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마애불에 무엇을 빌었을까? 아마도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도 했을 테고, 누구는 꼭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도 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도 했을 테고, 이웃집 아주머니는 서방님에 대한 간절함도 빌었을 것이다. 한 마을에서 그렇게 오래도록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마애불이 있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에 소재한 수원박물관에 들러 기획특별전을 보고 나오다가 보니 박물관 마당에 석조물들이 보인다. 이것저것을 돌아보면서 일일이 촬영을 하다 보니, 박물관 입구 쪽에 전각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바위가 있는데 마애불인 듯하다. 몇 시간을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마애불을 촬영하기 위해서도 가는데, 평지에서 마애불을 만나다니 이게 웬 횡재인가?

 

 

일석에 조성된 특이한 삼존불

 

수원박물관 경내에 자리한 마애불은, 현재 수원시 향토유적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중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삼존마애불은, 가운데 약사여래좌상을 두고 양편에 협시불을 조성했다. 일석에 삼존상을 조성하였는데, 중앙에 본존인 약사불은 연화대좌위에 좌상으로 새겨져 있고, 양쪽에는 협시상은 입상으로 조각하였다.

 

본존의 높이는 120cm 정도로 두광을 조성하고, 육계가 평평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마의 중앙에는 백호의 흔적이 보인다. 목에는 삼도를 조각하였으나 많이 마모가 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양편에 조각한 협시상은 입상으로, 높이가 100cm 정도이다. 흔히 동자상이 민머리인데 비해 이들 협시상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아마도 동자가 아닌 보살상으로 조성을 한 듯하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양편의 협시보살상은 바로 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것은 약사여래가 주야로 쉬지 않고 중생을 돌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양편 보살상의 법의는 통견이며, 수인은 미숙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원래 이 마애불은 화서동 숙지산의 동쪽에 자리한, 동래 정씨들의 세거지 아래쪽에 자리하던 것을 2008년에 이전하여, 10월 1일 수원박물관의 개관일에 맞추어 일반인들에게 선을 보였다.

 

마을에서 기자신앙의 대상물로 섬겨

 

중앙에 새겨진 약사여래상. 약사불은 중생의 질병을 구완하는 부처이다. 동래 정씨들의 집안 부녀자들이 매달 초하루가 되면, 이 약사불에 와서 빌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아들이 없어 애를 태우던 사람이, 이 마애삼존불에 빌어 삼형제를 나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래서 이 약사불은 득남에 영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을에서 전해지는 설화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중앙에 조성한 약사여래좌상이다. 본존불은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데, 몸에 비해 머리가 크게 조성이 되어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늘어져 있으며, 법의에서 보이는 옷 주름 등의 처리도 미숙하다.

 

일반적인 마애불과는 차이가 있어

 

이 약사여래마애좌상은 연화대 밑에 축대를 상징한 듯한 조각이 보인다. 양편에 서 있는 협시상의 발밑에도 역시 같은 처리가 되어있다. 크고 작은 돌을 이용해 축대를 쌓은 듯한 형상이다. 우측 손은 무릎위에 놓고, 좌측 손은 가슴께로 끌어올려 안으로 향하고, 우측 손은 무릎 위에 놓고 있다.

 

 

이 삼존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고 있으며, 얕은 부조로 조성을 하였다. 그런데 이 약사여래좌상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누군가 코를 다 파낸 듯하다. 기자속에 부처의 코를 깎아다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아마도 누군가 아들의 점지를 간절히 원하여 이 동래정씨 집성촌에 서 있던 마애불의 코를 깎아낸 것이나 아닌지. 결국 부처님의 코와 아들하고 맞바꾸었다는 이야기이다.

 

오래도록 동래 정씨들이 섬겨왔다는 마애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점지 한 것일까? 조금은 미숙한 조각이지만, 그 마음이 한없이 따듯하다. 이웃에서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그런 동네아저씨와 같은 편안한 상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 수원박물관 이종학 특별전

 

내가 생전에 사운 이종학 선생을 만나 뵌지도 꽤 오래되었다. 막걸리 한잔을 마시면서 늘 하시는 말씀이

 

“독도는 우리 땅이다. 간도도 우리 땅이다. 우리는 벌겋게 두 눈을 뜨고 우리 땅을 빼앗긴 못난 민족이다. 우리가 역사를 바로세우지 않으면, 아마도 이 다음에 우리 자손들에게 정말 못할 짓을 한 선조가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 이종학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지가 벌써 10년이 흘렀다. 8월 14일 오후 3시,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에 소재한 수원박물관 기획전시실 앞에서는 ‘사운 이종학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이란 기획전의 개막식이 열렸다.

 

 

선생님은 진정한 애국자요, 사학자입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수원박물관의 한동민 기획팀장은

 

“이번 기획전은 내일이 8,15 광복절이라 특별전으로 마련했습니다. 이종학 선생님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자료를 입수하면서부터 우리 민족과 영토에 대한 수많은 자료를 찾아내신 분입니다. 저희 수원박물관에 기증하신 자료만도 2만점 정도가 됩니다. 선생님은 자비를 들여 자료수집을 하셨으면서도 관련자료를 박물관 등에 무상으로 기증을 하시고는 했습니다. 평생을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독도에 관한 자료는 거의 다 독도박물관에 기증을 하셨고, 그 외에도 경기도박물관, 동학혁명기념관, 이순신기념관, 토지박물관 등에 수많은 자료를 기증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선생님께서는 늘 한, 중, 일 삼국의 관계를 영토분쟁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국과는 간도문제를, 일본과는 독도문제를 늘 이야기를 하셨죠. 선생님은 평생 학자로 사신분이십니다. 책을 손에서 놓으신 날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은 독도박물관 앞에서 영원히 독도를 지키실 것입니다”

 

 

유가족 인삿말을 하는 동안 염태영 수원시장(우)과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좌)이 함께 하고 있다(사진 위) 개막식의 테이프 커팅(아래) 

 

사운 이종학 선생의 나라사랑

 

오후 3시 특별기획전이 마련된 전시실 앞 중앙로비에서는 염태영 수원시장과 노영관 수원시의회 의장을 비롯하여, 미망인을 비롯한 유가족들과 100여명의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염태영 수원시장은 기념사를 통해

 

“이런 전시는 국가차원에서 해야 할 것이다. 이종학 선생은 수원을 사랑하신 분이고, 평생 자비를 들여 나라를 굳건히 세우겠다는 뜻 하나로 사신분이다. 이런 분이 수원분이시라는 것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이 전시는 수원시민들과 공무원들은 물론,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들도 꼭 보았으면 한다. 선생님의 나라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전시중인 사운 이종학 선생이 수원박물관에 기증한 자료들

 

사운 이종학 선생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해, 고서점을 운영하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를 했다. 선생의 호 ‘사운(史芸)’도 ‘역사를 김매기 한다.’는 뜻이다. 선생은 늘 그렇게 역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사료를 무기삼아 뛰어들었다.

 

선생은 평생에 가장 기쁜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내 생애 가장 기쁘고 통쾌한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그 하나는 1945년 조국 광복이요, 또 하나는 1990년 7월 2일 시마네현에서 관계자로부터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우리 땅‘이라는 항복을 받고 온 일이다" 라는 것이다.

 

 

사운 이종학 선생의 친필 자료정리본(위)과 1844년 발행된 신제여지전도의 부분. 프랑스인이 1835년에 만든 세게지도를 참고해서 미쯔쿠리 소고가 제작한 지도. 조선과 일본사이의 바다가 '조선해'로 표기되어있다. 사운 선생은 늘 동해가 아닌 조선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해오셨다 


 

사운 이종학 선생의 독도에 대한 끊임없는 자료수집과 연구는 앞으로 계속되어야만 한다. 평생을 일본 스스로가 ‘대한민국 독도’를 인정하는 자료를 모았으며, 방위개념의 동해가 아닌, 고유명칭인 ‘조선해’로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생의 노력으로 1997년 ‘독도박물관’이 개관하게 된다.

 

간도도 빼앗긴 우리 땅

 

사운 이종학 선생은 살아생전에도 늘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했다. 일본에 의해 우리 땅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빼앗겼다는 것이다. 간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보면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나라간 백두산 정계비를 설치하고, 입록강과 토문강에 이르는 선을 국경선으로 정함. 조선후기 조선 유민들이 이주 정착

1881년(고종 18) 청나라가 간도에 대한 봉금을 해제하고 자국민의 이주를 장려하면서 간도 영유권 문제 발생

1902년(광무 6) 대한제국 정부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 한인보호에 힘씀

1904년(광무 8) 북변간도관리사 이범윤 소환

1907년(융희 1) 일제의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 설치. 간도는 한국의 영토로 규정

1909년(융희 3) 일제는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보장받는 댓가로 청나라의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을 인정하고 ‘간도협약’을 체결. 대한제국은 영유권 주장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본에 의해 간도를 빼앗김.

 

 

특별전시관에는 모두 7가지로 구분을 하여 전시를 한다. 1. 프롤로그 전시개요와 이종학 연보, 2. 역사의 김매기를 시작하다. 3. 충무공 이순신과의 만남, 4. 한줌 재 되어도 우리 땅 독도 지킬 터, 5. 우리 강역지키기(일제 대륙침략사), 6. 내 고향 수원, 7. 에필로그 끝나지 않은 역사전쟁이다. 이번 전시는 2012년 8월 14일부터 10월 14일까지 계속되며 매월 첫째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나혜석, 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이름이다. 도대체 나혜석이란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 실체를 안다는 것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지 못한 사람은 힘든 일이다. 혹여 글 하나로 인해 지난 역사속의 인물에 대해 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2월 26일,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고 한다. 영하 10도를 조금 밑돈다고 하지만, 체감온도는 그보다 더 추은 듯하다. 수원박물관에서 12월 23일(금)부터 2012년 2월 26일(일) 까지 열린다는 ‘2011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인 ‘나는 나혜석이다’를 보기 위해서이다. 개막식을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지만,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조용히 나혜석을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수원박물관 특별기획 전시 '나는 나혜석이다'의 입구


수원출신의 여성해방론자 나혜석

나혜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이다. 혹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화가요 문학가이며, 민족운동가에 여성해방론자’ 라는 긴 수식어로 표현을 한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혹자는 나혜석을 ‘현대를 살아가는 개방적인 여성이라는 것에는 찬성을 하지만,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난해함’을 지닌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이번 특별전은 혼탁한 시대를 살아갔던 신여성인 나혜석이라는 인물이, 자신을 1인칭의 시점으로 되돌아보는 자리로 마련을 하였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제목이 말해주 듯,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나혜석에 대한 사고를 바꾸어 놓기 위한 자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원에서 태어났다'의 나혜석의 학창시절, 학교에서 사용했던 양금과 아코디언, 그리고 가계도


‘여자도 사람이다’

나혜석이 추구한 것은 시집살이라는 올무에 갇혀 음지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닌, 세상 밖으로 나와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살아가는 그런 여성을 추구했다. 인간으로, 그것도 당당한 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것이다.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세계여행을 1927~8년에 했다는 것은, 나혜석이 얼마나 신문물에 목말라 했는지 가늠이 간다.

결국 그러한 세계여행이나 그녀가 쓴 글들에서 치열하게 남들보다 앞장서서 세상을 살았던 나혜석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전시회에서 우리가 나혜석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단지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좀 더 진취적이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나혜석은 문학가이기도 했다. 많은 책들에 실린 니혜석의 글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나혜석이다”

나혜석 특별전은 모두 6개의 파트로 구분이 된다. 나혜석의 연보를 알아볼 수 있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 ‘나는 신여성이다’로 이어진다.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는 나혜석의 가족사진과 학창시절의 학적부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나는 신여성이다 에는 나혜석 소개영상을 준비했다.

다음으로 ‘나는 세상에 말하고 싶다’에서는 나혜석의 문학작품 및 유화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인연을 맺었다’에는 구미와 프랑스의 여행기와 교류작가 자료 등을 전시했다. 다음으로는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에서는 수원과 나혜석에 대한 자료 등을 만나볼 수가 있다.


나혜석은 유화를 그리기 전 삽화작업도 했다. 아래는 나혜석의 유화가 소개된 책들


전시실에는 나혜석이라는 존재를 알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얼마나 많은 글과 그림 등을 통해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 속에 녹아있는 수많은 꿈과 이상을 만날 수가 있다.

「조선 남자들은 참 이상합니다. 자신들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자신의 부인에게는 정조 지키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나혜석의 이혼고백장, 1934년 삼천리)」

이 한 구절의 이야기가 어쩌면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조선의 남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성들을 자신들의 아래에 두고 비하시키는 그러한 사회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온 나혜석. 그녀는 오늘 “나는 나혜석이다.”라고 절규를 하고 있다. 1896년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40세 때인 1935년 다시 수원으로 돌아 온 나혜석은 1937년 수덕사, 다솔사, 해인사 등으로 돌아다녔다.


나혜석이 그린 유화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도 한 나혜석의 흔적


10여 년 동안 절집을 돌아다니면서 나혜석은 세상에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1948년 53세의 나이로 서울 시립 자재원에서 세상을 떠난 나혜석은, 아직도 세상에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하다. 수원박물관 학예팀의 이동근의 말이다.

“나혜석에 대한 자료는 많지가 않습니다. 그 자료도 모두 뿔뿔이 흩어진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모았습니다. 오늘 이 자료가 나혜석이라는 한 여성을 재조명하기에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최린(위),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나혜석은 아픔을 당하고, 사회에서 나혜석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도 했다


「나는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지 115년. 사람들은 나를 신여성, 최초의 여성유화가, 문학가, 민족운동가, 여성해방론자라고 말한다. 나는 예술적 삶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었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충실하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며 슬프고도 노여운 시대에 살면서 나는 그림과 글을 통해 ‘나는 나혜석이다’라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특별전시 팸플릿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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