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52번지에 소재한 갑사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이 된 갑사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이란 절의 중심건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이다. 이 갑사대웅전은 원래 지금의 자리가 아닌 대적전 자리에 있던 것을, 선조 37년인 1604년에 새로 지으면서 자리를 옮긴 듯하다.

 

갑사는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 중 서악(西嶽), 고려시대엔 묘향산 상악(上嶽), 지리산의 하악(下嶽)과 더불어, 3악 중 중악(中嶽)으로 일컬어지는 명산 계룡산의 서편에 자리한다.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 1년인 420년에 고구려 승려인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설과, 556년에 혜명이 지었다는 설 등이 전한다.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한 갑사

 

갑사는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최초 사찰인 선산 도리사를 창건하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 땅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단다. 갑자기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는 것. 이로써 탑 아래에 배대에서 참례를 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백제 구이신왕 원년인 420년이다.

 

위덕왕 3년인 556년에는 혜명대사가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으며, 679년에는 의상이 수리해서 화엄종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신라 화엄 10찰의 하나가 되었다. 의상대사는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으로 삼아 전국의 화엄 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크게 번창되었다.

 

 

진흥왕 원년인 887년에는 무염대사가 중창한 것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임진왜란 와중에도 융성하였다. 그러나 선조30년인 1597년이 일어난 정유재란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37년인 1604년에 인호, 경순, 성안, 보윤 등이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했고, 효종 5년인 1654년에는 사정, 신징, 경환 등이 중수하였다.

 

이 후에도 부분적인 개축과 중수를 거쳐 고종 12년인 1875년에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1899년에는 적묵당이 신축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갑사에는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조성된 불상과 탱화 경판이 남아있다. 또한 갑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를 배출한 호국불교 도량으로도 유명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맞배지붕에 다포계 양식인 대웅전

 

갑사의 대웅전은 859년과 889년에 새로 지었으나, 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인해 건물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선조 37년인 160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인 갑사대웅전은 정면 5, 측면 4칸으로 옆면이 사람인자 모양으로 생긴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양식이다.

 

가운데 3칸은 기둥 간격을 양 끝 칸보다 넓게 잡아 가운데는 공포를 2개씩 놓았고, 끝 칸에는 1개씩을 배치하였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되어있으며 불단에는 충남유형문화재 제165호인 석가여래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모시고 있다. 삼세불의 뒤편에 걸린 탱화는 보물 제1651호로 지정된 영산회상도와 약사회상도, 아미타회상도가 걸려있다. 또한 국보 제298호인 삼신불괘불탱이 불단 뒤편에 보관되어 있다.

 

 

갑사를 답사한 지가 꽤나 시간이 흘렀다. 107일 가을 단풍이 계룡산 아랫자락을 물들이기 시작했을 때니 벌써 두 달이 더 지난 셈이다. 하지만 문화재 답사를 하고 바로 정리를 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한 번 답사에 많게는 20여 가지가 넘는 문화재를 보고오기 때문이다. 갑사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우선 몇 가지만 소개를 하고 미루고 있던 것이,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앞으로 며칠간은 그동안 소개하지 못했던 갑사의 문화재를 소개하려고 한다, 문화재는 어느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의 모습은 바뀐다고 해도, 문화재가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답사를 하는 길에 문화재 안내판을 만나면 괜히 즐겁다. 그것도 전혀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문화재를 만나게 된다면 정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찌 보면 횡재를 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기쁨은 하루 종일 죽어라하고 답사를 해본 사람들만이 느끼는 생각이다.

곡성을 지나 화순 일부를 거쳐 보성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가는 길에 보니, 저수지를 건너 다리 옆에 안내판이 보인다. '봉갑사지‘ 처음 들어보는 명칭이다. 문화재 안내판은 흙색으로 표지판이 되어있다. 그 안내판과 동일한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봉갑사지‘라는 것이다. 망설일 필요도 없다. 봉갑사지를 찾아 좁은 길로 들어섰다.


아름다운 길 끝에서 봉갑사지를 만나다.

정말로 아름다운 길이다. 그 길 끝에 봉갑사지란 표지판이 보인다. 산을 깎아 평평하게 만들고 전각들을 짓느라 한창 분주하다. 우선 차에서 내려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옛날 주추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남 보성군 문덕면 천봉산 봉갑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에 인도스님인 ‘아도화상’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봉갑사는 호남의 삼갑이라 하요, 영광의 불갑사, 보성의 봉갑사, 그 하나는 영암의 도갑사라는 것이다. 이 세 절은 순서대로 지어져 ‘호남삼갑(湖南三甲)’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1,600년 된 절터는 어디로 갔을꼬?

봉갑사에는 도선국사가 삼갑을 완성하고, 각진국사가 중창하였으며, 나옹선사와 무학대사 등도 이곳에서 주석을 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산비탈에 조성중인 불사로 인해, 여기저기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러나 어떻게 석재 하나도 보이지를 않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마침 절의 관계자인 분인 듯한 분에게 물어보았다. ‘봉갑사지가 어디냐?“고. 그랬더니 현재 절을 짓고 잇는 곳이 봉갑사가 있던 곳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 봉갑사의 자리는 어디인가?“ 라고 물었다. 기록에 이 골짜기에 봉갑사가 있었다고 했는데, 꼭 어디인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정말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렵게 찾아 온 봉갑사지이다. 하다못해 석재 하나라도 만났다고 한다면, 이렇게 힘이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오랜 고찰 터에 석재 한 장이 없다고 하니, 이개 웬일일까?

아직은 불사가 초기단계인지 휑한 느낌이다. 삼갑의 한 곳이라고 하는 봉갑사지. 그런데 어떻게 석재 한 장도 없는 것일까? 혹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봉갑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비탈진 등성이 위에 금강저를 높이 쳐들고 서 있는 금강역사에게 길을 묻는다. 이곳이 봉갑사지가 정녕 맞는 곳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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