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풍속에는 사람이 죽으면 49재를 지낸다. 49재는 사람이 명을 달리한 날로부터 계산을 해, 7x7을 말하는 것이다. 7일마다 한 번씩 재를 올리기 시작해 일곱 번째 되는 날 재를 마친다. 그만큼 죽음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요시했던 것이다. 이 날이 되어서야 유족들은 조금 슬픔을 가시게 된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 문 앞에 청솔가지와 고추 등을 매단 금줄을 갈어 놓는다, 금줄은 완새끼를 꼬아 그곳에 길지 등을 달아놓는데, 이 금줄은 21일 동안을 걸어 놓는다. 3x721일이다, 이 날이 되면 산신(産神)에게서 그 보호할 수 있는 직능이 부모나 가족에게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금줄은 새롭게 태어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집안에 잡인이나 잡스런 물건을 들이지 않아, 새 생명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하가 위한 방편이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49일간이나 죽음에 대해 슬픔을 함께 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삶과 죽음 중에 어느 것을 더 중요시 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 진도 앞바다 여객선 세월호 참사 49

 

63일은 진도 앞바다 맹골수로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인 세월호가 침몰된 지 49일이 돠는 날이다. 그날의 아픔을 반성하고 세상을 떠난 많은 목숨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49재 의식이 전국 각처애서 열린다. 더구나 생떼 같은 젊은 목숨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생명을 잃은 것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아파하고 또 아파했다.

 

 

히지만 아직도 열여섯 명의 귀한 생명이 진도 앞바다 차디찬 물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진도 팽목항에는 어린 자녀를 기다리고 있는 유족들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울부짖고 있다. 이러한 슬픔이 왜 일어나야 하는 것인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가운데 벌써 49일이 지난 것이다.

 

열여섯 분 다 찾을 때까지 리본 달 겁니다.

 

오전에 수원시청 본관 앞에 마련한 분향소를 찾아 조문을 했다. 젊은 목숨이 한꺼번에 수 없이 사그라진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또한 세월호 분향소 및 연화장, 추모현장 등을 취재를 하면서 가슴이 많이 시렸기 때문이다. 원래 49재는 모든 희생자를 다 찾아내고서 해야 맞는다. 하지만 열여섯 명이나 되는 희생자를 찾지도 못했는데, 49재를 한다는 것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조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 비가 오기 때문에 후줄근하게 젖은 몰골로 돌아다니기가 싫어서이다.

분향소에서 나오세요?”

, 오늘이 49재일이네요.”

저는 다음 날부터 노란리본을 달고 있는데, 열여섯 명을 다 찾을 때까지는 떼지 않을 겁니다.”

 

진운수라는 택시의 최아무개 기사분의 말이다. 왜 그 때까지 리본을 달 것인가를 물으니, 자신은 군생활을 강릉에서 했단다. 강릉은 남대천이 흐르고 있어 설악산에서 흐르는 물이 동해로 유입이 되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을 적이 수중침투를 할 수 없게 쇠봉을 막아놓았는데, 잠수부들이 들어가 그곳에 걸린 것들을 걷어낸다는 것.

 

 

그때 물에 빠진 익사자들을 보았기 때문에,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시신조차 찾아내지 못한 분들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래서 노란 리본을 땔 수가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 49. 아직까지도 팽목항에서 어린 자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 그리고 그 슬픔을 고스라니 가슴에 묻고 있는 유족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는 국민들. 오늘 비가 오는 날, 그 숱한 생명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서 다시는 이런 아픔을 당하지 말라고.

 

4회 이주영 개인전을 찾아가다

 

해움미술관’, 수원시 팔달구 교동 91-1 지하에 자리한 미술관이다. 컴컴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넓은 전시관이 나온다. 새로 미술관을 개장해 첫 전시인 4회 이주영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1010일부터 시작한 전시는 116일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작가 이주영은 중앙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전시실 안에는 벽에 그림들이 걸려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을 보다가 낯익은 모습들이 보인다. 한계령과 골목길들. 그 골목길들이 왠지 낯이 익다. 한계령이야 헤아릴 수도 없이 넘은 곳이다. 그런데 이 골목들이 왜 눈에 익을까? “지동 골목입니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골목이니까요.” 작가의 설명에 ~ 그랬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골목을 그리는 이주영 화백

 

이젠 작가라는 말보다는 화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세월을 보냈다. 벌써 54세라는 나이를 먹었지만, 그는 아직도 소년과 같은 감성을 지니고 있다. 그동안 그림을 그린 햇수에 비해서 많은 개인전을 갖지는 않았다. 3회의 개인전을 수원미술관에서 가졌다.(2003, 2009, 2011) 그리고 이번에 4회째 개인전을 연 것이다.

 

단체전은 미술동인 새벽전, 환경미술전, 나눔회전, DMZ, 우리가 서야 할 이 땅에서 전, JAALA, 아시아는 지금 전, 수원민미협전, 인권미술전, 백만송이 실루전, 동인전 등 많은 단체전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현재 민족미술협회, 나눔회, 교동창작촌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그림엔 아픔이 실려 있었다.

 

29일 오후 해움미술관을 찾았다. 작가 이주영은 수원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림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죠. 사실은 어릴 때 지독한 소아마비를 앓았어요. 1년 정도 일어설 수가 없으니 앉아서 즐길 수 있는 것이 그리기와 만들기 증 앉아서 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없었죠. 그림에는 어릴 적부터 소질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랬기에 지금은 자신의 화실을 갖고 사람들을 가르칠 수가 있다고 한다. 수원시 팔달구 교동 86-1번지 이층에 이주영 화실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전시실을 한 바퀴 돌아본다. 그림이 남다르다. 어릴 때의 아픔이 있어서인가? 그의 그림 속에는 진한 아픔이 있다. 이리저리 비뚤어진 골목길, 그리고 그 골목길에서 집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의 쓸쓸한 뒷모습. 가을이 서리서리 내린 한계령. 그가 즐겨 그리는 그림들 속에는 아픔이 실려 있었다.

 

격동의 세월을 그림으로 표현 해

 

그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그림을 그립니까?”라고 물었다.

그려야 하니까요. 저에게 그림은 운명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죠. 좋아하는 것들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표현 중에 가장 잘 맞는 것이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물론 그림을 그리면서 아픔을 겪지 않은 것은 아니다. 80년대부터 90년 초까지 격동의 세월에 미술운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사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진한 슬픔이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10년 그림을 떠나 있었어요. 안성, 평택 등으로 돌아다니면서 그림에서 손을 땠죠. 그런데 그림이 도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수원으로 올라왔어요. 선배의 화실 한 귀퉁이에 공간을 만들어 그림을 그렸죠. 그러다가 지난해에 화실을 마련했어요.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분들을 가르치는데, 수입은 영 시원찮아요. 하지만 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그 행복이 바로 그림에 있다고 한다. 이주영 작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많은 그림들이 돈으로 따지면 엄청날 것 이라고 하며 웃는다. 시간이 지나면 더 부자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웃는 그의 미소을 보면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깊은 아픔 속에서 스스로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3천 만 명 이상이 민족의 대이동을 했다는 계사년 설 연휴.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나라의 설은 명절 중에서도 가장 큰 명절이다. 명절 때가 되면 멀리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밀린 이야기들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명절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명절이 더 외로운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직업 때문에 고향을 찾아가 가족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그것은 자신이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날 수 있는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설날인 10일 하루 동안 찾아 본 그들의 마음 아픈 이야기이다.

 

 

3년 째 보지못한 가족, 체취라도 맡고싶어

 

서울을 올라가려고 수원역을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뒤늦게 고행을 찾아 기차를 타려고 역사 안이 시끌벅적하다. 그 한편에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보인다. 보따리를 하나 곁에 두고 하염없이 기차를 타기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눈에 이슬이 맺혀있는 것이 보인다. 곁에 가서 괜히 이야기를 걸어본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사람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날씨가 추울 거라고 하더니 좀 풀렸네요.”

담배 피우세요?”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시죠.”

 

흡연구역으로 따라 나오기는 했지만 정작 담배를 피우지를 않는다. 가만히 보니 담배가 없는 듯하다. 매점으로 가서 담배 한 갑을 사서 손에 쥐어준다. 그리고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고향이 어디세요?”

“......”

그런데 고향에 안 가세요?”

벌써 가족들을 보지 못한지 3년이 넘었네요.”

 

고향조차 말하기가 어려운 듯하다. 사업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부도를 내고 말았다는 김아무개() 고향을 갈 수도 없고, 전화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명절 때만 되면 역에 나와 이렇게 사람들이 고향을 가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면 보지 못하는 가족들의 체취라도 맡을 수 있을까 해서란다. 그 말에 가슴이 아려온다. 나 역시 한 때 가족들과 떨어져 수많은 날을 그리움으로 지새보았기에,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찬바람을 맞는 어르신은 왜 혼자였을까?

 

명절 전인 8일 재래시장을 취재하러 나갔다. 취재를 마치고 일부러 남수문을 돌아 화성을 좀 걷고 싶었다. 창룡문 쪽을 따라 성 밑 길을 걷고 있는데, 추운 날씨에 어르신 한 분이 성 밑돌에 앉아계시다. 이 추운데 왜 저곳에 계신 것일까?

 

어르신 이 추운데 왜 거기 계세요. 고뿔드시겠어요.”

갈 데가 없어

집이 없으세요?”

아니 잔 집은 있어. 그런데 장에 나온 사람들 구경하느라고

그럼 장으로 가서 보셔야죠.”

장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이 더 보고 싶어서.”

 

말끝을 흐리시는 어르신. 혼자 생활을 하시는 홀몸어르신이라고 하신다. 아들딸이 있지만, 벌써 보지 못한지가 오래되었다고. 어쩌다보니 혼자가 되었다고 하시는 어르신, 더 이상을 물을 수가 없다. 언제인가 방송 일을 할 때 양로원에 계시던 분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그분은 자녀들이 살고 있는 주소도 모른다. 집 전화번호도 모른다. 그리고 심지어는 아들의 이름도 모르신다고 했다. 자녀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눈물을 흘리시면서 무엇인가 방바닥에 손가락 글씨를 쓰더라는 것이다. 물론 그 손가락 글씨는 보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이나, 귀여운 손자손녀들의 이름이었을 것이다.

 

명절이 되면 더 슬픈 사람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명절 때마다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저런 이유로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명절을 보내는 많은 사람들. 이젠 더 이상 이렇게 가슴 아픈 모습들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정부가 들어서고 최우선이 서민들의 복지라고 한다.

 

과연 이 새 정부가 온전한 복지를 이루어낼 수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올 계사년 추석에는 제발 이렇게 혼자서 아픈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는 무관합니다. 설날 한국민속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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