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산, 숙지산, 여기산 등을 돌아보며 쐐기흔적 찾아보기

 

가끔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지인들로부터 연락을 받을 때가 있다. 한 인터넷 언론에 몇 년 동안 1,500건이 넘는 문화재에 관한 기사를 송고하다보니 나름 그 방면에서 이름을 알고 있는 듯하다, 가끔은 사진 자료를 요청하기도 하고, 계절에 맞는 문화재 여행에 대해 좋은 곳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도 받는다. 수원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 화성을 돌아보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지정 사적 제3호이다. 그만큼 문화재로서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난 수원을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꼭 한 가지 제안하는 것이 있다. 수원화성을 돌아보면서 화성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화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했는지, 또 성을 쌓은 돌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흔히 성돌을 뜬 곳을 부석소라고 한다. 큰 바위를 나르기 좋게 잘라 화성축성의 현장까지 옮겨왔다. 수원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 등을 찾아가보면 돌을 떴던 큰 바위에 쐐기자국이 남아있다. 바위를 잘라내기 위해서 홈을 파 그곳에 나무쐐기를 박고 물을 부어, 나무가 부풀어 올라 바위를 쪼개낸 현장이다. 그런 현장을 돌아보면 수원화성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축성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팔달산 곳곳에 남아있는 돌 뜬 흔적

 

9일 오전, 수원을 찾아 온 지인들을 인내하여 지동순대타운에 들려 순대국밥을 한 그릇씩 먹은 후에 우선 화성을 돌아보는 것으로 돌을 뜬 곳을 찾아나섰다. 먼저 이들에게 알려줄 것은 바로 화성을 쌓은 돌에 남아있는 쐐기자국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억새가 피어 아름다운 동남각루를 지나 화성을 돌면서 성벽에 남아있는 쐐기자국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찾아간 곳은 팔달산에 있는 성돌을 뜬 흔적이다. 수원시 팔달구 팔달산로 318(교동) 팔달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수원중앙도서관 옆으로 팔달산으로 오르는 소로가 있다. 이곳을 걸어 팔달산 위 수원화성 성벽을 보고 오르면 4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성돌을 떠내느라 파 놓은 쐐기자국이 남아있다.

 

성을 쌓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석재이다. 화성 축성 시 사용한 석재는 모두 201403덩어리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69609전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년 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가 밝힌바 있다.

 

팔달산 위로 올라 화성 성벽을 따라 성 밖으로 걷다보면 여기저기 바위가 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깨진 돌을 찬찬히 살펴보면 쐐기자국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문화재 안내를 할 때 꼭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 현장 입구까지만 안내하고 정작 현장은 스스로 찾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이 필요한 문화유적을 찾았다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오래도록 문화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가을이 짙어진 숙지산 부석소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 소재하고 있는 숙지산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이 숙지산이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었다. 그야말로 돌이 비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17961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라고 했단다.

 

산에서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으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의 양을 보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양이 숙지산 81100덩어리, 여기산 62400덩어리, 권동 32천덩어리, 팔달산 13900덩어리 등 189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

 

가을이 깊은 숙지산의 돌뜬 흔적은 여러 곳에 보인다. 그중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 화서다산도서관 뒤편에 있는 흔적이다. 여러 곳에서 돌을 뜬 후 수레를 이용해 돌을 화성 축성역장으로 날랐다. 돌은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인 대거, 4~8마리가 끄는 수레인 평거,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인 발거와, 장정 4 사람이 끄는 수레인 동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수레를 이용해 축성현장까지 돌을 옮겼다.

 

 

선사유적지가 있는 여기산에서도 성돌을 떠내

 

서호를 내려다보는 구릉처럼 솟아있는 산, 바로 여기산이다. 여기산(麗岐山)은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구 농촌 진흥청 내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104.8m의 산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여기산(如岐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산세가 크지 않고 산의 모습이 기생의 자태와 같이 아름다워서 '여기산(麗岐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산의 정상부에는 토축산성이 조성되어 있는데, 해발 104.8m로부터 10m 아래에 쌓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전형적인 머리띠 모양의 테뫼식으로 성 길이는 약 453m이다.

 

길 우측 아래로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이곳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할 때 돌을 뜬 곳으로 기록되어있다.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 본다. 바위의 크기가 엄청나다. 어른 키의 몇 배가 되는 거대한 바위에 돌을 떠내기 위한 쐐기자국이 보인다. 절개된 바위 면에 선명하게 쐐기를 박기 위해 파 놓았던 구멍이 있다.

 

가을,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이 계절에 수원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좀 더 스토리가 있는 야행을 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단지 지나치면서 수원화성을 관람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좀 더 알차고 내실있는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견고하고, 아름답게 축성한 성이다. 이렇게 자연과 조형을 이루면서 축성이 된 화성은, 물자를 조달하는데도 강제적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그에 맞는 비용을 지불하고, 물자를 구입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일일이 기록을 하고 있어, 당시 기록문화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성을 쌓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석재이다. 화성 축성 시 사용한 석재는 모두 20만1천403덩어리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만6천960냥9전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년 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가 밝힌바 있다.  

 

 팔달산의 성돌 채취흔적

 

가까운 곳에서 돌을 채취해 와

 

화성을 축성 할 때 사용된 돌은 그 무게로 인해 멀리서 운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성 축성의 장소에서 가까운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권동 둥에서 석재를 채취했다. 지금도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일대에는 당시 돌을 뜬 자국들이 남아있다.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은 숙지산이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었다. 그야말로 돌이 비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1796년 1월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라고 감탄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옛 지명을 보면, 다 그렇게 변하게 된다. 앞을 내다본 선조들의 예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숙지산의 성돌 채취흔적(위)와 여기산의 흔적

 

부석소를 설치하고 성돌을 떠내

 

공석면 숙지산은 현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다. 이 산에서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으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의 양을 보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양이 숙지산 8만1천100덩어리, 여기산 6만2천400덩어리, 권동 3만2천덩어리, 팔달산 1만3천900덩어리 등 18만9천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고 부석소에서 떠 낸 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커다랗게 떼어내 옮겨온 돌은 치석소로 보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은 후에 사용을 했다. 특히 성곽에 사용된 돌의 경우 일정한 규격에 의해 척수에 따라 대. 중. 소로 규격화한 다음, 축성현장으로 옮겨져 성을 쌓는데 사용된 것이다.

 

 공석면 숙지산의 부석소 표지

 

각종 운반용 수레 사용

 

부석소에서 캐어낸 돌을 어떻게 화성의 축성현장까지 옮겼을까? 돌덩이 하나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돌을 나르는 것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정조는 돌을 옮기기 위해서 지시를 내린다. 즉 도로를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하게' 도로를 개설하라고 지시했다.  

 

돌은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인 대거, 소 4~8마리가 끄는 수레인 평거,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인 발거와, 장정 4 사람이 끄는 수레인 동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수레를 이용해 축성현장까지 돌을 날랐으며, 때로는 썰매를 사용하기도 했다. 소 40마리가 끌었다는 대거에 올린 돌의 크기는 상당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화성의 축성에 사용된 돌, 지금은 팔달산과 여기산, 숙지산 등에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는 정도지만, 그 역사의 현장을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모든 것이 <화성성역의궤>에 고스란히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수원시 팔달구 화서 2동 산 41번지 일원에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인 숙지산 화성 채석장이 소재한다. 이 숙지산은 높지 않은 산이지만, 화성을 축성할 때 많은 돌을 이곳에서 채석을 했던 곳이다.

 

화서전철역 부근 구 연초제조창의 건너편 숙지산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으며,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성돌의 채석이 이루어졌던 유적으로, 팔달산과 함께 중요한 성돌의 공급원이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채석을 한 돌은 수레를 이용하여, 화성의 축성 장소까지 돌을 운반하였다. 숙지산에는 채석 당시의 쐐기 자국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많은 화성의 돌을 떠낸 숙지산

 

숙지산 앞에 조성한 숙지공원에는 이곳이 화성을 축성 할 때 돌을 뜨던 곳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하나 보인다.

 

돌 뜨던 터(=浮石所)라고 적어 놓았다. 이곳에서 돌을 떠서 화성의 축성 장소까지 옮겨갔는데, 그 명칭이 재미있다. ‘채석장(採石場)’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부석소(浮石所)’라고 한 것은, 아마도 돌을 떠 옮기는 광경을 묘사한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9월 21일 오후에 숙지산 채석장을 찾아가 보았다.

 

 

 

숙지공원에서 주차장 위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곳에서 산길을 타고 오르다가 좌측 능선을 따라 오르다가 보면,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수원은 어딜 가나 이런 소나무 숲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아마도 정조의 소나무길을 비롯해, 이렇게 소나무가 많은 것도 다 나름의 뜻이 있엇을 것이다.

 

소나무는 양지식물로 다른 나무들이 자라기 힘든 메마른 곳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바위 틈새에서도 자라나는 소나무들을 볼 수 가 있는 것도, 이렇게 소나무의 자생력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른 색을 변하지 않으며, 강인한 인상을 주는 줄기 때문에, 대나무와 함께 변하지 않는 절개를 갖는다는 뜻으로 ‘송죽지절(松竹之節)’을 상징하거나 인품이 뛰어난 사람을 가르치는 ‘송교지수(松喬之壽)’라고 했다.

 

 덤불로 인해 접근조차 어려운 채석흔적

 

숙지산은 화성을 축성 할 때인 1794년 1월부터 1796년 9월까지 패석을 한 곳이다. 먼저 정으로 구멍을 파고, 그 구멍 안에 물푸레나무나 밤나무로 쐐기를 박는다. 그런 다음 나무에 물을 부어놓으면, 나무가 부풀어지는 힘으로 돌을 갈라놓는다. 현재 화성을 돌다가 보면, 이렇게 성돌을 뜰 때 사용한 흔적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소나무 숲을 지나 동편으로 난 길을 가다가 보면, 그 좌측 아래에 돌을 뜬 흔적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유난히 바위가 많았던 곳이었나 보다. 칼로 자른 듯 암벽이 절개가 되어있는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런데 사진촬영을 하려고 하니, 도대체 앞으로 다가설 수가 없다. 덤불과 쓰러진 나무들로 인해 접근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이번 숙지산 채석장 답사도 그렇고, 지난번에 찾아갔던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도 그랬다. 도대체 주변에 잡초와 여러 가지 불필요한 것들이 널브러져 있어. 문화재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렇게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문화재란 그것이 국보거나 향토유적이거나 모두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이렇게 방치가 되어있는 문화유산들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도대체 이렇게 관리를 하지 않고 있는 담당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말만 하면 인력이 부족하다느니, 예산이 없다느니 하고 떠들어 댄다. 하지만 정말 우리고장의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한 번 찾아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말로만 떠들어대는 문화재 사랑. 그런 다중적인 마음 씀씀이로 인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은 오늘도 퇴락하고 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애불에 무엇을 빌었을까? 아마도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도 했을 테고, 누구는 꼭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도 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도 했을 테고, 이웃집 아주머니는 서방님에 대한 간절함도 빌었을 것이다. 한 마을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마애불이 있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에 소재한 수원박물관에 들러 기획특별전을 보고 나오다가 보니 박물관 마당에 석조물들이 보인다. 이것저것을 돌아보면서 일일이 촬영을 하다 보니, 박물관 입구 쪽에 전각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바위가 있는데 마애불인 듯하다. 몇 시간을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마애불을 촬영하기 위해서도 가는데, 평지에서 마애불을 만나다니 이게 웬 횡재인가?

 

 

일석에 조성된 특이한 삼존불

 

수원박물관 경내에 자리한 마애불은, 현재 수원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중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삼존마애불은, 가운데 약사여래좌상을 두고 양편에 협시불을 조성했다. 일석에 삼존상을 조성하였는데, 중앙에 본존인 약사불은 연화대좌위에 좌상으로 새겨져 있고, 양쪽에는 협시상은 입상으로 조각하였다.

 

본존의 높이는 120cm 정도로 두광을 조성하고, 육계가 평평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마의 중앙에는 백호의 흔적이 보인다. 목에는 삼도를 조각하였으나 많이 마모가 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양편에 조각한 협시상은 입상으로, 높이가 100cm 정도이다. 흔히 동자상이 민머리인데 비해 이들 협시상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아마도 동자가 아닌 보살상으로 조성을 한 듯하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양편의 협시보살상은 바로 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것은 약사여래가 주야로 쉬지 않고 중생을 돌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양편 보살상의 법의는 통견이며, 수인은 미숙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원래 이 마애불은 화서동 숙지산의 동쪽에 자리한, 동래 정씨들의 세거지 아래쪽에 자리하던 것을 2008년에 이전하여, 10월 1일 수원박물관의 개관일에 맞추어 일반인들에게 선을 보였다.

 

마을에서 기자신앙의 대상물로 섬겨

 

중앙에 새겨진 약사여래상. 약사불은 중생의 질병을 구완하는 부처이다. 동래 정씨들의 집안 부녀자들이 매달 초하루가 되면, 이 약사불에 와서 빌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아들이 없어 애를 태우던 사람이, 이 마애삼존불에 빌어 삼형제를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래서 이 약사불은 득남에 영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을에서 전해지는 설화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중앙에 조성한 약사여래좌상이다. 본존불은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데, 몸에 비해 머리가 크게 조성이 되어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늘어져 있으며, 법의에서 보이는 옷 주름 등의 처리도 미숙하다.

 

일반적인 마애불과는 차이가 있어

 

이 약사여래마애좌상은 연화대 밑에 축대를 상징한 듯한 조각이 보인다. 양편에 서 있는 협시상의 발밑에도 역시 같은 처리가 되어있다. 크고 작은 돌을 이용해 축대를 쌓은 듯한 형상이다. 우측 손은 무릎위에 놓고, 좌측 손은 가슴께로 끌어올려 안으로 향하고, 우측 손은 무릎 위에 놓고 있다.

 

 

이 삼존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고 있으며, 얕은 부조로 조성을 하였다. 그런데 이 약사여래좌상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누군가 코를 다 파낸 듯하다. 기자속에 부처의 코를 깎아다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아마도 누군가 아들의 점지를 간절히 원하여 이 동래정씨 집성촌에 서 있던 마애불의 코를 깎아낸 것이나 아닌지. 결국 부처님의 코와 아들하고 맞바꾸었다는 이야기이다.

 

오래도록 동래 정씨들이 섬겨왔다는 마애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점지 한 것일까? 조금은 미숙한 조각이지만, 그 마음이 한없이 따듯하다. 이웃에서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그런 동네아저씨와 같은 편안한 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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