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오는 통증으로 인해 고집을 피우다가 병원을 향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통증이다. 이제 누구 말마따나 연식이 오래되어 폐차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넘기고는 한다. 그런데 심각할 정도로 통증이 온다. 할 수 없이 병원 신세를 지는 수밖에.

원래 병원하고는 담을 싼 사람이다. 째지고 깨어져도 대층 넘어가는 판인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병원을 찾아 가는 길이다. 가면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병원이라는 곳을 다녀왔는데도 다시 통증이 있다면, 이젠 정말로 농담삼아 하는 몸을 바꾸는 수밖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혼지 실실 웃어도 본다 . 아픔을 조금이나마 잊어보려고. 그런데 뒷 자리에서 아이 하나가 심하게 울어댄다. 이제 10개월이라는데 엄마가 진땀을 흘린다.

어린 엄마는 더 울고 싶을 것

뒤돌아보니 아이엄마가 진땀을 흘리고 있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 불편한 것인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몸도 안좋은데 아이까지 쉴 새 없이 울어대니 솔직히 짜증도 난다. 그런데 아이가 을어대는 것이 엄마의 잘못은 아니지 않을까. 아이 엄마의 나이가 이제 갓 스물이나 넘겼을 것만 같다.

곁에 탄 할머니 한 분이 아이를 추스려보지만 그것도 허사.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도대체 아이가 무엇이 불편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차 안이 덥다. 요즈음 일기가 다시 여름이 오는 것인지 며칠 간 여름날씨로 돌아간다고 이야기를 할 지경이었으니. 기사분에게 에어컨을 좀 틀어달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를 않는다. 아이엄마도 옆 할머니도 감당할 수 없는가보다. 

내리라는 사람, '너나 내려라'

두 시간 정도를 가는 버스이다. 고속도로에서 나이 어린 아이엄마는 울고 싶을 것만 같다. 그런데 버스에 함께 탄 누군가 한 마디 한다.

"아줌마 아이 데리고 내려요. 듣기 싫어 어디 사람이 살겠소. 자가용 타고 다니든지"

아이를 데리고 내리란다. 여기 고속도로인데 아이를 데리고 어디서 내리라고. 아이엄마는 그 소리를 듣고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런 말에 사람들이 모두 동조를 하는 표정이다. 하긴 버스 안에서 아이가 한 시간이 넘게 울고 있으니, 짜증들이 날 만도 하다. 그렇다고 고속도로 인데 내리라니.

"아저씨 여기 고속도로인데 어딜 내리라고 해요"
"당신은 듣기 싫지도 않소?"
"나도 듣기는 싫죠. 그렇다고 일부러 울리는 것도 아닌데. 고속도로에서 내리라고 하면 되나요"


그런데 이 양반 바로 육두문자가 나온다. 결국 어린 아이엄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미안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당황했을까? 옆에 탄 할머니께서 이제는 아이가 아니고 엄마를 달래고 있다.

"아저씨 세상 얼마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무엇이라 할 일이요. 아이가 우는 것이 엄마 탓도 아니고. 그런 당신이 자가용 타고 다니면 되지"

말이 험해지니 이 양반 바로 꼬릴 내린다.
 
"듣기 싫으니까 그러죠" 
"듣기 싫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렇다고 고속도로에서 내리라고 하면 되겠소. 그렇게 능력이 좋으면 당신이 내리쇼. 차 없어 버스 타는 것도 서러운데 별 소릴 다하네"

사람들이 조용해진다. 차 없는 것이 무슨 죄인가? 아이 엄마를 보니, 아이아빠도 이제 나이를 먹었다고 해도 20대 중반일텐데. 차 없는 것을 나무라다니. 어쩌다가 세상이 이리 되었는지. 없는 사람들은 이래저래 살기가 힘들다. 그렇게 아이는 두 시간이 넘게 울었다. 어디가 불편했는지, 아니면 아팠는지. 아이엄마에게 병원을 가보라고 이야기를 한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고맙다고 말하는 어린 엄마. 우리 며눌아이도 차 없어 혹 이런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하늘을 본다. 가을 하늘이 참 높다. 어쩌다가 이 어린 사람이 엄마가 되어서 곤욕을 치루나. 세상이 조금만 이해를 하면 될 것을. 이렇게 야박해야만 하는 것일까? 따듯한 사람들이 그립다.
요즈음은 자식 과잉보호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는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 자신이 아이들을 잘 키우지 못했으니, 무엇이라고 말할 자격은 없다. 가끔 이웃블로거들의 아이들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가슴 시리게 반성을 하는 것도 내가 아이들에게 살갑게 대하지를 못했기 때문인가 보다.

일을 보러 여기저기 다니다가 보면 거의 외식을 해야만 한다. 원래 분위기 없는 인사인지라 그럴 듯한 레스트랑은 그만두고라도, 시설 좋은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는 것은 아예 꿈조차 꾸질 못한다. 그렇게 다니다가 보면 편안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그런 집을 선호하는 편이다. 오랜 시간 답사를 하다가보니 이젠 대충 느낌으로도, 저 집이 괜찮겠다는 정도는 되었으니 말이다.  

이미지 사진입니다

식당을 헤짚고 다니는 아이

밥을 먹으러 식당을 들어갔다. 넓지 않은 식당 안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꽤 많은 사람들이 식사중이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리는 없다. 늘 그렇게 혼자 먹고 다니지만, 아직도 혼자 먹는다는 그런 불편함이 가시지를 않았나보다. 한편에 자리를 잡고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너댓살 먹은 꼬마가 식탁위로 기어 오른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히 바라다보고 있었는데, 아예 식탁 위에 올라가 쿵쿵거리기 까지 한다.

꼬마를 달래 내려놓으니, 이 녀석 다시 올라가 난리를 친다. 이 식당안에서 밥을 먹는 누군가의 아이일텐데 말리지를 않는다. 밥을 차려 놓았는데도, 이 녀석 상 위로 오르기를 그치지를 않는다. 할 수 없이 한 마디 했다.

"이 꼬마 어떤 분이 데리고 왔어요? 좀 부르세요"
"얘... 이리오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이 녀석 도대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이쯤 되면 슬슬 부아가 치민다.

'아줌마라뇨? 내가 아줌마 같아요?'

"아이좀 부르세요 아줌마"
"머라고요?"
"아이좀 부르라고요 밥좀 먹게"
"이 아저씨봐. 내가 아줌마처럼 보여요?"
"이 아이 엄마 아니세요?"
"참 어이가 없네. 아저씨 눈좀 독바로 뜨고 다니세요. 내가 어딜봐서 아줌마예요?"

이쯤되면 밥이고 머고 기분 다 상했다.

"아줌마, 아이를 데리고 다니려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지. 밥 먹는데 아이가 이렇게 해도 놓아둡니까?"
"나 아줌마 아니란 말에요"
"그럼 이 아이는 누구예요?"
"우리 이웃집 아이인데 잠시 맡아 있는거라구요. 나에게 아줌마라니.."

아이를 부르라고 했더니, '아줌마'에 목숨을 건다. 이런 세상에. 아무리 보아도 아줌마처럼 보이는데.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한다. 이럴 땐 무엇이라고 해야하나? 사과를 해야하나? 아니면 끝까지 우겨야만 하나. 참으로 난감하다.

"남의집 아이를 맡았다고 해도, 이 아이 아줌마가 데리고 왔으니 데리고 있어야지 밥을 먹을 수가 없잖아요"
"아저씨 나 아줌마 아니라는데 왜 자꾸만 아줌마라고 하는 거예요"

급기야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를 지른다. 식당 안에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것으로 매도를 당하는 것만 같다.

"아줌마가 아니라면 미안해요. 그래도 그렇지 아이를 데리고 오셨으면 적어도 남에게 방해는 주지 말아야죠"
"내가 무슨 방해를 주었어요. 그 아이가 그리 간 것이지"

이쯤되면 할 말이 없다. 그저 모든 것은 다 내탓이다. 밥을 먹는다는 것도 불편하다. 누구 아이이건 이렇게 아이를 방치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대체 아이 교육이란 무엇일까? 괜히 아이가 잘못한 것을 '아줌마'로 이야길 돌리는 수단에 놀랄 수밖에. 할 수 없이 돈을 계산하고 그냥 나오고 말았다. 밤 기차를 타야하는데 쫄쫄 굶고가게 생겼다. 밖으로 나오니 식당 주인이 따라나와 한 마디 한다.

"손님 죄송해요. 식사도 안하셨는데 밥값을 내시네. 저 아이 저 여자분이 맨날 데리고 다니는 아이예요"

참 이제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람. 저 아줌마는 죽어도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하고, 아줌마도 아니라는데. 이제와 다시 들어가 계속 따질 수도 없고. 아줌마가 아니라고 이마에 써 붙인 것도 아니고. 괜히 죄없는 배 탓만 할 수 밖에. 걸음을 걸으면서 비 맞은 무엇처럼 혼자 중얼거린다.

'맨날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 아줌마 맞네' 


둘째 주와 네 째주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달아서 쉬는 날이다. 요즘말로 ‘놀토’가 된다. 이렇게 두 번째 주와 네 번 째주는 세상없어도 가방을 둘러메고 답사를 떠난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아니면 바람이 불어도 길을 나선다. 내일(12월 11일)은 바람도 불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고 일기예보에서는 이야기를 하지만, 이렇게 이틀 동안 답사를 하지 않으면 철지난 자료를 이용해 글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참을 만하다. 폭설이 내려 무릎까지 눈이 쌓인 산길을 걸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남들이 돈을 줄 테니 이런 날 답사를 하라고 하면, 죽어도 안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주는 남원과 함양, 산청을 돌아보리라고 미리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답사

오후 5시 30분이 근무를 마치는 시간이지만, 30분을 먼저 서둘러 길을 나섰다. 요즈음은 금요일이 되면 유난히 길이 많이 막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려가 남원에서 묵고, 아침 일찍 답사를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여름 같으면 충분한 시간이 되지만 요즈음은 5시만 되면 벌써 어둑해져, 아침 일찍 나서야 하나라도 더 돌아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미리 예매를 하지 않는 것은 전주에서 남원은 40분이면 내려 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장소를 이동할 때는 가급적이면 기차를 타는 것도, 막히지가 않기 때문이다. 오후 5시 54분 차를 겨우 집어 탈 수가 있었다. 이 차는 익산에서 여수로 가는 무궁화 열차다. 아마 출퇴근시간에 맞추어 운행을 하는 열차인 듯하다. 빈자리가 없어 입석으로 표를 끊었다.

요즈음은 열차에 카페 칸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 차 한 잔을 마시면 남원까지 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카페 칸은 기차의 한편에 좁게 자릴 잡고 있고, 의자는 고작 5개가 전부였다. 이런 낭패가 있나. 그곳에도 사람들이 많아 서 있을 자리도 만만치가 않다.


화장실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분, 도대체 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옆을 보니 넉넉하게 자리가 비어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그곳으로 갔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무슨 복에. 그 앞이 바로 열차의 화장실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하지 않을 수밖에. 그러나 40분만 서 가면 되고, 급할 때는 바로 해결을 할 수가 있으니 이곳이 명당이란 생각이다.

기차가 출발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이를 데리고 한 분이 오신다. 아이가 칭얼대는 것을 보니, 소변이라도 급한 것인가 보다. 그런데 정작 화장실 앞에 선 분이 문을 열지 않는다. 아이는 발을 굴러댄다. 화장실이 비어있는데 무슨 일일까?


사용 중이면 불이들어오는 안내등. 문 앞에서서 문이 열릴 때를 기다리다가 아이가 옷을 적시고 말았다. 사진은 좋지 않은 휴대폰으로 촬영을 해 화질이 좋지 않다. 

“아이가 급한 모양인데 왜 안 들어가세요?”
“예,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요”
“거기 표시등이 꺼져 있잖아요.”
“문이 안 열려서 그래요”
“문을 열어야 열리죠.”
“예, 열어야 해요? 어떻게요?”

문을 열어 주었는데, 이미 때가 늦어버렸다. 괜한 애만 갖고 나무란다. 이 분 화장실 앞에 서면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줄 알았는가 보다. 아마 화장실 문을 자동문으로 착각을 하신 것이나 아닌지. 세상 참, 무궁화 열차 처음 타보셨나? 그래도 그렇지 화장실 문이 자동으로 열리기를 기다리다니. 괜한 어린아이만 옷을 버렸다. 자동문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기차여행을 하면서 가끔은 이런 재미도 쏠쏠하다. 차에서 내려 혼자 넋 빠진 사람처럼 비실거리고 웃고 말았다.

조금 신경을 쓴 탓일까? 아니면 비가 오는 날, 비를 맞고 무리한 답사를 계속해서일까? 열이 나면서 한기가 돈다. 주사라도 한 대 맞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병원을 찾았다. 진료신청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곁에 있는 분들의 이야기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정말이지 우리 애들이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정말예요. 세상에 어째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취급도 못 받아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병원을 데려 온 아이는 이제 유치원에 다닐 만한 나이이다. 5~ 6세나 되었을까? 그런 아이가 왜 측은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영어조기교육을 받지 않아도 자기개발로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기사의 특정내용과 관계없음)

영어유치원이 어머니들의 울분을 자아내게 해

듣고 보니 이해가 간다. 뉴스에서 보도를 했다는 영어유치원 이야기다.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적으로 문을 연 영어유치원이 어머니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수업료가 한 달에 백만 원은 족히 들어가고, 어느 곳은 16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웬만한 봉급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곳이다.

같은 또래의 어머니들에게는 그런 곳을 보낼 수 없는 아이들이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가 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쟁의 사회에서 어려서부터 영어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혹여 뒤처지기라도 한다면 좋은 직장을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아니 어떻게 한 달에 그 많은 돈을 들여 유치원에 보낼 수가 있어요.”
“그 뉴스보고 정말로 화가 치밀었어요. 도대체 이 나라는 돈 없고 백없는 사람은 살지 말라는 이야기인지”
“맨 날 선진교육이 어떠니저떠니하면서 이럴 때는 왜 아무 말도 안하나 모르겠네요.”
“그 높은 분들도 그런 유치원에 보내니까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겠죠.”

곁에서 듣고 있으려니 정말로 속이 불편하다. 이어 나오는 말이 특급유치원을 들여보내려고 돈을 먹였다는 이야기다. ‘교육이 썩었다’라는 표현으로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럼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그 말을 듣다가보니 우리 아이들이 떠오른다. 어린이 구호단체 NGO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돌보아야 할 어린이들이 있다. 매달 많지는 않지만 일정액을 지원하는 아이들이다. 물론 그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다. 하지만 후원자들이 내는 후원금을 갖고 살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듬뿍 줄 수가 없다. 그리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이들에게 혜택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그 아이들에 비하면 저 어머니의 아이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조금만 아파도 저렇게 부모님들이 걱정을 하고 병원을 데려온다. 그렇게도 하지 못하고 나날을 보내는 아이들은 누가 걱정을 해주어야 할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말 화가 치민다. 어떻게 세상은 이렇게 불공편한 것일까? 그러나 난 항상 자신을 한다. 영어유치원을 다니지 못했어도, 돈을 내고 특급유치원을 들어가지 못했어도 우리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기사의 특장내용과 관계없음

그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 그저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다는 생각이다. 이어지는 소리에 볼 맨 소리를 한마디 한다. “그래도 어머님들 아이들은 따듯한 보살핌이 있어 행복하죠. 몸이 아파도 병원문도 못 들어가 본 아이들이 허다해요” 그 한마디를 남기고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다.

알고 보면 이런 교육의 차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예전에도 반가의 자손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았지만, 민초들의 자식들은 서당 문턱에도 가보질 못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다 제대로 세상을 살지 못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어찌 보면 이 어머니들과 아이들은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는 불행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영어만 잘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이다음에 꼭 성공을 하는 법도 없다. 영어를 배우지 못했어도, 명문이라는 특급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어도, 어려서부터 일찍 자기개발을 하여 성공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일찍 교육을 받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이는 어린이다워야 귀엽다. 우리 교육이 이대로 잘 굴러가기는 가려는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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