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676에 소재한 장경사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도성을 지키던 산성으로, 장경사는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인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에 세웠다. 전국8도의 승려들을 모집하여 산성 짓는 것을 도왔는데, 이때 승군들이 훈련을 받으며 머무르던 9개의 절 중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절이다.

 

장경사 경내에는 대웅전, 진남루,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조선시대 승병들이 나라를 위해 활동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승도청을 두고 승군들이 노역에 가담해

 

인조 2년인 1624년 남한산성의 축성이 시작되어 8도의 많은 승군들이 축성 역에 가담하게 된다. 인조 3년인 1625년에는 승도청을 두고 각성대사를 8도도총섭절제중군주장에 임명하여 각도의 승국을 동원케 하고 이들을 감독하며 보살피게 하였다. 남한산성 축성 당시 남한산성에는 모두 9개소의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한산성 축성을 마친 후에도 이곳에 승군을 주둔시키고, 항시 수성에 필요한 훈련을 계속하게 하였다. 이 승군들을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 옥정사 외에 개원사, 한흥사, 국청사, 장경사, 천주사, 동림사, 남단사 등 새로운 사찰들을 세웠다. 9개의 사찰 중 장경사만이 남아 있어 남한산성과 함께 호국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장경사를 돌아보다

 

남한산성을 찾은 것은 10일 아침이다. 사실 장경사를 돌아보러 오른 것이 아니라, 남한산성에 있는 암문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찾아갔다. 남한산성의 암문과 수원 화성의 암문에 대해 비교하여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마침 장경사 곁 성곽에 제1암문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겸사겸사 장경사까지 돌아본 것이다.

 

장경사는 역사적인 절이다. 지금의 대웅전은 당시의 건물이라고 하는데 그동안 많은 보수 등을 한 것 같다. 절의 문 안으로는 모두 추위를 막기 위해 철골 구조물로 문을 만들어 달았기 때문에 예스러움은 많이 반감되었다. 거기다가 종각 등의 건물도 근자에 지은 것들이기 때문에, 과거 축성 당시의 모습을 유추하기에는 힘이 든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약간 우측으로 비켜서 조성을 한 석탑도 낯이 설다. 우리나라의 많은 고찰을 찾아다니면서 괜한 버릇이 하나 늘었다. 전통성을 지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어째 영 신심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찰은 고찰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있다. 그런 품위를 느낄 수가 없으니 어찌하랴.

 

여장을 끼고 성벽을 돌아보다

 

대웅전을 비켜서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가장 높은 곳에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위에 올라 경내를 돌아보니 그때서야 절집다운 분위기가 풍겨온다. 그래서 절은 높은 곳에서 보아야 한다고 한 것일까? 삼성각을 돌아 남한산성 축성을 한 곳으로 돌아보기 위해 내려오니, 아직은 날씨가 쌀쌀한데도 성의 여장을 끼고 걷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과거 이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에서 모인 많은 승군들이 이 장경사에 머물며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구국의 선봉에 섰던 수많은 승병들. 과거 오랜 시간을 그렇게 자신을 돌보지 많았던 승병들이다.

 

장경사 주차장 앞에 세워진 돌탑에 누군가 장난감 하나를 놓아두고 갔다. 아마도 이곳을 찾았다가 놓을 것이 없어 그것이라도 한물로 바친 것은 아닐까?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오늘 답사는 느낌이 큰 것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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