더욱 두 개의 화강암 돌로 만들어 당간지주를 붙들고 있는, 기단의 이층은 안상의 조각만이 아니고, 상당히 섬세한 형태로 꾸며졌다. 전체적인 모습은 통일신라의 형태에서 약간 퇴화한 듯도 하지만, 일반적인 고려 때의 당간보다는 화려한 듯 하다.

 

 

 

천흥사지 당간지주는 양편의 지주석이 두자 정도 사이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당간을 세우는 네모난 돌이 있고, 중앙에는 당간이 고정될 수 있도록 둥근 홈을 파 놓았다. 당간지주는 2단의 기단 위에 올렸는데, 양편의 지주 돌은 3m 정도의 높이로 밑을 2단의 지주가 받쳐 힘을 받게 했다.

 

오층석탑과 동일한 안상을 새겨

 

보물 제9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천흥사지 당간지주는 마을로 들어가 개울을 건너 민가 앞에 서 있으며, 내를 건너 3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보물 제354호로 지정된 천흥사지 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이 당간지주와 동일한 고려 현종 원년인 1010년에 세워졌다는 것은, 기단에 새긴 안상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당간지주와 오층석탑의 안상이 동일하고, 그 조각 수법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두 개의 석물이 동일인에 의해 동일한 시가에 조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탑 형태를 하고 있는 천흥사지 오층석탑은 이층 기단을 갖추고 그 위에 오층탑을 쌓았는데, 이 석탑 역시 기단에 안상을 조각하였다. 각 면에 7구씩 새겨져 있는 안상은 당간지주의 안상과 동일하다.

 

탑과 당간지주가 300m 이상 떨어져 있다는 것은 천흥사가 당시에 얼마나 큰 사찰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고려 태조 왕건과도 관계가 있었다는 천흥사는, 태조 4년인 921년에 창건하여 현종 원년인 1010년에 대대적인 불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천년 세월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

 

천흥사지 당간지주는 천년 세월을 지낸 화강암의 석조물치고는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당간지주의 상단은 훼손이 되었지만, 뒤편에 있는 기둥 돌의 선 등은 그대로 나타나 있다. 또한 자주와 지주 사이에 있는 당간을 세우는 받침돌이나, 기단부의 이층 돌들은 상당히 보존이 잘 되어있다. 1010년에 조성을 하였으니, 올 해로 꼭 천년을 서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당간지주가 천흥사지에 집들이 들어차면서, 당간지주와 오층석탑이 마을의 집들 가까이 있어 안타깝다.

 

 

천흥사지가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었다고 하지만, 국보인 동종이나 오층석탑, 당간지주 등이 남아있어 역사적으로 소중한 사지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지의 문화재 주변에 있는 민가들이라도 정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문화재 주변이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 또 다른 이차 훼손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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